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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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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선거권’을 이야기하는 나라

독일 10개 주 지방선거에서 만 16살부터 투표권 가져

학생들은 학교에서 정치·지역 현안 자유롭게 토론
등록 2017-03-03 03:46 수정 2020-05-02 19:28
독일 지방선거에선 16개 주 가운데 10개 주가 만 16살부터 선거권을 준다. 2011년 5월22일, 16살의 애니카 디트리히가 독일 브레멘 주의회 선거에서 투표하고 있다. REUTERS

독일 지방선거에선 16개 주 가운데 10개 주가 만 16살부터 선거권을 준다. 2011년 5월22일, 16살의 애니카 디트리히가 독일 브레멘 주의회 선거에서 투표하고 있다. REUTERS

베를린에 체류 중인 기자는 최근 독일 정부에서 지원하는 사회통합 교육과정(Intergrationkurs)을 마쳤다. 이주민·외국인을 위한 이 교육이 끝날 때 어학(1차)과 독일의 헌법·정치·역사·사회·문화에 관한 시험(2차)을 치렀다.

2차 시험에서 기자는 한국 사회에선 낯선 정답 하나를 적고 나왔다. ‘베를린의 구의회 선거에선 몇 살부터 투표가 가능하냐?’는 문제였는데, 답은 만 16살이었다. 독일은 한국의 국회의원선거와 비슷한 연방의회선거에서 법적 성인인 만 18살부터 투표할 수 있다. 하지만 지방선거(주의회·구의회 선거 등)에선 16개 주 가운데 10개 주가 만 16살부터 선거권(투표할 권리)을 준다.

OECD 35개국 대다수가 ‘18살 선거권’

2016년 말 10대들도 참여한 대규모 촛불집회 이후 한국에서 선거연령을 만 19살에서 18살로 낮추자는 움직임이 다시 일었다. 이 논의는 정치권에서 진전되지 못한 채 막혀 있다. 18살은 한국이 속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대다수가 부여한 선거연령이다. OECD 국가 중 선거권이 19살 이상인 나라는 한국뿐이다.

정치학 박사인 김상국 베를린자유대 교수는 “선거연령을 18살로 바꾸는 것은 하향이 아니라 이제야 OECD 기준으로 정상화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8살 선거권’은 정치권이 베풀듯 선거연령을 낮춰주는 시혜성 권리가 아니라, OECD의 표준으로 정상화하는 기본 조처라는 얘기다. 하지만 독일의 예를 보듯 선거연령은 다시 18살에서 16살로 확대되는 추세다.

한국에서 18살 선거권을 반대하는 논리는 학교의 정치화다. 학생들이 정치 논쟁에 휘말린다는 것이다. 한국의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독일은 학생 시절부터 전 생애에 걸쳐 정치화를 부추기는 나라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독일 정치교육은 중립성과 다양성에 있다. 국가가 교육 내용에 관여하지 않고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정치교육에 반영되도록 예산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연방 내무부 산하 연방정치교육원은 각 주의 정치교육원, 정당의 정치재단, 노동조합, 종교단체, 주정부·대학·시민단체 주관 시민대학, 동네마다 있는 시민학교(VHS) 등 정치교육 주체에 예산을 지원한다.

그 가운데 학교는 훌륭한 정치교육의 장이다. 베를린의 ‘힐데가르트 베크샤이더’는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학교(김나지움)다. 이 학교의 12학년은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같은 아비투어(Abitur)를 대비하는 마지막 학년이다.

그런데 12학년 학생들은 마지막 학기 내내 ‘정치·경제’ 과목에서 2010년 리비아·튀니지·이집트 등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과 국제연합(UN)·독일 정치권이 당시 취한 결정 등을 토론했다. 최근 이 학생들은 정치·경제 과목에서 각자 자유롭게 정한 정치 현안에 대해 관련 전문가와 나눈 인터뷰를 소개하는 공개 발표(프레젠테이션) 평가도 치렀다.

학생들에게 정치는 ‘잡담의 주제’
18살 미만 학생들의 모의투표를 주관하는 사이트. 누리집 갈무리 

18살 미만 학생들의 모의투표를 주관하는 사이트. 누리집 갈무리 

이 학교에 다니는 한국 교민 김진 학생은 “수업하면서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나 각 나라의 정치 상황을 자주 토론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 학생들에게 정치는 ‘잡담의 주제’라고 느낄 만큼 일상적이라고 얘기했다. “정치나 종교,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잡담하듯 친구들끼리 쉬는 시간에 얘기할 때가 많다.”

이 학교에는 1년에 두 차례 정도 대강당에서 지역 정치인들과 국내외 정치·지역 현안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도 있다. 학교 게시판에는 정당의 정치재단에서 주최하는 정치 포럼·세미나 안내 포스터가 나붙는다.

19살 이상부터 정당 가입이 가능한 한국과 달리 독일은 정당 가입 나이도 낮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소속당인 기독민주연합(CDU)은 16살부터 정당 가입을 허용하지만 14살부터 이 당의 청년연합(Jugend Union)에서 활동하는 걸 인정한다. 14~35살까지 가입한 청년연합의 회원은 11만5천여 명이다. 유럽 최대 청소년·청년 정치 조직이다. 올해 총선에서 메르켈 총리의 4선 연임 저지에 나선 사회민주당(SPD)은 14살부터 정당 가입을 승인한다. 독일에선 자녀가 법적 성인이 될 때 부모가 정당 가입 신청서를 선물하기도 한다.

