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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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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무원 매혈기’

셧다운 4주차 넘어서…

모금 전문 사이트에서 생계비 모금하는 공무원 늘어나
등록 2019-01-19 08:07 수정 2020-05-02 19:29
지난 1월14일 미국 백악관 만찬회는 햄버거와 배달음식으로 이루어졌다. 연방정부 셧다운(일시 업무 정지)으로 요리사들이 무급 휴가를 떠났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지난 1월14일 미국 백악관 만찬회는 햄버거와 배달음식으로 이루어졌다. 연방정부 셧다운(일시 업무 정지)으로 요리사들이 무급 휴가를 떠났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21일 시작된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 정지) 사태가 무한정 길어지고 있다. 이미 역대 최장기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럼에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버티고 있다. 그사이 줄잡아 80만 명에 이르는 연방 공무원이 임금을 받지 못해 생계 불안으로 내몰리고 있다.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는 미국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만화경이다.

42만 명 무급, 38만 명 무급 휴직

미국에서 연방정부 셧다운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예산권을 장악한 하원과 백악관이 특정 정책을 둘러싸고 이견이 있을 때마다, 심심찮게 셧다운이 벌어졌다. 특히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공화당이 다수인 하원을 만났을 때 셧다운 기간이 길어졌다. 역대 최장기를 기록했던 1995~96년에도 민주당 출신 빌 클린턴 대통령의 의료보험 개혁에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맞서면서 21일 동안 셧다운 사태가 벌어진 바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3년에도 16일 동안 셧다운이 이어졌다.

1월17일 현재 27일째인 이번 셧다운은 여러모로 이전과 다른 특징을 보인다.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과 맞서는 모양새부터 그렇다. 직접적 원인은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이에 필요한 예산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57억달러(약 6조4천억원)를 편성해달라고 요청했다. 민주당 쪽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결국 예산안이 제때 통과되지 않으면서, 국토안보부·상무부·법무부 등 8개 부처와 연방수사국·국경수비대·교통안전청·항공우주국 등 외청이 줄줄이 타격받게 됐다. 등 미국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지난해 12월22일 0시 시작으로 미 연방정부 각급 기관의 25%가 셧다운됐다. 이에 따라 ‘필수인력’으로 지정된 공무원 42만 명이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으며, 38만 명은 무급 휴직 상태로 내몰렸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쉽게 끝나기 어려운 구조란 점이다. 셧다운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에 따른 정치적 파급도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처지에선 민주당과 타협했을 때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아 보인다. 여기서 밀리면 2020년 재선은 물론 당장 남은 임기 동안 ‘레임덕’(지도력 공백)이 될 가능성마저 거론되는 상황이다. 국경 장벽 설치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실상 ‘1번 공약’이다.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다. 어렵사리 하원을 탈환하고도 ‘역대급’ 예산 낭비 사례가 될 게 뻔한 국경 장벽 설치를 막지 못한다면 여론의 역풍이 불 수 있다. 향후 이어질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이민 제한 조처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 2020년 대선에서 백악관 탈환을 원한다면, 밀려서는 안 되는 싸움이란 뜻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는 지난 1월10일치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미국 남부 국경을 넘어 불법 입국하는 사람은 지난 45년 동안 꾸준히 감소해왔다. 대신 입국사증(비자)을 발급받아 항공기를 이용해 합법적으로 미국에 들어온 뒤, 허가 기간을 넘기고도 미국에 머물고 있는 불법체류자가 크게 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말 불법 이민을 막고 싶다면, 후자 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 전체 예산에서 57억달러는 결코 큰돈이 아니다. 미 연방정부는 12시간마다 57억달러의 예산을 쓴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전에도 멕시코 국경지대에 다양한 형태의 장벽과 철조망이 설치됐다. 민주당의 지지 속에 말이다.”

과반수 “이번 사태는 트럼프에게 책임 있어”
미국 민주당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가운데)이 ‘장벽 협상’을 마친 뒤 건물 밖으로 나오고 있다. 민주당이 미국~멕시코 국경지대 장벽 설치에 예산 편성을 반대한 뒤, 각급 기관의 25%가 셧다운됐다. 연합뉴스

미국 민주당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가운데)이 ‘장벽 협상’을 마친 뒤 건물 밖으로 나오고 있다. 민주당이 미국~멕시코 국경지대 장벽 설치에 예산 편성을 반대한 뒤, 각급 기관의 25%가 셧다운됐다. 연합뉴스

는 대립의 실제 원인이 장벽 건설이란 단일 사안이었다면, 민주당과 백악관의 협상은 어렵잖게 이뤄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짚었다. 민주당 쪽은 그동안 어린 시절에 불법 입국해 성장한 약 70만 명의 불법체류자에게 미국 시민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장벽 건설 예산을 내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실제 지난해에도 민주당 지도부가 같은 제안을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합법 이민도 축소하겠다”며 단칼에 거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셧다운을 앞둔 지난해 12월 “국경 안전을 위해 정부가 셧다운된다면 이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도 말했다.

셧다운 발생 이후 여론의 향방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 퀴니피액대학 조사팀이 1월9~13일 실시해 내놓은 최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6%가 “이번 사태의 책임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다”고 답했다. 민주당을 손가락질한 응답자는 36%에 그쳤다. 미국의 일간지 와 《ABC》 방송이 1월8~11일 한 여론조사에서도 “트럼프 대통령 책임”(53%)이란 응답이 “민주당 책임”(29%)이란 응답보다 높았다.

