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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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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시위 르포] 백인에겐 마스크, 흑인에겐 수갑

코로나19 희생도 흑인이 압도적… 인종차별 반대 시위 대도시 벗어나 시골 지역까지 확산
등록 2020-06-13 04:49 수정 2020-06-15 00:50
백인 경찰에게 목이 짓눌려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6월10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플로이드가 숨질 때 상황처럼 두 손을 뒤로 한 채 바닥에 엎드려 누워 있다. 이들은 백인 경찰이 무릎으로 플로이드의 목을 눌러 숨지게 한 시간인 8분46초 동안 누운 자세를 유지했다. EPA 연합뉴스

백인 경찰에게 목이 짓눌려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6월10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플로이드가 숨질 때 상황처럼 두 손을 뒤로 한 채 바닥에 엎드려 누워 있다. 이들은 백인 경찰이 무릎으로 플로이드의 목을 눌러 숨지게 한 시간인 8분46초 동안 누운 자세를 유지했다. EPA 연합뉴스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무릎에 짓눌린 채 숨진 사건으로 미국이란 ‘인종의 용광로’가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플로이드는 6월9일 장례를 치르고 영면에 들었다. 현지 분위기와 이번 사태의 배경을 분석한 남수경 뉴욕 변호사의 글과 로스앤젤레스에 살며 현지 시위에 참여한 교민 황상호씨의 글을 싣는다.

4월10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아먼 헨더슨이라는 흑인 남성이 바로 자기 집 앞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대학병원 의사인 헨더슨은 코로나19가 미국을 강타하는 가운데 감염병에 취약한 노숙인에게 무료 진단검사를 해주는 등 의료봉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날도 노숙인에게 전달할 물품을 집 앞에 세워둔 차에 싣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경찰차가 되돌아와 멈췄다.

검문하는 백인 경찰관에게 헨더슨은 이 집에 산다고 말했지만, 경찰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 수칙을 지키기는커녕 마스크도 쓰지 않은 경찰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목소리를 높일 때, 헨더슨은 코로나19에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를 느꼈다. 경찰이 그에게 신분증을 요구하자 “집 안에 있다”고 말하고 돌아서는 순간, 경찰은 헨더슨을 뒤에서 강제로 수갑을 채워 경찰차에 태우려고 했다. 때마침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집에서 나온 헨더슨의 아내가 신분증을 제시하고서야 그는 풀려날 수 있다. 물론 경찰의 사과는 없었다. 헨더슨이 자기 집 앞에서 범죄자 혐의를 받은 이유는 바로 그의 피부색 때문이었다. 미국 경찰의 ‘레이셜 프로파일링’(Racial Profiling), 즉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는 행태를 의사로 방역 최전선에서 싸우던 헨더슨도 피할 수 없었다.

“개줄 채우라” 부탁하자 911에 “흑인이 위협” 신고

5월25일 아침 뉴욕 맨해튼. 흑인 남성 크리스천 쿠퍼는 센트럴파크 안, 숲이 우거진 램블 구역에서 새를 관찰하고 있었다. 마침 개줄을 채우지 않은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 중인 백인 여성과 마주쳤다. 램블은 센트럴파크 안에서 반드시 개줄을 채워야 하는 구역이다. 쿠퍼는 여성에게 공원 규정을 상기시키며 개에게 개줄을 채워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여성은 갑자기 화내며 쿠퍼에게 ‘인종 카드’를 꺼내들었다. 여성은 경찰에게 신고하겠다고 했고, 곧 911에 전화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며 당장 경찰을 보내달라고 울부짖었다. 여성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말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백인 여성이 흑인 남성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 했다.

만약 쿠퍼가 이 상황을 동영상으로 담지 않았다면, 백인 여성이 다급하게 구조 요청을 하는 녹음파일을 배심원단에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평생 감옥에 갇힐 수 있었다. 그나마도 연행 과정에서 경찰 폭력에 희생되지 않은 경우다. 영상 덕분에 체포를 면한 쿠퍼는 아주 운이 좋았다. 하지만 같은 날 다른 곳에서 경찰과 마주친 또 다른 흑인 남성의 운명은 그와 정반대였다.

5월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한 편의점 앞에서 경찰과 마주친 조지 플로이드는 불행하게도 뉴욕 센트럴파크의 쿠퍼만큼 운이 좋지 않았다. 지켜보던 시민들이 그만하라고 항의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8분46초 동안 목을 무릎으로 짓누른 백인 경찰 데릭 쇼빈과 동료 경찰관들의 손에 그는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날 이후 미국은 잔혹한 ‘인종 린치’ 모습을 생생히 목격한 사람들의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다.

테런스 리드 주니어가 6월9일(현지시각)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5월25일 백인 경찰에게 목이 눌려 숨진 조지 플로이드의 유해를 운구하는 마차에 앉아 오른팔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테런스 리드 주니어가 6월9일(현지시각)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5월25일 백인 경찰에게 목이 눌려 숨진 조지 플로이드의 유해를 운구하는 마차에 앉아 오른팔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인구 13% 흑인이 코로나19 사망자의 23% 차지

지금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건 언제 집행될지 모르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다. 당장 코로나19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건 바로 흑인이다. 5월20일까지 나온 피해자 집계를 보면,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흑인이 전체 코로나19 사망자의 23%를 차지한다. 흑인 사망자는 이미 2만 명을 넘었다. 인구 10만 명당 코로나19 사망자 수를 보면, 흑인이 50.3명으로 백인(20.7명), 히스패닉(22.9명), 아시아계(22.7명) 등 다른 인종보다 월등히 많다.