독일 정치교육 가운데 한국이 참고할 흥미로운 제도가 있다. ‘U18 프로젝트’(U는 ‘아래’란 뜻의 Unter)란 독특한 모의투표다. 국적과 상관없이 독일에 사는 18살 미만의 사람들이 진짜 선거가 있기 9일 전에 실제 선거와 똑같이 투표소에서 모의투표를 한다. 실제 선거에서 제외된 어린이·청소년들이 이른 나이부터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고 표출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한 청소년클럽의 주도로 1996년 베를린에서 시작돼 지금은 독일 전역에서 실시한다. 올해 독일 총선(9월24일)이 열리기 9일 전인 9월15일에 ‘연방의회 U18 투표’가 실시된다. 18살 미만 누구나 학교, 청소년 시설, 스포츠클럽, 도서관, 거리의 광장 등 다양한 곳에 설치된 투표소에 가서 투표할 수 있다. 올해 ‘연방의회 U18 모의투표’의 투표소를 제공할 기관 등의 신청을 지금부터 받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의 참여와 연방정치교육원과 연방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연방 소속 몇 개 주의 재정 지원으로 모의투표가 열린다.

2013년 총선 ‘U18 모의투표’에선 19만8천여 명이 참가했다. 당시 10~15살 참여자가 9만9천여 명에 달했다. 모의투표 결과는 언론에 공개된다. 그 결과는 10대 청소년들이 쉽게 극단주의에 영향받는 ‘정치적 미성숙자’란 주장의 근거를 희박하게 만든다.

지난해 베를린 시의회 ‘U18 모의투표’에서 어린이·청소년들은 극우 정당인 국가민주당(NPD·1.3%)이나 반유로·반이슬람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3.5%)에 의회 진출의 최소 득표율(5%)에도 미치지 않는 표를 줬다. 이들은 모의투표에서 실제 베를린 시의회 선거와 유사하게 사민당에 가장 많은 표를 안겼다. 특히 모의투표에선 녹색당과 동물보호당이 성인들의 실제 선거보다 많이 득표해 젊은 유권자의 관심 영역이 무엇인지도 보여줬다.

“가족 1인당 1표, 가족투표권을”

한국에서 선거연령 변화에 반대하는 논리 가운데 하나가 독일처럼 정치교육 체계 등을 갖추지 않고 연령만 낮출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는 독일의 선거연령 변화를 세심히 살피지 않은 논리다.

독일이 지금처럼 탄탄한 정치교육 제도를 갖게 된 전환점은 1976년이다. 좌우 세력의 정치교육 주체들이 모여 논쟁 끝에 정치교육 대원칙에 합의한 ‘보이텔스바흐 협약’이 이때 마련됐기 때문이다.

독일의 선거연령을 21살에서 18살로 바꾼 헌법 개정은 이보다 앞선 1970년에 이뤄졌다. 헌법 개정 후 독일의 18~20살 청년들이 처음 참가한 1972년 선거에서 이들의 투표율은 91.9%였다. 이는 미국·유럽에서 일어난 ‘68 학생운동’의 결과물이다.

독일에서도 1968년에 권위주의 제도와 문화, 나치 정권을 묵인하거나 동조한 기성세대의 정신적 유산에 대항한 ‘68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독일 정치권은 젊은 세대를 사회의 의사 결정 주체로 포함하는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금지한 것을 금지하라’ ‘너를 파괴하는 것을 파괴하라’는 젊은 세대의 외침은 선거연령 변화로 이어졌다.

1969년 10월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신임 총리는 취임 연설에서 선거연령 변화를 위한 법 개정을 언급하며 “(젊은 유권자들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함께 결정하고 결과의 공동 책임자가 되는 것이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시도하려 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독일에선 정치교육 골격이 완성된 뒤 선거연령을 조정한 게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선거연령 확대가 정치교육을 더 풍부하게 만든 동력이 됐다.

지금 독일은 지방선거처럼 연방의회선거에서도 18살이 아닌 16살부터 선거권을 주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독일에선 2008년 연방의회 의원 40명이 ‘가족투표권’을 요구하는 안건을 의회에 제출한 적도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1인1표의 권리를 주자는 것으로, 4인 가족은 4개의 투표권을 갖는 방식이다.

16살 투표권은 사민당, 녹색당, 좌파당이 적극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16살이 성인보다 정보를 덜 얻는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더 오래 삶을 이어갈 당사자가 그들의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특히 정치적 주장에 쉽게 영향을 받는 성인이 많은데도, 청소년들의 정치적 성숙도만 지적하는 것은 그들에게만 더 높은 정치적 자격 요건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대학 진학 대신 사회 진출을 택한 독일의 청소년들이 16살부터 직업 실습을 받으며 세금도 내는 만큼 정치적 권리도 줘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16살부터 투표하자’(Mach’s ab 16)와 같은 단체는 “16살 투표는 나의 미래를 내가 직접 가꾸는 것을 말한다”고 얘기한다.

‘68 운동’ 이후 18살까지 선거연령 확대

독일이 ‘68 운동’ 이후 18살까지 선거연령을 확대한 것은 47년 전의 일이다. 이제 한국은 촛불집회 이후 정치 참여의 폭을 얼마나 넓히게 될까. 기자는 독일 정부의 사회통합 교육과정 2차 시험에서 국민주권을 규정한 독일 헌법 제20조 2항이 무엇인지 묻는 문제를 접했다. 이 문제의 답은 ‘국가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Alle Staatsgewalt geht vom Volke aus)는 것이다. 한국의 헌법 제1조 2항과 비슷한 이 조항은 독일에서 선거연령을 더 낮추자는 이들의 핵심 근거다. 헌법은 ‘성인 국민으로부터’(vom erwachsenen Volke)가 아니라, ‘국민으로부터’(vom Volke)라고 명확히 적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베를린(독일)=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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