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커교는 퀘이커교의 일파로, 공동체 생활을 원칙으로 하며 검박한 생활과 노동을 중시했다. 이들은 의복, 가구, 생활용품 등을 만들어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 1700년대 후반부터 일찍이 성평등, 노예제 반대, 전쟁 반대, 재산 공동 소유 등 혁신적 문화를 실천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 전역에 신자 6천 명과 10곳 이상의 공동체 마을을 거느렸다. 그러나 독신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셰이커교는 자손을 생산할 수 없어 오늘날 거의 명맥이 끊어졌다. 최근까지 미국 전역에 3명의 교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지구상에 남은 3명의 교도 중 한 사람지난 1월2일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3명의 셰이커교도 중 하나인 프랜시스 앤 카(Frances Ann Carr)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 미국 메인주 사바스데이 레이크의 셰이커 공동체는 웹사이트를 통해 그녀가 “짧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프랜시스가 10살 때 들어와 생애를 보낸 사바스데이 레이크의 셰이커 마을은 1783년 설립됐다. 영국에서 종교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망명한 셰이커교도들이 만든 공동체 10여 곳 중 현재까지 유일하게 활성화된 곳이다.
프랜시스는 오늘날 셰이커교의 ‘얼굴’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셰이커 특유의 연보라빛 전통 드레스를 입고 수많은 방송과 다큐멘터리 등에 출연해 셰이커교의 존재를 널리 알렸고, 마을을 지속하기 위한 자원봉사자 모집과 자금 모금을 담당하는 ‘셰이커교의 친구들’ 설립에 힘을 보탰다.
마을의 박물관장 마이클 그래햄은 “역사상 프랜시스 자매처럼 셰이커 교회의 친선 대사 역할을 잘해낸 셰이커교도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이제 남은 정식 셰이커교도는 2명이 되었다. 60살 아널드 해드, 78살 준 카펜터가 그들이다.
셰이커교의 정식 명칭은 ‘그리스도 재림 신자 연합회’다. 과격한 영국 퀘이커교도들의 작은 분파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예배 때, 몸을 흔들며 소리치거나 빙빙 도는 춤을 추며 노래하는 프랑스 카미자르파의 의식을 따랐다. 이 때문에 ‘몸을 흔드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셰이커’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이런 의식을 그만둔 뒤에도 이름만은 남았다.
셰이커교가 미국에 상륙한 것은 1774년이다. 창시자 ‘마더 앤’으로 알려진 앤 리가 추종자 8명과 함께 혁명 전야의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들은 1776년 뉴욕 북부에 첫 셰이커 공동체 마을을 설립했다. 점차 세를 넓혀 셰이커 공동체는 플로리다, 조지아, 켄터키, 매사추세츠 등 10여 곳으로 늘어났다. 19세기 중반 정점을 찍어, 6천 명에 이르는 신자와 셰이커 공동체 19곳을 거느렸다.
셰이커교의 특징은 ‘3C’로 일컫는다. 독신(Celibacy), 공동체 생활(Communal living), 고백(Confession)이다. 신자들은 공동체 마을에서 살기 위해 자신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형제자매’로서 엄격한 독신주의를 실천해나갔다. 주로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받아들여 마을에서 함께 키웠다.
‘기능성의 미학’ 미국 현대 디자인에도 영향이들은 모든 소유물을 공동 소유했다. 옷과 건축물, 가구를 직접 만들고 생활용품과 도구를 새롭게 발명했다. 공동농장에서 농작물을 재배해 자급자족적 삶을 살았고, 스스로 생산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이 만든 다양한 기업들은 놀랄 만큼 성공적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포장 씨앗’ 사업이다. 여러 셰이커교 공동체들이 합작한 투자사업으로 이 씨앗은 ‘셰이커 시드 컴퍼니’의 이름으로 시장에서 판매됐다. 이들은 처음으로 씨앗을 판매용으로 종이 포장해 유통했다.
