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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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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머리라고 안 될 게 뭐야

1960년대 ‘블로드라이’ 스타일링 개발한 영국의 헤어 스타일리스트 로즈 에반스키
등록 2017-01-06 09:03 수정 2020-05-02 19:28

미용실에서 ‘드라이’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다. 헤어드라이어와 롤브러시를 사용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웨이브 머리를 만드는 일. ‘블로드라이’(blow-dry)라 불리는 이 기술은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없었다.

영국의 헤어 스타일리스트 로즈 에반스키는 1960년대 초 블로드라이 스타일링을 개발한 인물이다. 그전까지 여성의 헤어 스트레이팅(거칠고 곱슬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펴는 것) 방법은 한 가지였다. 화학약품에 절인 채 거대한 오버헤드 후드 드라이어 아래 앉아서 1시간 이상 강렬한 열기를 견디는 것. 이 과정을 통해 탄생한 당시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은 하나같이 억지로 꾸민 듯했다. 에반스키가 블로드라이를 선보인 뒤 자연스럽고 간편한 ‘블로 웨이브’ 시대가 찾아왔다. 블로드라이는 빠르게 전세계 헤어드레서들의 필수 서비스가 되었고 지금까지 드라이 기술의 표준으로 삼는다.

1960년대 초반 헤어 스타일링의 중심지 런던 메이페어의 ‘에반스키 살롱’에서 블로드라이 스타일링을 개발한 헤어 스타일리스트 로즈 에반스키가 2016년 11월22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4. 에반스키는 말년에 자신의 성취에 대해 “나는 긴긴 시간 동안 뜨거운 드라이어 아래 앉아 있어야 했던 여성들을 해방시켰다”고 말했다.

헤어 드라이 기술의 표준을 만들다

1962년 어느 금요일 아침, 런던 고급 주택지 메이페어의 에반스키 살롱. 카트 위에는 여느 때처럼 헤어 스트레이트와 컬링용 각종 약품과 도구가 준비돼 있었다. 에반스키는 문득 며칠 전 이발소에서 본 풍경을 떠올렸다.

“나는 우리 살롱 근처 한 이발소를 지나다 이발사가 남성 고객의 젖은 머리를 브러시와 핸드 드라이어를 이용해 만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이미지가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생각했다. ‘여성의 머리라고 안 될 게 뭐야?’”([W], 2012)

점심 때 예약 손님 헤이 부인이 미용실을 찾았다. 에반스키는 그 기술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나는 롤브러시와 드라이어를 집어들고, 부인 머리카락의 젖은 부분을 브러시로 만 다음 왼손에 든 드라이어로 뜨거운 바람을 쏘였다. (…) 곧, 헤이 부인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매끄럽고 부드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세팅롤로 만 것처럼. 신나는 일이었다!”(회고록 [In Paris We Sang], 2013)

그때 마침 영국판 패션에디터 클레어 렌들셤이 숍을 찾았다. 렌들셤은 그녀가 ‘시전 중인’ 새로운 기술을 지켜보더니 급히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타블로이드지 패션에디터 바바라 그리그스와 함께 돌아왔다. 그날 오후 에반스키의 ‘뉴 블로 웨이브’ 기사가 신문에 소개됐다. 에반스키는 2012년 [W]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두 기뻐하지는 않았다. 기사가 나왔을 때, (당시 살롱을 공동 운영하던) 첫 번째 남편은 말했다. ‘당신 미친 거야? 우리 얼마 전에 새 후드 드라이어를 20대나 장만했잖아! 그것들은 어쩌라고. 다 갖다 버려?’”

구글 이미지에서 ‘1950년대 헤어살롱’을 검색해보면 이 기술이 여성에게 얼마나 큰 해방을 가져왔는지 알 수 있다. 흑백사진 속 미용실 여성들은 우주인이 쓸 것 같은 헬멧 형태의 ‘오버헤드 후드 드라이어’ 아래 일렬로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다. 그저 머리 모양을 찍어내는 기괴한 미용 공장처럼 보일지 모르나 여성들에게는 상당한 고역이었다. 이 과정은 보통 “튀긴다”(frying), “지진다”(sizzling)는 단어로 묘사되었다.

