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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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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뿌린 씨앗 국경 앞에 도착했다

수천 명의 중남미 이주자 행렬 ‘카라반’ 4350㎞ 이동 끝 미국 국경 도착

군부독재·부패·가난·범죄·국토 난개발 피한 여정… 트럼프에겐 정치적 호재
등록 2018-12-01 06:54 수정 2020-05-02 19:29
지난 11월25일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 북부 티후아나에서 최루탄이 터지자, 카라반에 참여했던 온두라스 여성이 5살 쌍둥이 딸의 손을 잡고 황급히 피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지난 11월25일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 북부 티후아나에서 최루탄이 터지자, 카라반에 참여했던 온두라스 여성이 5살 쌍둥이 딸의 손을 잡고 황급히 피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국경을 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혼자가 아니어서 좋았다. 숨을 필요도 없었다. 갈수록 행렬이 늘었다. 더러는 뒤처졌고, 더러는 차를 얻어타는 행운을 누렸다. 꼭 한 달, 장장 4350㎞에 이르는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미국 국경에 다가섰다. ‘카라반’, 그들은 누구인가?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를 떠난 사람들
10월27일 카라반 행렬이 멕시코 남부 산페드로타파나테펙을 지나고 있다. AFP 연합뉴스

10월27일 카라반 행렬이 멕시코 남부 산페드로타파나테펙을 지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카라반 행렬을 초기부터 따라붙은 《AP》통신의 보도를 종합하면, 모든 것은 2018년 10월13일 시작됐다. 이날 온두라스 북서부 산페드로술라에서 160여 명이 긴 여정의 첫발을 뗐다. 미국 국무부에 딸린 해외안전자문위원회(OSAC)가 지난 3월 내놓은 ‘2018 온두라스 범죄·안전’ 보고서를 보면, 온두라스는 여행 경보 3단계 ‘여행 재고’ 지역이다. 웬만하면 가지 말라는 뜻이다. 이 보고서에는 산페드로술라에 대한 언급이 여덟 차례 등장한다. 내용은 좋지 않다.

“산페드로술라 지역에선 공항에서 시내 호텔로 가는 관광객의 차량을 노린 무장강도 사건이 빈번하다. …현지 미 대사관 쪽은 2010년 이후 이곳에서만 미국인 52명이 살해됐다고 보고했다. …수도 테구시갈파와 산페드로술라 등 온두라스 대도시 대부분에서 살인 등 강력범죄 발생률이 전국 평균치보다 훨씬 높다.”

산페드로술라를 출발한 일행은 이틀간 120㎞를 걸었다. 인파는 이미 1천 명을 넘어섰다. 《AP》통신은 10월15일 “과테말라 국경 지역에 온두라스인 약 1600명이 몰려들었다”고 전했다. 언론에서 ‘카라반’이란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카라반을 세상에 알린 것은 과테말라 언론인 출신 좌파 정치인 바르톨로 푸엔테스와 그의 부인인 인권운동가 두니아 몬토야였다.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 온두라스 대통령은 푸엔테스가 정부를 욕보이고 불안정을 조장하기 위해 카라반 행렬을 조직했다고 맹비난했다.

푸엔테스는 《CNN》 방송 등과 한 인터뷰에서 “1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도록 조종하는 게 가능한 일이냐”며 “에르난데스 대통령 치하의 온두라스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태”라고 반박했다.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등 중앙아메리카 북부 3개국 출신 이주민은 지난 10여 년 새 급증했다. 줄을 잇는 폭력 사태와 치안 불안, 극단의 빈곤이 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정치적 격변기를 지나온 온두라스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 배후에 미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과테말라·엘살바도르와 마찬가지로 온두라스와 미국의 본격적인 ‘인연’은 19세기 말~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온두라스 북부 카리브해 연안 일대를 무대로 유나이티드프루트를 비롯한 미국 농업자본이 대거 진출했다. 이들은 급증하는 수요에 발맞춰 대규모 바나나 농장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철도와 도로가 건설됐고, 미국계 은행이 들어섰다. 정치권은 뇌물로 흥청거렸다. 바나나와 커피 등 몇몇 농산물에 온두라스 경제가 온통 의존하는 형국에 이르렀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정치·군사적으로 적극 개입했다. 이른바 ‘바나나 공화국’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미국의 정치·군사 개입이 부른 결과

