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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표를 위해 날아간 1만2천㎞

홍콩 ‘선거혁명’ 동참한 시민들 “끝까지 싸울 것”…
5대 요구사항은 제자리고, 중국 정부 반격도 우려

제1290호
등록 : 2019-12-01 10:37 수정 : 2019-12-0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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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구의원 선거가 실시된 11월24일 오후(현지시각) 홍콩 코즈웨이베이 주민문화센터 투표소 앞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기 위해 길게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2019년 11월24일 일요일 저녁,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한 소냐릉(가명)은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가방에 넣어 온 방독면과 시위 장비들이 혹시 통관 과정에서 발각되지 않을까 걱정돼서다. 만에 하나 잘못돼 홍콩 경찰 당국에 체포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학업을 계속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걱정을 안고 조심스럽게 입국 절차를 마친 그녀는 공항을 빠져나와 곧장 투표장으로 향했다.

“시위대와 함께하는 상상”만 하다가

소냐릉이 이날 투표를 하기 위해 날아온 거리는 1만2천㎞. 대학생인 소냐릉은 보통 겨울방학 때 한 번 홍콩에 오지만, 올해는 달랐다. 6월9일 홍콩에서 강제송환법에 반대하며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뒤 이국땅에서 매일같이 고향 뉴스를 본 그녀는 <한겨레21>과 한 메신저 인터뷰에서 “인터넷과 SNS(사회관계망서비스) 등을 통해 친구들이 시위에 참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위대와 함께하는 상상을 했다. 이따금 어린 학생들이 체포되거나 다치는 뉴스를 보면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조국의 참극을 뉴스로 접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소냐릉은 ‘구의원 선거’에 출마한 범민주 진영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지기 위해 홍콩행 비행기표를 샀다. 한국의 ‘국외부재자 투표’ 같은 제도가 없는 홍콩에선 직접 가는 것 말고는 주권을 행사할 방법이 없었다. 때마침 11월27일부터 12월1일까지 쉬는 미국의 ‘추수감사절’ 연휴 덕에 25일과 26일 이틀만 수업에 나가지 않으면 열흘 가까이 홍콩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이 기간에 민주화 시위에 참가할 계획을 세웠다. 홍콩 현지 언론은 소냐릉처럼 오직 투표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홍콩으로 돌아온 유학생들을 주요 뉴스로 다뤘다.

이전까지 홍콩 구의원 선거는 큰 뉴스가 되지 못했다. 18개 지역으로 나눠 관장하는 홍콩 구의회는 독립적으로 법을 만드는 기관도 아니고, 시 행정과 관련해 정부에 의견을 전달하는 자문조직에 불과하다. 2015년 선거에선 70선거구에서 단일 후보가 출마해 선거 없이 자동 당선됐다. 이들 중 대부분은 ‘친건제파’라는 친정부·친중국 성향의 후보였다. 1999년 당선된 친건제파 후보가 20년 동안 단독 입후보해 자동 선출된 지역도 있다. 우산혁명 직후인 2015년은 47.01%의 저조한 투표율을 기록했지만 홍콩 선거 역사상 최고 투표율이었다. 선거 결과는 431석 중 308석을 차지한 친건제파가 승리를 거뒀다.

이렇게 홍콩 민중의 관심 밖에 있던 구의원 선거였지만 올해는 달랐다. 연초부터 불거진 ‘강제송환법’ 논란으로 6개월 가까이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면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았다. 홍콩 내부에서도 장기간 지속되는 시위를 놓고 입장이 갈렸다. 시민들은 이번 구의원 선거가 홍콩 시민들의 민심을 알아보는 척도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인천대 장정아 교수(중어중국학)는 <한겨레21>과 한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구의원 선거는 시위 과정 중에 열리는 선거일 뿐만 아니라 내년에 열리는 입법회(한국의 국회) 선거, 그리고 2022년 행정장관 선거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다. 입법회 의석 70석 중 총 6석이 구의원 중에 선출되고, 행정수반 선거위원회 1200석 중 117석도 구의원 중에 뽑힌다”고 말했다. 구의원 선거는 여름부터 관심을 끌었다. 이번 선거에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 처음으로 모든 지역구에서 2명 이상 후보가 나왔다.


홍콩 정부에 대한 ‘국민투표’로 치러

홍콩 시내 전역 623곳에 설치된 투표소에는 24일 이른 아침부터 유권자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294만 명이 투표권을 행사해 71.23% 투표율로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데는 소냐릉처럼 외국에서 투표를 위해 귀국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였던 청년층의 참여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분석됐다.

선거 결과는 민주당과 공민당 등 범민주 진영 ‘비건제파’의 압승이었다. 홍콩 현지 언론 <더스탠드뉴스>가 홍콩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식 누리집에 공표한 선거 결과를 정리해 분석한 내용을 보면, 전체 의석수 452석 가운데 388석(86%)을 범민주 진영이 싹쓸이했다. 민주건항협진연맹(민건련) 등 친건제파는 59석(13%)을 얻는 데 그쳤다. <한겨레21>에 인터뷰 기사가 실린 뒤 괴한들에게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었던 지미 샴 홍콩 민간인권전선 의장도 샤틴구 렉위엔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제1280호 “한국 촛불처럼 주말마다 모였다” 참조).

