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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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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쟁취한 혼인권

아시아 처음 동성결혼 합법화 이뤄낸 대만 동성애 운동…

1986년 첫 커밍아웃 뒤 민주화 거쳐 동등한 권리의 민법 개정 앞둬
등록 2017-06-07 06:54 수정 2020-05-02 19:28
동성결혼 합법화는 오랜 싸움의 결과물이다. 2016년 12월10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동성결혼 지지 시위에 참가한 한 성소수자가 ‘대만의 결혼 평등을 지지하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EPA 연합뉴스

동성결혼 합법화는 오랜 싸움의 결과물이다. 2016년 12월10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동성결혼 지지 시위에 참가한 한 성소수자가 ‘대만의 결혼 평등을 지지하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EPA 연합뉴스

5월24일 오후,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선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잡지사 영상 PD 왕셴위(31)는 서둘러 회사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어렵게 열차에 오른 그는 도심의 한 집회 현장으로 향했다. 그날은 대만 시민들에게 기대감과 불안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던 하루였다. 사법원(한국의 대법원)이 동성결혼 합헌 여부에 대한 ‘대법관 심리’를 열어 헌법해석(釋憲) 결과(한국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왕을 포함한 많은 시민들이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방송사 중계를 함께 시청하기 위해 집회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동성애자인 내가 봐도 놀라웠다”

오후 4시, 대법관이 공식적으로 석헌문(釋憲文·헌법해석문)을 낭독했다. “현행 민법은 동일한 성별을 가지고 있는 양자(兩者)가 공동생활을 목적으로 친밀하고 배타적인 영구결합(永久結合) 관계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이는 헌법상 국민의 혼인의 자유권 보장과 국민의 평등권 보장 등의 취지를 위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관 기관이 2년 내에 유관 법률의 수정이나 제정을 완성해야 한다.” 심리에 참여한 대만 대법관 14명 가운데 11명이 동성결혼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판결로 대만은 아시아에서 처음 동성결혼을 허용한 나라가 되었다.

결과가 공개되자 집회 현장에서 방송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왕셴위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초등학교 무렵부터 자신이 ‘남자만 좋아한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현재 왕은 2년째 사귀는 남자친구와 동거하고 있다. 한 달 전 왕과 남자친구는 협의하에 양가 부모에게 자신들이 동성애자라는 것과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고백했다. 뜻밖에 양가 부모는 이 상황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만 대법원의 결정은 그들이 받은 또 하나의 소중한 선물이 됐다. 사법원은 “2년 뒤까지 관련 법규가 수정되거나 새로운 법규가 제정되지 않을 경우 동성애자들이 각 지역 사무소에 직접 방문해 결혼 등록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불과 5년 전부터 ‘타이베이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했다. 당시 일부 시민단체들이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뿌리고 있었다. ‘동성애자도 결혼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 담긴 전단지였다. 동성애자인 내가 봐도 놀라운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왕셴위는 “동성애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조용히 살면 된다. 시민단체들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해달라고 하면 동성애자의 이미지만 나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성결혼 합법화 운동이 대만의 대표적 사회운동으로 자리잡아가면서 왕도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대만은 아시아에서 드물게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국가다. 지난 30년 동안 연예인을 포함해 40명 이상 문화계 인사가 ‘커밍아웃’했다. 동성애 담론은 뉴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폭넓게 다뤄졌다. 2003년에 시작된 타이베이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처음엔 2천 명 정도 참여하는 작은 규모였지만, 2016년엔 8만 명이 함께하는 대만의 대표적 거대 이벤트로 성장했다. 유명 스타와 정치인들이 참여해 동성애자를 응원하면서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왕셴위의 남자친구 려우졔센(34·가명)은 “원래 5~10년은 더 기다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랐다. 대만이 이렇게 앞서나갈 수 있어서 기쁘고 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동성결혼 때문에 대만이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중국과 다른 나라라는 것이 증명됐다”고 말했다.

중국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한다. 이 때문에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고 정상적으로 유엔 등 국제회의나 조직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동성결혼 허용으로 대만이 중화권 유일의 민주주의 국가이며 중국이 실현하지 못한 소수자의 인권과 권익을 보장해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대만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세계에 보여주는 동시에 중국과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대만 동성애 운동 개척자 치자웨이
대만 동성애 운동의 상징과 같은 치자웨이. 1986년 최초로 커밍아웃해 구속됐던 그는 이후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해 법적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양첸하오 제공

대만 동성애 운동의 상징과 같은 치자웨이. 1986년 최초로 커밍아웃해 구속됐던 그는 이후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해 법적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양첸하오 제공

그러나 변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비교적 동성애자 포용성이 높은 대만에서 많은 시민이 표면적으로는 “동성애자를 미워하지 않고 존중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성결혼에 반대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높고, 여러 이유를 들어 동성애 이슈 토론을 회피하는 경향도 적지 않다.

대만에서 동성결혼 합법화라는 거대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지난 30년 동안 많은 사람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번 헌법해석을 제기한 치자웨이(59)다. 그는 1986년 타이베이 한 맥도널드 매장에서 국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했다. 그는 대중에게 동성애자와 친구가 되고, 동성애자를 이해해야 하며,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명실상부한 대만 동성애 운동의 개척자다.

1986년은 대만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절이다. ‘대만 역사상 첫 커밍아웃 사례’인 치자웨이의 전위적 움직임은 독재정부를 자극했다. 그는 결국 구속되고 말았다. 5월28일 의 취재에 응한 치는 “당시 대만은 계엄 시절이었다. 나를 구금한 분은 소장 출신 경비총부(警備總部) 보안처(保安處, 1980년대 한국의 치안본부와 비슷함) 부처장이었다. 그는 ‘당신이 밖에서 동성애를 너무 강하게 고취(鼓吹)했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하지 못해 감옥으로 보내기로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5개월 뒤 장징궈 총통은 국가 이미지 손실을 우려해 치를 석방하기에 이른다.