‘바나나 공화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집단은 군부였다. 미국은 오랜 기간 이들의 든든한 배후였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미국은 그 절정기였다. 온두라스와 이웃한 니카라과에 들어선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를 뒤엎고, 중남미 일대 좌파 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두라스에 미군 병력이 ‘일시적으로’ 배치됐다.

니카라과의 우파 콘트라 반군은 온두라스에서 미군의 훈련을 받았다. 온두라스 군부에 대규모 지원도 이어졌다. 두 나라 군대가 함께 사용하는 합동 기지가 늘어났다. 군부독재의 정치적 탄압도 가중됐다. 온두라스를 탈출해 미국으로 향하는 행렬이 늘기 시작했다.

2005년 11월 대선에서 개혁 성향의 호세 마누엘 셀라야가 당선되면서, 온두라스에도 변화의 바람이 부는 듯했다. 성공한 사업가 출신인 셀라야 대통령은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당 소속이었다. 그러나 셀라야 대통령은 집권 이후,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무상교육과 영세 농민 보조금 제도가 도입됐다. 최저임금을 80%까지 올리는 등 개혁 조치가 잇따랐다. 중남미 최빈국으로 꼽히던 온두라스의 빈곤율이 10%포인트 떨어졌다. 이어 집권 3년차인 2008년 들어선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주도하던 중남미 좌파 연대체 ‘볼리바르 대안 연대’(ALBA)에 적극 가담했다. 안팎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2009년 6월28일 기어이 일이 터졌다. 군부 쿠데타였다. 쿠데타군은 민주적인 선거로 집권한 셀라야 대통령을 파자마 바람으로 납치했다. 미주기구(OAS)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한목소리로 온두라스 군부를 비난했지만, 미국만은 예외였다. 미국은 쿠데타를 쿠데타라 이르지 않았다. 쿠데타가 일어난 나라에는 일체의 대외 원조를 중단해야 하는 미 국내법 때문이었다.

‘순교자로 만들지 않겠다’는 군부의 방침에 따라 셀라야 대통령은 코스타리카로 강제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은 군부가 사실상 지명한 로베르토 미첼레티 임시 대통령과 정국 안정화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미 국무장관은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이어진 정치적 혼란 속에 미국으로 향하는 온두라스인 행렬이 더욱 늘었다.

쿠데타 이후 온두라스는 빠르게 ‘정상’을 되찾아갔다. 2010년 대선에서 보수 국민당 소속 포르피리오 로보가 당선됐다. 외자 유치를 명분으로 환경 파괴 우려가 큰 초대형 개발 프로젝트가 잇따라 추진됐다. 온두라스 국토의 30% 가까이가 각종 건설이나 광물 개발사업 터로 지정됐을 정도다. 막대한 개발사업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당하기 위해 국토 전역에서 수백 건의 크고 작은 댐 건설 공사가 시작됐다.

개발은 이어졌다. 2013년 대선에서도 국민당은 무난히 재집권에 성공했다. 에르난데스 대통령은 앞선 정부의 노선을 이어갔다. 2009년 쿠데타 이후 사실상 정부 기능이 마비된 농촌을 중심으로 조직범죄가 더욱 활개를 치고 있었다. 미국으로 향하는 코카인 규모가 급격히 늘었다. 미국은 ‘마약과의 전쟁’을 명분으로 온두라스에 원조를 늘렸다. 정부의 부패가 심해질수록 범죄 조직의 폭력도 더욱 거침없어졌다. 온두라스를 떠나는 인파가 더욱 늘었다.