많은 홍콩 시민이 일요일 투표를 마친 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개표방송을 지켜봤다. 11월25일 월요일 오전, 출근을 앞둔 이른 시각 ‘중간 개표 결과 범민주 진영의 압승이 예상된다’는 보도가 나오자 SNS에 기쁨이 담긴 축하 메시지가 곳곳에서 올라왔다.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도 밤새워 개표방송을 봤다는 릴리초우(가명)는 “아주 기쁘다. 과거보다 많은 사람이 투표에 참가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많은 시민이 투표권을 행사하고, 홍콩 전역에서 범민주 진영이 압승할 거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6개월 가까이 이어진 시위에도 시민사회의 요구를 외면한 홍콩 정부와 친중파에 대한 홍콩 시민의 불만을 잘 보여주는 선거 결과다”라고 말했다.

범민주 진영 당선자 388명 중에는 홍콩이공대학 학생대표인 오완리(27)도 있었다. 타이콕추이 노스 지역에 출마한 그는 선거운동을 하면서 점거시위가 계속되는 학교 상황까지 확인해야 했기에 50시간 가까이 잠을 자지 못하고 선거운동에 전념해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구의원 선거에 출마한 홍콩이공대학 학생대표 오완리가 선거 전날인 11월23일 밤늦은 시각까지 타이콕추이 지역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오완리 제공

의석은 86% 얻었으나 득표는 57%에 그쳐

범민주 진영의 승리가 확실시됐던 25일 오전, 당선을 확정지은 구의원 후보들과 일부 시민은 점거시위가 계속되는 홍콩이공대로 행진했다. 행진에 참가했던 오완리 대표는 이렇게 외쳤다. “학생들을 구출하자! (선거를 통해) 경찰권력이 대학교 교정을 짓밟은 것에 대한 시민의 분노를 확인했다.” 그는 <한겨레21>과 한 메신저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번 구의원 선거는 민주화 시위를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던 홍콩 정부와 경찰에 대한 ‘국민투표’ 성격이 짙었다. 승리해서 기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여전히 홍콩이공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이 승리를 위해 시위대가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싸워나가야 한다.” 그의 말은 “피를 표로 갚자”고 외쳤던 시위대의 구호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홍콩 정부는 홍콩이공대에 남아 시위를 계속하는 학생들에게 “빨리 학교를 나오라”면서도 경찰의 포위망을 풀지 않았다. 체포와 기소를 우려한 학생들은 학교를 나오지 않고 버텼다. 12일 동안 경찰과 대치하며 점거시위를 이어갔던 이공대에는 학생 20여 명만이 남았고, 위생과 안전에 대한 우려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홍콩 경찰은 11월28일 “잔류자를 곧바로 체포하지 않고 진료와 치료를 받게 하겠다”는 방침을 학교 쪽에 전달하고 학교에 진입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경찰은 수색해 화염병 등 위험물질을 제거하고, 시위 증거를 채집한 뒤 이공대 봉쇄를 풀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의원 선거에서 이긴 것은 기쁘지만 아직까지 ‘5대 요구사항’ 중 하나도 제대로 이뤄진 것이 없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지난 6월부터 홍콩 시위 맨 앞줄에서 무력시위에 참가한 로라양(가명)은 구의원 선거 승리와 홍콩이공대 점거시위 종료에도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녀는 <한겨레21>과 전자우편 인터뷰를 했다. “구의원 선거 승리는 우리 시위대의 승리와 연결지을 수 없다. 홍콩 행정장관을 시민이 직접 뽑지 않는 현 정치체제에서는 투표로 홍콩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시위를 중단하면 체포된 동료들과 후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다섯 가지 요구사항(송환법 완전 철회, 경찰의 강경 진압에 관한 독립적 조사,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된 시위대의 조건 없는 석방과 불기소, 행정장관 직선제)이 모두 관철될 때까지 시위에 나설 것이다.”

구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음에도 홍콩 민주 진영에선 “만족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컸다. 의석수로는 388석 대 59석으로 크게 앞섰지만, 득표수로는 167만3834표(57%) 대 120만6645표(41%)로 16%포인트 차이에 그쳤다. 지지율로는 2016년 입법회 선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여전히 폭력시위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홍콩 시민이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홍콩 시위를 이끄는 재야 시민사회단체 민간인권전선 쪽은 “12월8일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를 열 계획”이라 밝혔고, 지미 샴 의장은 구의원으로 당선된 뒤 “캐리 람 행정장관은 민의를 수용해 5대 요구를 즉각 수용하라”고 촉구했다.

일부에선 구의원 선거에서 범민주 진영이 승리하면서 홍콩 민주화 세력에 대한 중국 공산당 정부의 견제가 더욱 심화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홍콩 출신 유학생 미쉘(가명)은 <한겨레21>에 “언론에선 중국 정부가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와 당황한 것처럼 보도했지만 중국 정부는 다 예상했고, 이미 모든 걸 염두에 두고 홍콩 내 친중 여론을 확장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모른다”며 경계심을 나타냈다.

중국 정부가 비상대응센터 세웠다는 보도도

또 다른 유학생 제이슨리(가명)는 “중국 정부가 홍콩과 인접한 선전에 비상대응센터를 세우고 견제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만약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중국 정부가 개입한다면 홍콩 시위대의 더 큰 반발을 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홍콩 구의원 선거라는 반환점을 지나고도 6개월 가까이 이어진 홍콩의 시위 상황은 사그라질 줄 모르고 있다. “11월27일(현지시각)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홍콩 인권법) 서명 발표를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오늘은 홍콩 시내 교통방해 집회에 참가하고 밤에는 다이푸 지역에서 열리는 시위에 참가할 계획이다. 일요일엔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돌아가서도 홍콩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구의원 선거를 위해 미국에서 홍콩까지 온 소냐릉이 말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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