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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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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째 제자리 북–미 관계 누구 탓인가

핵시설 신고부터 하라며 북한에 사실상 ‘항복’ 요구하는 미국
등록 2018-12-08 02:15 수정 2020-05-02 19:29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이 지난 10월7일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나란히 걸으며 환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이 지난 10월7일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나란히 걸으며 환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북한과 미국이 좀처럼 협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정 조정’을 이유로 예정일(11월8일) 하루 전 전격 미뤄졌던 북-미 고위급회담은 한 달이 지나도록 기약이 없다. 미국 쪽에선 북한이 ‘나쁜 행동’을 지속하고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온다. 북한은 침묵 속에 불편한 심기만 내비치고 있다. 기적처럼 전쟁 위기를 걷어내고, 평화의 기운이 완연했던 2018년이 저물고 있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6월 북-미 정상회담 뒤 멈췄다

“북한은 지금까지 (제1차 북-미 정상회담 때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더 생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2월4일 미국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 2차 정상회담의 명분이 될 수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2차 정상회담에선 더 구체적이고 분명한 비핵화 방안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기대감의 표시일까? 볼턴 보좌관은 “두 정상은 싱가포르 회담에서 이뤄낸 합의 사항의 이행 과정을 논의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며 “그때까지 경제제재 유예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간의 태도에서,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사상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등에 합의했다. 무엇보다 북한에 대한 체제안전 보장과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서로의 의지를 두 정상이 직접 확인했다. 두 정상 모두 ‘상호 신뢰’가 핵심이란 점을 인정한 것이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그새 6개월여가 흘렀다.

‘신뢰’의 핵심으로, 북한은 ‘종전선언’을 제시했다. 미국은 ‘핵 관련 시설에 대한 전면적이고 완전한 신고’가 먼저라고 맞받았다. 북한은 전쟁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핵시설 신고는 공격 목표물 목록을 넘겨달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반발했다. 대북 제재 역시 마찬가지다. 북쪽은 ‘새로운 관계’의 증표를 원했지만, 미국은 이를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보상’으로 여기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거기 그대로 멈춰서 있다. 볼턴 보좌관은 이렇게 말했다.

“북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싱가포르에서 약속한 바를 북한이 이행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도 받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위해 문을 활짝 열었다. 그 문으로 북한이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 2차 정상회담에서 그런 진전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한다.”

주고받아야 협상이다. 거기서 믿음이 생긴다. 믿음이 있어야, 더 큰 걸 주고받을 수 있다. 협상의 들머리에서 북한과 미국이 머뭇거리는 이유는 뭔가? 아직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한다.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협상을 통해 맞바꾸기로 합의한 두 가지가, 협상의 시작을 가로막고 있다는 뜻이다. 관성은 힘이 세다.

신고하면 공격 목표물 될까 우려하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정말 핵무기를 포기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내 대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는 거다. 아마 김 위원장 자신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제는 북한이 정말 핵을 포기할지 아닌지를 확인해볼 때가 됐다.”

세계적인 핵물리학자이자 북핵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학 명예교수는 11월28일 미국의 한반도 전문매체 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특히 그는 “협상에 앞서 기존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전면적인 신고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헤커 박사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지금 같은 협상의 초기 단계에서, 기존 핵 프로그램에 대한 신고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이 신고·검증 문제를 앞세우는 건, 협상을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가는 행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것처럼 관계 정상화로 가는 조처를 밟지 않고 ‘최대의 압박’ 정책을 지속해나간다면 더욱 그렇다.”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전면적인 신고란 뭔가? 북한에 핵무기와 핵물질, 핵시설 목록을 미국 쪽에 넘기라는 얘기다. 미국은 ‘비핵화 의지의 증표’라고 주장한다. ‘적대시 정책’을 우려하는 북쪽은 전혀 달리 보고 있다. 협상이 결렬되면, 넘겨준 목록은 고스란히 미군의 공격 목표물이 될 수 있다는 북한의 주장은 억측이 아니다. 북한이 ‘핵 신고’를 사실상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헤커 박사의 지적이다.

“신고는 검증을 전제로 한다. 검증을 위해선 사찰단이 북한 핵시설에 접근해야 한다. 과거 핵활동 전반에 대한 강력한 검증 절차가 진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이용될 수 있는 핵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사찰단이 보장해야 한다. 크고 작은 논란 속에, 오랜 기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그러니 협상에 앞서 모든 핵무기와 핵물질, 핵 관련 시설을 신고하고, 그 위치를 공개하고, 사찰단의 검증을 받고, 이를 해체하는 작업을 수행하라고 북한에 요구하는 건 말이 안 된다.”

핵물질, 무기화 과정, 운반 수단

따져보자. 북한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은 서로 연결된 세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핵무기의 연료가 되는 핵물질이 있다. 원자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과 고농축 우라늄, 수소폭탄의 연료가 되는 삼중수소 등이 그것이다. 둘째, 핵물질의 무기화 과정이다. 소형화·경량화를 포함한 핵탄두 개량과 성능 확인을 위한 실험이 필요하다. 셋째, 핵무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운반 수단’이다. 항공기나 선박 등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제할 순 없겠지만, 사실상 핵탄두를 장착한 탄도미사일을 뜻한다.