민주당 쪽도, 트럼프 대통령도 아직 쓰지 않은 ‘카드’가 있기는 하다. 미 의회는 3분의 2의 찬성으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률이나 예산안을 무력화할 수 있다. 미 대통령은 비상조치권을 발동해 의회를 무력화할 수 있다. 워싱턴 정가가 그야말로 극한 대결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인데, 아직까진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이번 셧다운 사태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어 보이는 이유다. 연방 공무원 80만 명의 ‘불안한 생계’도 마찬가지다.

“안녕하세요. 저는 닐라라고 합니다. 현재 주당 40시간을 일하지만, (셧다운 탓에)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구서는 쌓여가는데, 언제 다시 임금을 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줄 가족도, 친구도 없습니다. 10개월 된 아들과 8살 아들이 있는데, 아이들을 먹이고 보살펴야 합니다.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가스·전기요금과 수도요금도 내야 합니다. 자동차 할부금과 보험료도 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출퇴근할 때 차에 기름은 또 어떻게 넣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한 번도 남한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지만, 이게 제 유일한 대안입니다. 조금이라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의 은총이 있기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사는 닐라 클레클리는 1월6일 모금 전문 사이트 ‘고 펀드 미’(Go Fund Me)에 생활비 3500달러 모금을 목표로 이런 글을 올렸다. 연방 공무원인 그의 호소에 9일 동안 모두 35명이 1345달러를 내놓았다. 닐라뿐이 아니다. 영국 일간지 은 1월10일치에서 “셧다운 사태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연방 공무원 1천여 명이 ‘고 펀드 미’ 사이트를 통해 생계비 마련에 나섰다”며 “이 사이트가 일시적인 사회안전망 구실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 연방정부 인사관리처(OPM)의 자료를 보면, 연방 공무원은 80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2주에 한 차례 이른바 ‘페이체크’(급여수표)를 받는다. 셧다운 사태가 4주차를 넘어서고 있으니, 80만 명이 두 차례 연속 임금을 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파장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2017년 78%가 ‘페이체크 투 페이체크’였는데

미국 최대 취업정보 사이트 ‘커리어빌더’가 2017년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78%가 이른바 “페이체크 투 페이체크”(이번 임금을 받아 다음 임금을 받을 때까지 근근이 버틴다는 뜻)라고 답했다. 응답자의 70%는 “어떤 형태로든 갚아야 할 대출금이 있다”고 했고, “한 달에 100달러(약 11만원)도 저축하지 못한다”고 한 응답자도 전체의 50%를 넘어섰다. 비슷한 시기 개인금융 서비스 업체 ‘고 뱅킹 레이츠’가 내놓은 조사 결과를 보면, “6개월 정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비상자금이 없다”고 한 응답자가 61%에 이르렀다.

미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는 2013년 이후 해마다 5월께 ‘미국 가정의 경제적 웰빙 보고서’를 펴내고 있다. 이 가운데 흥미를 끄는 항목이 ‘예상치 못한 비용 대처법’이다. 차량이나 가전제품 수리비 등 ‘예상치 못한 지출을 해야 할 때 쓸 수 있는 돈 400달러(약 45만원)를 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대표적이다. 연준이 지난해 펴낸 2017년판 보고서를 보면, 응답자의 59%가 “현금이나 저축 등을 활용해 400달러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2013년판 보고서에선 같은 질문에 “가능하다”고 답한 이가 전체의 50%에 그쳤다.

“긴급 자금 400달러를 쉽게 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답한 41%의 사람 가운데는 신용카드 사용(43%), 가족·친구에게 빌림(26%), 소유물 처분(19%), 단기대출(9%) 등으로 마련할 수 있다는 답변도 포함됐다. 하지만 41%에 속한 이들 가운데 29%는 “당장 400달러를 마련할 방법이 없다”고 답했다. 셧다운 사태 이후 연방 공무원들이 대거 ‘고 펀드 미’ 사이트를 찾은 이유다.

“집세 1700달러, 학자금 대출 상환금 1100달러, 신용카드 1천달러, 기름·전기요금 100달러, 식료품 100달러….”

캘리포니아주 데이비스에 사는 지질조사국 소속 스콧 존스가 1월14일 ‘고 펀드 미’에 올린 생활비 명세다. 2월 셋째 아이 출산을 앞둔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이 웃고 있는 가족사진을 공개한 존스는 “지질조사국에 일자리를 구해 6개월 전 루이지애나주에서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하면서 예금해둔 비상금을 모두 썼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4천달러 모금을 목표로 한 그는 단 하루 만에 96명한테서 8860달러를 지원받았다.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17살, 6살, 4살 자녀를 홀로 키우는 연방 공무원 조 앤 구들로 역시 1월9일 모금 채널 개설 6일 만에 248명한테서 목표액 5천달러를 훌쩍 넘은 1만4918달러를 모았다. 그는 지원을 호소하는 글에서 “(셧다운 이전에도 생계가 어려워) 일주일에 두 차례씩 돈을 받고 혈장 헌혈을 해 부족한 생활비를 메워왔다”고 밝혔다.

‘우리가 장벽을 건설한다’ 캠페인은…

모두가 이들처럼 운이 좋은 건 아니다. 1월16일 오후 현재 ‘고 펀드 미’ 사이트에서 ‘연방 공무원’을 열쇳말로 검색해 나온 1815개의 모금 캠페인 절대다수는 100~500달러 수준을 지원받는 데 그쳤다. 정작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은 따로 있다. 상이군인 출신 브라이언 콜파지가 10억달러를 목표액으로 지난해 12월16일 개설한 ‘우리가 장벽을 건설한다’는 모금 캠페인은 한 달 만에 34만4811명이 참여해 모두 2056만6478달러(약 231억27만원)를 모았다. 해당 누리집에는 장벽을 배경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진이 내걸려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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