1987년 대만은 한국과 함께 민주화의 걸음을 밟게 된다. 치자웨이는 더 적극적으로 에이즈 예방과 동성애 권익 추진 운동에 나선다. 1998년 치는 타이베이 지방법원에 “남자친구와의 혼인관계를 인정하라”며 행정소송을 냈으나 패소했다. 2000년 동성결혼 관련 첫 번째 헌법해석을 신청했으나 대법원은 심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치는 14년 동안 기다림 끝에 시민단체와 변호사들의 협조 아래 다시 헌법해석을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그사이 대만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마잉주 국민당 총통 집권에 대한 민심의 분노가 커지면서 다양한 사회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젊은 층의 주도로 각 사회계층이 길거리에서 시위했고, 정부에 권익 보호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동성애 운동도 그중 하나다.

치자웨이는 “마잉주 총통은 타이베이 시장 재임 시절 동성애 퍼레이드에 동참한 바 있다. 이후 대선 때 수많은 동성애자가 그를 지지했다. 천수이볜, 마잉주, 차이잉원 총통을 거쳐 대만은 17년 동안 3번 정권 교체를 경험했다. 역대 총통들은 동성애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동성애자의 미움을 사면 안 된다’는 사실을 대만 정치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성애자에게 권익을 주자고 하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특별법 아닌 민법 개정이 숙제
대만의 동성커플 왕셴위와 려우졔센. 대만 대법원의 결정은 이들이 받은 하나의 선물이 됐다. 양첸하오 제공

대만의 동성커플 왕셴위와 려우졔센. 대만 대법원의 결정은 이들이 받은 하나의 선물이 됐다. 양첸하오 제공

대만에서도 한국처럼 일부 교회를 비롯한 반동성애 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들은 국가멸망(國家滅亡), 윤리패괴(파괴)(倫理敗壞), 성적착란(혼란)(性別錯亂)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동성결혼이 허용되면 가정제도가 파괴되거나 동성애자가 확산되어 대만 사회를 망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대 목소리에 대해 치자웨이는 “종교적 믿음으로서 그들은 (동성애에) 계속 반대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라면 동성애 반대는) 자신의 교의를 준수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소용 있고 다른 종교를 가진 국민을 제약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정부와 국회의원들은 그들의 말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가 망하고 윤리가 파괴될 것이라는 반동성애자들의 지적에 “논리와 근거가 없다. 이미 동성결혼이 통과된 서양 국가의 예를 돌아보더라도 사회에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만 사법원은 헌법해석문에서 혼인관계를 ‘인격(人格)을 체현한 계약관계’로 정의했다. “개인적인 선택 존중의 전제로 이 계약 내용은 법률상 임의로 간섭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번 판결의 핵심이다. 동성애자가 모두 결혼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적으로 부여된 계약 권리를 동성애자에게만 금지하는 게 공평성을 훼손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동성결혼 헌법해석 요구에 참여한 저우위셔우 변호사는 “이 사회는 수많은 대가로 혼인제도를 구축하며 여러 특혜를 준다. 이것은 결혼한 사람만 받을 수 있고 혼인체계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에게는 특혜를 박탈하게 된다. 그래서 위헌이 성립된다”고 평가했다.

현행 민법 조항에 위헌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에 대만은 곧 동성결혼 관련 법 개정 문제에 직면할 전망이다. 현재 논의 중인 해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민법에 사용되는 ‘남녀, 부부, 부모’ 등의 단어를 성적 의미가 없는 ‘양자(兩者), 배우자, 양친’으로 전환하거나 “동성결혼을 민법의 모든 내용에 적용한다”는 조항을 추가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특별법 형식으로 성소수자 결혼권 보장을 명시하는 등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반동성애자 쪽에선 대만 민법은 보통의 남녀 관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이를 직접 수정할 경우 “윤리질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며 민법 개정보다 특별법 제정에 무게를 두고 있다. 반면 대다수 동성애자는 자신들이 이성애자와 같은 권익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동성애자 특별법을 따로 만드는 건 동성애자를 ‘특수 인종’으로 구분하는 것이고 이는 차별 요소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민법 수정을 지지한다. 사실 민진당 입법위원(국회의원)들은 동성결혼 관련 민법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수정안은 지난해 말 국회 1심을 통과했다. 하지만 국회 내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민진당 내에서도 아직 민법 수정이냐 특별법 제정이냐를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린다.

치자웨이는 “사회에 실천과 관찰의 시간을 부여하고 문제 여부를 확인하자는 것이 특별법의 취지다. 난 오랫동안 동성애 운동을 해왔다. 동성애 친구들의 권익을 보호하려면 1980년대부터 특별법을 기초(起草)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와 다른 기관들은 아직 특별법 초안을 공개하지 못했다. 이건 지연전술이다”라고 말했다. 치는 특별법을 막고 민법 개정을 이뤄내는 것이 다음 단계 동성애 운동의 방향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대만의 5·24 이후를 주목하라

왕셴위와 려우졔센 커플, 그리고 20~30대 젊은 동성애자들에게 동성결혼이 허용된 2017년 5월24일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하지만 치자웨이에게 5월24일은 30년간의 기다림 끝에 찾아온 것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동성결혼이 법률상 인정받게 됐지만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후 법률이 어떻게 처리될지, 그리고 대만 사회에 아직 존재하는 의견차와 오해를 어떻게 풀어낼지…. 한국은 여전히 대만의 ‘5월24일 이후’ 투쟁에 주목해야 한다.

양첸하오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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