셰이커교의 금욕적 생활은 낡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들이 일찍이 실천했던 성평등, 평화주의, 반노예제, 재산 공동 소유 등의 문화는 여전히 혁신적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에 따르면 1817년 남부 지방의 셰이커 공동체들은 그들의 노예를 모두 해방시켰고, 다른 흑인 노예들을 사들여 자유를 주기도 했다. PBS는 “노예가 해방되기 75년 전, 미국에서 여성 참정권이 생기기도 150년 전에, 셰이커교는 이미 모든 구성원의 사회적·성적·경제적·정신적 평등을 실천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셰이커교의 급진성은 모든 신자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안에서 일치된다는 교리에서 비롯한다. 그리스도는 이미 각자의 생활 속에 현존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따라서 셰이커교도는 죽은 뒤 천국이 있다고 믿기보다, 현생의 삶에서 천국을 건설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다. 의 작가 스티븐 스타인은 그들을 수도승에 비유해, 셰이커교는 고된 노동을 가치 있게 여기고 노동을 기도의 한 형태로 보았다고 말했다. “신은 노동의 디테일과 공예품의 품질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셰이커교의 생활방식은 가구와 생활용품 등의 디자인으로 나타났다. 시대를 앞선 간결하고 견고한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셰이커 가구’ ‘셰이커 양식’은 그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이들은 “미와 선의 합일, 미는 유용성이다”라는 교의 속에, 장식을 배제하고 기능성을 중시한 가구를 생산했다. 이 ‘기능성의 미학’은 미국의 현대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밖에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발명품, 예컨대 원형 톱, 납작한 빗자루, 빨래집게 등도 셰이커교도가 만들어낸 것이다. 한 다큐멘터리에서 남은 2명의 셰이커교도 중 한 명인 아널드 해드는 말했다. “셰이커교도에게는 모든 것이 신의 선물(gift)이다. 우리는 그 선물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프랜시스는 1927년 3월13일 미국 메인주 루이스턴에서 태어났다. 가난했던 어머니는 10살의 그녀를 사바스데이 레이크의 셰이커교 공동체로 보냈다. 16살 때 그녀는 셰이커교 계약에 서명했고 평생 이 종파에 귀의해 이곳에서 살았다.
그녀는 성장해 여원로로서 공동체의 정신적 중심이 되었다. 마더 앤의 시대 이래, 여성들은 셰이커교 사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프랜시스는 마을 농장을 다시 활성화하고, 일반에 셰이커교의 메시지를 전파하려 애썼다. 1985년 셰이커 요리책을 출간했고, 1995년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셰이커교도로서의 성장기를 담은 회고록을 펴냈다.
‘유산’과 ‘문화’로서만 남아이제 셰이커교는 ‘유산’과 ‘문화’로서만 남아 있다. 현실 종교로서 셰이커교는 거의 멸종 상태다. 지난 40여 년 동안 셰이커교 공동체에 신자 10여 명이 새로 들어왔지만 계속 남은 이는 몇 안 되었다. 10년 전 사바스데이 레이크에는 네 번째 셰이커교도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방문한 저널리스트와 사랑에 빠져 공동체를 떠났다. 더 최근에는 젊은 남성이 합류했는데, 그 역시 1년 만에 떠나버렸다.
대신 사적지로 보존된 셰이커교 마을에는 한 해 1만 명 이상의 여행자들이 방문한다. 셰이커 양식의 건축물, 다양한 셰이커 용품이 전시된 박물관, 수공예 워크숍 등이 여행자들의 관심사다. 제의적 춤이나 기도회 때 사용된 몇몇 셰이커 성가는 민요나 클래식 음악으로 살아남았다. ‘셰이커’란 단어는 간결한 수공예 스타일의 옷이나 가구 디자인을 가리키는 형용사로서 오늘날 ‘아미쉬’(Amish·기술문명을 거부하고 현재까지도 18세기 말과 같은 엄격한 생활을 하는 기독교 일파)와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생전에 ‘마지막’ 셰이커교도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여전히 새로운 신자들이 공동체 마을을 찾아올 거라는 희망을 가졌고, 그것이 신이 준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남은 두 셰이커교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새로운 셰이커교도가 그들을 찾아오길 계속 기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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