미국이 말하는 ‘핵 신고’는 이 세 요소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사전에 공개하라는 주장이다. 북한 전역의 수십 곳에 흩어진, 건물 수백 동에서 일하는, 핵 관련 인력 수천 명이 그 대상에 포함될 게다. 이를 검증하는 건 또 어떤가? 세 요소 가운데 핵물질, 그중에서도 플루토늄만 따져봐도, 얼마나 복잡하고 논란이 많은 작업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은 우라늄을 원료로 하는 원자로를 가동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다. 북한이 보유한 플루토늄 대부분은 영변 핵시설에 있는 5메가와트(MW)급 원자로를 통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완전한 핵 신고’를 위해선, 이 원자로의 구성과 작동 특성을 포함해 1986년 첫 가동 이후 지금까지 플루토늄 생산량 등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정확하게 제시해야 함을 뜻한다.

5메가와트급 원자로에 대한 검증은 원전의 원료가 되는 우라늄 원광 채굴 과정부터 시작해야 한다. 원광을 가공해 원자로의 원료인 우라늄 산화물로 전환시키고, 원자로를 가동하고, 사용후 핵연료봉을 재처리해 플루토늄이 생산되는 과정도 샅샅이 훑어봐야 한다. 영변 핵시설에 자리한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방사화학실험실)은 1990년대 가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설의 가동 내용도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재처리를 통해 분리된 플루토늄은 정제 과정을 거쳐야 ‘무기급’이 된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부산물’도 신고·검증 대상이다.

영변 핵시설엔 1967년부터 가동 중인 소련이 공급한 연구용 원자로(IRT-2000)도 있다. 이 원자로에서도 소량의 플루토늄이 생산됐을 수 있다. 북한은 연구용 경수로(ELWR)도 건설했다. 아직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 역시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용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는지 검증을 거쳐야 한다. 1994년 스위스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에 따라 건설을 중단한 50메가와트, 200메가와트 원자로도 마찬가지다. 이게 끝이 아니다.

북한은 그동안 6차례 지하 핵실험을 실시했다. 이때 사용된 플루토늄이 얼마나 되는지도 신고해야 한다. 북한은 지하 핵실험과 별개로 핵폭발 직전 단계인 ‘임계점 이하’ 핵실험도 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임계점 이하 실험에 사용된 플루토늄은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철저한 검증 대상이다.

핵 신고는 협상 전제가 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월30일 오후(현지시각)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1월30일 오후(현지시각)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이 있다. 이를테면 그간 생산한 플루토늄과 핵실험 과정에서 이미 사용한 플루토늄의 양을 따져보면, 남은 무기급 플루토늄의 양을 가늠할 수 있다. 생산량과 사용량, 사용하고 남은 양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거짓 신고’ 논란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실제 사용량을 정확히 추산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이 이미 폐쇄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북핵 프로그램 가운데 극히 일부인 ‘플루토늄’과 관련된 내용만 해도, 신고 목록은 한없이 늘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북한의 ‘사전 핵 신고’가 되레 협상판을 뒤엎는 전례도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 2기가 끝나갈 무렵인 2007~2008년에도 북한과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에 집중한 바 있다. 그때도 신고와 검증이 핵심이었다. 당시 북한은 약 1만8천 쪽에 이르는 영변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의 가동 내용을 담은 방대한 문서를 미국 쪽에 전달했다. 하지만 이 문서에 대한 검증 작업은 이뤄지지 못했다. 미국 쪽에선 더 많은 신고를 요구했고, 북한은 미국이 ‘골대를 옮겼다’고 비난하면서 협상이 깨진 탓이다. 그 뒤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북한의 핵능력이 한층 고도화했고, 검증의 난이도 역시 훨씬 높아졌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부터, 트럼프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핵 문제에 대해 ‘엄청난 성공’을 말해왔다. 하지만 워싱턴에 있는 한반도 전문가들의 평가는 전혀 다르다. 한편에선 북한의 비핵화 의지 자체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다른 편에선 트럼프 행정부 대북정책의 실패를 입증하려는 억측만 난무하고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잇따라 터져나오는 ‘북한의 특이 동향’에 대한 부풀린 보도는 이런 미국 정치권 안팎의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미 1990년대 말부터 언론에 공개된 지역임에도, 마치 새로운 사실인 것처럼 미국 방송 《CNN》이 12월5일 보도한 ‘북한 영저동 미사일 기지 확장설’이 대표적이다.

‘제재’는 갈등의 산물이다. ‘새로운 관계’는 갈등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최대의 압박’을 고수하는 미국을 향해 북한이 “제재와 관계 개선은 양립 불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핵화란 종착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거쳐가야 할 ‘인내의 정거장’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 정거장마다 멈추고 망설인다면, 목적지에 가닿는 시간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기억해야 한다. 핵실험장 폐쇄 등 북한의 선제적 조처에 대한 미국의 상응 조처는 ‘보상’이 아니다.

그러니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핵 프로그램 사전 신고’는 협상의 전제가 될 수 없다. ‘새로운 관계’와 ‘비핵화’란 협상의 목표는 분명하다.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은 협상을 통해서만 이끌어낼 수 있다. 북한은 핵 위협을 없애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고, 미국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야, 미래의 기억을 만들 수 있다.

주고받는 것이 협상

구체적인 전제 조건을 공개하진 않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의 상응 조처에 따라 영변 핵시설을 폐쇄할 수 있다는 점을 지난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에게 밝혔다. 영변 핵시설이 북한 핵개발 프로그램의 심장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의미심장한 제안으로 평가할 만하다. 미국의 북-미 관계 정상화 노력과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쇄가 맞물린다면, 한반도 평화로 통하는 신뢰의 문을 열 수 있다. 일방적으로 문을 열고, 상대방에게 들어오라고 강요하는 건 ‘거래의 기술’이 될 수 없다. 함께 문을 열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협상이 가능해진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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