마약 조직에 붙잡히거나 인신매매당하기도

대통령 단임제가 헌법에 명시돼 있음에도, 에르난데스 대통령은 사법부의 ‘판단’을 앞세워 연임 출마를 강행했다. 그는 2017년 12월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다. 불법과 폭력이 난무한 선거였다. 조직범죄와 마약상, 경찰은 폭력의 세 기둥이었다. 정치적 목적으로 벌이는 살인 사건이 만연해진 건 이미 오래다. ‘온두라스 원주민회의’(COPINH) 창립자이자 ‘그린 노벨상’이라는 골드만 환경상 수상자인 세계적 환경운동가 베르타 카세레스가 2016년 3월3일 새벽 자기 집에서 괴한의 총탄에 맞아 숨진 게 대표적이다.

카라반이 국경에 도착한 지난 10월15일 과테말라 정부는 국경 검문소를 폐쇄했다. 긴 시간을 대치한 끝에 길이 열렸다. 과테말라를 관통해 멕시코 국경으로 향하는 새, 카라반의 수는 더욱 불어났다. 《AP》 통신은 10월19일 “멕시코 국경에 도착한 카라반 행렬이 3천여 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멕시코 정부는 시위 진압 경찰을 배치해 과테말라와 국경을 잇는 다리를 막아섰다. 세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멕시코 정부는 곧 공식 입국 절차를 개시했지만, 국경 다리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 상당수가 헤엄쳐 국경을 넘었다. 10월22일 카라반 행렬이 본격적인 북상을 재개했다. 당시 유엔 쪽은 이들이 7322명에 이른다고 추산했지만, 멕시코 정부는 10월24일 성명을 내어 “3630명 정도가 미국 국경이 있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밝혔다.

카라반은 다양한 이들의 연대체다. 범죄 조직의 살해 위협을 피해 떠나온 이들도 있다. 극단의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선 이들도 있다. 더러는 과거에 밀입국해 미국에서 새 삶을 꾸리다 단속에 걸려 추방됐던 이들도 있다. 그런데도 이들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이유는 뭘까?

멕시코 역시 치안이 불안한 나라다. 현지 마약 조직은 이민자를 붙잡아 마약 운반책으로 활용하거나, 아예 인신매매도 한다. 조직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멕시코 당국은 이민자 단속을 더욱 강화했다. 길은 멀고 험하다. 혼자 숨어서는 위험에 맞설 수 없다. 무리를 지어, 확연히 눈에 띄는 게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셈이다.

11월13일 첫 번째 카라반 행렬이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 북부 티후아나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제법에 따라 이들은 미국 정부에 망명(난민 지위) 신청을 할 수 있다. 카라반은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행렬이 한꺼번에 미국 쪽으로 몰려 들어올 수는 없을 게다. 미국 쪽 국경으로 가서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망명을 신청할 순 있다. 국경을 몰래 넘어 미국 땅으로 들어온 뒤 국경수비대에 자수하고 망명 신청을 할 수도 있다. 불법 월경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망명 신청은 법적으로 가능하다. 그다음은 미국 정부에 달렸다.

카라반은 범죄자가 아니다

2016년 대선 때부터 ‘불법 이민자가 미국을 점령한다’고 주장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카라반은 ‘상상의 현실화’이자 ‘정치적 호재’였다. 그는 11월6일 중간선거를 앞둔 선거 유세에서 “카라반 떼거리에게 미국이 짓밟히는 걸 원치 않는다면 공화당에 투표하라”고 주장했다. 이미 남쪽 국경 강화를 이유로 5800명의 병력이 배치된 상태였다.

11월25일 티후아나의 카라반 임시 천막촌을 향해 미국 쪽에서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카라반 행렬의 절반을 이루는 여성과 아이들이 가스를 피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11월6일 중간선거에서 최연소 여성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오카시오 코테즈(28)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망명을 요청하는 것, 난민 지위를 신청하는 건 범죄가 아니다. 독일을 탈출했던 유대인에게도, 살해 위협을 피해 탈출했던 르완다인에게도, 전쟁의 포화를 피해 고향을 떠난 시리아인에게도 범죄가 아니었다. 그러니 중앙아메리카에서 폭력 사태를 피해 탈출한 이들에게도 범죄가 될 수 없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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