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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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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아프다

정치학자 뭉크와 포아가 발표한 세계의 민주주의 체제 ‘건강검진’ 결과
등록 2016-12-06 11:47 수정 2020-05-02 19:28
11월12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한 시민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반대 행진을 하고 있다. REUTERS

11월12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한 시민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반대 행진을 하고 있다. REUTERS

‘민주주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라는 정치학 개념이 있다. 한 사회가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어느 정도 경제적 부가 쌓이면 그 사회의 민주주의는 쉽게 되돌리지 못할 만큼 뿌리를 내리고 굳어진다는 뜻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와 한국은 군부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룩했고, 냉전이 끝난 뒤 동유럽 국가들도 민주화에 성공했다. 북아메리카와 서유럽 등지에서도 민주주의 전통이 유지되면서 민주주의 공고화는 현실 세계의 많은 사례를 통해 검증되는 듯했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야스차 뭉크는 민주주의 공고화 명제에 의문을 품고 동료 학자 로베르토 스테펀 포아와 함께 데이터를 모아 연구했다. 그리고 현재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세계 곳곳에서 퇴보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을 내린다.

뭉크와 포아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튼튼한지 진단하고자 세 변수를 고려한 공식을 만들었다. 공식은 일종의 건강검진과도 같은 것으로, 민주주의 체제에 어떤 병이 들어 국가 전반에 심각한 증세가 나타나기 전에 문제나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고 뭉크는 설명했다. 세 변수는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시민의 지지, 민주주의가 아닌 통치 방식에 대한 관용의 정도, 기존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정당이나 정치세력이 얼마나 성공을 거두느냐다.

민주주의를 꼭 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시민이 줄어들고, 기존 체제를 통째로 부정하는 정치세력이 득세하는 상황을 뭉크와 포아는 민주주의 공고화의 반대 뜻으로 ‘민주주의 약화(Deconsolidation)’라 명명했다.

독감에 걸리기 전 몸에 열이 나듯이, 민주주의 약화가 실제 민주주의가 퇴보한 나라에서 체제가 흔들리기 전에 조짐처럼 나타났다고 뭉크와 포아는 주장했다. 우고 차베스의 군부 쿠데타가 나기 전 1980년대 베네수엘라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그랬고, 지난해 기성 체제를 부정하는 극우정당인 법과정의당이 대선과 총선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폴란드도 뭉크와 포아의 공식에 대입해보면,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할 때 (당시엔 옛 공산국가 가운데 모범적인 민주화 사례로 칭송을 받았지만) 이미 민주주의 약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2005년 폴란드 국민 16%가 ‘민주주의는 나쁜 정치 체제’라 답했고, 2012년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 22%가 ‘군부통치를 지지한다’고 했다.

뭉크와 포아가 더욱 우려하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많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베네수엘라, 폴란드에서 그랬던 것과 같은 민주주의 약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네덜란드, 뉴질랜드, 스웨덴, 미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시민의 비율은 크게 낮아졌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서 이 경향이 뚜렷했다. 권위주의나 독재 등 비민주정에 대한 지지나 이를 용인하는 정도도 높아지고 있다.

기존 민주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반체제·반기득권 세력도 더욱 득세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그 절정이라 할 수 있고, 유럽에선 이미 프랑스 국민전선, 그리스 시리자, 이탈리아 오성운동 등 좌우를 막론하고 기존 체제가 전부 문제라고 비판하는 세력이 수권 정당이 될 만한 지지를 얻고 있다.

물론 민주주의 약화가 반드시 자유민주주의 체제 붕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뭉크는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환경보호국(EPA)을 정말 폐지할지 몰라요. 개별 사안으로서 중요한 문제죠. 더 심각한 건 트럼프는 미국이 지켜온 자유민주주의의 전통과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에요. 다른 나라에선 이미 현실로 나타난 문제이기도 합니다. 언론인이라면, 학자라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모두를 위해 이 문제를 적극 제기하고 감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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