헤어드레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화학약품과 다양한 도구를 준비해야 하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에반스키는 이 과정을 무척 싫어했고 같은 여성으로서 고충을 이해했다. 다른 방법을 고안해낸 것도 이런 공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블로 웨이브는 “억지로 꾸민 듯한 웨이브와 컬”보다 “자유와 움직임”()을 강조한 메이페어 스타일의 최전선에 섰다. 그로부터 1년 안에 메이페어의 모든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이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에반스키는 런던 제일의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되었다. 세계적 헤어 디자이너 비달 사순이 뉴욕 ‘비달사순 살롱’ 중 하나를 맡겠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에반스키는 거절했다). 후일 1960년대 아이콘, 모델 트위기의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된 ‘레오나르드 오브 메이페어’가 에반스키 밑에서 견습생 생활을 했다.

‘튀기고’ ‘지지는’ 대신

로젤 러너(본명)는 1922년 5월3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남쪽 보름스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반유대주의를 피해 독일로 이주했다. 1938년 그녀의 아버지는 나치에 붙잡혀 다하우 수용소로 보내졌고, 16살의 로즈는 유대인 어린이 구호단체에 의해 가까스로 독일을 탈출해 영국으로 이송됐다.

영국에서 가족과 기적적으로 재회한 에반스키는 런던 화이트채플가의 코헨이라는 이발소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독일어와 이디시어(중부·동부 유럽 유대인 사용 언어)밖에 할 줄 몰랐던 에반스키는 팁으로 연명하며 영어를 조금씩 익혀나갔다. 그녀는 회고록에 “누구든 내게 머리를 맡기는 사람이 있으면 밤늦게까지 연습했다”고 적었다. 이후 리젠트가의 헤어살롱에 일자리를 얻어 헤어 스타일리스트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20살이던 1943년 같은 살롱의 동료 앨버트 에반스키와 결혼했다. 1947년 남편과 런던 교외 헨던이라는 도시에 처음으로 헤어살롱을 차렸다. 1953년 상류층 거주 지역 메이페어로 자리를 옮겼다. 메이페어는 비달 사순이 첫 살롱을 연 곳으로 당시 영국 헤어스타일을 선도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지역이었다.

에반스키는 1950~60년대 중반 메이페어에 메이저 살롱을 가진 유일한 여성이었다. 자신의 일을 커리어라기보다 개인 서비스로 여기는 성향이 강했다. 그녀는 고객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이 고안한 실험적 스타일을 고집하거나, 젊은 패션 피플만 상대하는 남성 헤어드레서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담사나 친구처럼 손님을 대했다. 에반스키 살롱은 번창했다.

에반스키는 남편과 이혼하고 1965년 극작가 데니스 캐낸과 결혼했다. 이후엔 헤어드레서의 삶을 떠나 남편과 서식스의 시골로 이사했다. 그들은 잠시 런던으로 돌아왔다가, 말년에 해변 도시 호브로 이사했다. 그 후 개인적으로만 헤어드레서 일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최근 다른 1960년대 헤어드레서의 책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몇몇 라디오, 패션지와 인터뷰했고 [In Paris We Sang](2013)이란 회고록을 펴냈다. 남편 캐낸은 알코올중독을 앓다가 2011년 사망했다. 2012년 [W]는 은둔하던 에반스키를 인터뷰해 ‘90살의 블로드라이 창시자를 만나다’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녀는 말했다.

“남편 아니라 자신을 위한 머리를 하세요”

“나는 내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성숙한 여성 고객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우리는 수다를 떨었고 즐거웠다. 때때로 그들은 ‘남편은 이런 머리 스타일 싫어할 텐데’라고 했다. 그럼 나는 말했다. ‘남편 신경 쓰지 마요. 자신을 위해 머리를 하세요!’ 나는 그들에게 독립성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

노파가 된 사진 속 에반스키는 완전히 하얗게 된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정작 자신의 머리는 한 번도 염색한 적 없고 스스로 다듬었다고 한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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