지역에 따라 상황이 더 안 좋은 곳도 많다. 예를 들어 캔자스주의 코로나19 흑인 사망률은 백인보다 무려 7배나 높다. 남부 루이지애나주에선 흑인이 전체 인구의 32%지만, 사망자 수는 무려 70%를 차지한다. 뉴욕시의 경우 흑인과 히스패닉이 많이 거주하는 퀸스와 브롱크스 지역의 코로나19 사망률은 백인 거주 지역보다 적어도 2배 이상 높다. 뉴욕시에서 전체 사망자가 가장 많은 10개 지역 중 8곳이 흑인과 히스패닉 주민 거주 지역이다.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계층도 가난한 흑인들이다. 실업률도 흑인이 전체 평균의 거의 두 배에 이른다.

설상가상 코로나19 세계적 유행으로 사회 전체가 잠시 멈춘 상황에서도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고질적인 폭력과 과잉 단속은 멈추지 않는다. 예컨대, 뉴욕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찰에 단속된 사람 대부분은 흑인과 히스패닉이다. 브루클린 검찰청에 따르면 3월17일~5월4일 사회적 거리 두기 위반 혐의로 체포된 40명 중 35명이 흑인이었다. 흑인이 더 법을 안 지킨다고? 천만에, 공원에 나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지 않고 모인 백인들에게 경찰은 친절하게 마스크를 나눠줬다. 하지만 흑인과 히스패닉이 사는 동네에선 엄중하게 법집행을 했다. 전형적인 ‘인종주의 이중 잣대’다.

흑인에 대한 일상적인 경찰 폭력을 정당화하는 건 바로 ‘흑인은 폭력적이며 잠재적 범죄자’라는 인종적 편견이다. 앞서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백인 여성에게 거짓 신고를 당한 흑인 남성이 단적인 사례다. ‘흑인=잠재적 범죄자’ 도식은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가 표현되는 한 방식이다. 흑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해 경찰과 사법기구를 동원해 사소한 범죄에도 양형을 높여 감옥에 가두고, 출소 뒤에는 범죄 기록이 있다는 이유로 이류시민으로 강등해 흑인민권운동의 승리로 얻어낸 여러 민주적 권리를 제한한다.

이런 사례들은 합법적으로 인종차별과 흑백분리 정책을 가능케 했던 ‘짐 크로’법이 철폐된 뒤 미국이 여전히 ‘인종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방식이다. 대규모 흑인 투옥에 기반한 인종차별 정책을 ‘뉴 짐 크로’(New Jim Crow)라고 부른다. ‘뉴 짐 크로’ 인종차별 정책을 수행하는 데 경찰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일부 경찰이 물을 흐리는 게 아니라 경찰제도 자체가 인종차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경찰, 거리 두기 위반 백인에겐 마스크 주고 흑인은 체포

지금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 철폐 투쟁이 커지는 이유는 단순히 무고한 시민이 경찰 손에 참혹하게 죽은 것에 대한 분노 때문만이 아니다. 흑인들이 일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에 노출돼, 그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한 탓이다.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인 분노가 8분46초 동안 가해진 흑인 린치 살해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면서 한꺼번에 폭발했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본격화한 2013년 이후 지금까지 인종주의 경찰 폭력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큰 주목을 받은 사례가 몇 번 있었다. 주로 대도시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에 비해 2020년의 시위는 미국 전역 구석구석으로 번지고 있다. 인구 1만 명이 채 되지 않는 몬태나주의 농촌부터, 오랫동안 흑인의 부동산 소유가 법적으로 금지됐던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외곽의 전통적인 백인 부촌인 마이어스파크 같은 곳까지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퍼지고 있다. 거리에 나선 시민 상당수는 난생처음 시위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종차별 반대 투쟁이 번지면서 사람들 의식이 변한다는 느낌이 뚜렷하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현재 시위를 지지하고 ‘플로이드의 죽음은 일부 경찰이 아니라 구조적인 인종주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대답한 사람들이 74%에 이른다. 2014년 경찰 총격에 사망한 흑인 청소년 마이클 브라운과 경찰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하면서 “숨을 쉴 수 없다”고 한 에릭 가너 사건 직후 이루어진 여론조사에서 ‘이들의 죽음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고 답한 사람이 46%였던 것과 비교해 무려 28%포인트나 늘어났다. 흑인뿐 아니라 다양한 인종이 시위에 참여하는데, 특히 백인의 지지가 많이 늘어난 것도 눈에 띈다. 2014년 여론조사에선 백인의 60%가 ‘경찰 전체가 아닌 일부 경찰관이 문제’라고 답했다. 이번 여론조사에선 70%의 백인이 ‘플로이드 살해는 일부 경찰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인종주의 문제’라고 답했다.

“흑인 사망은 구조의 문제” 여론 6년 새 28%p 올라

백인들이 시위에 들고나오는 손팻말에 개인적으로 가슴을 울리는 말이 있다. “(백인인) 내가 (흑인인) 당신이 겪는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지하고 함께합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미국의 추한 얼굴을 드러냈다면, 지금 벌어지는 투쟁은 추악한 세상을 바꾸려고 함께 싸우는, 비록 직접 겪지는 않아도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남수경 미국 뉴욕 공익인권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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