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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을 부르는 삽질

‘영웅 귀환 법’ 발의, 민간 방북에 실종자 가족 동행

북-미 관계 개선의 실마리 제공할까
등록 2016-11-12 08:13 수정 2020-05-02 19:28
외교전문가, 언론사 기자 등 현지 필진이 미국·일본·중국·유럽에서 벌어지는 세계 뉴스를 예리한 분석과 깊은 통찰력으로 풀어드립니다. 이번호 필자는 20년 가까이 한국과 유럽, 미국을 오가며 한반도 문제를 공부해왔습니다. 미국의 정치체제와 외교·안보 전략도 주의 깊게 관찰하는 미국 내 현직 언론인입니다. _편집자
2007년 4월12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에서 유해 송환 행사가 열렸다. 장병들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6구를 운구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07년 4월12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에서 유해 송환 행사가 열렸다. 장병들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6구를 운구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11월8일 미국 대통령선거와 상하원 선거를 코앞에 둔 지난 9월28일, 한국전쟁 참전 군인 유해 발굴에 메가톤급 영향을 미칠 법안 하나가 미국 상원에 전격 발의됐다. 뉴햄프셔주 공화당 소속 켈리 에이요트 상원의원이 이날 국토안보위원회에 제출한 법안은 미군 군사기록 보관소를 포함해 정부 내 각 부처에 흩어진 실종 군인과 전사자에 대한 기록물을 한곳에 모아 분류한 뒤 공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만약 법안이 통과된다면 그동안 한국전쟁 참전 미군 유해 발굴의 큰 걸림돌 하나가 제거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전쟁에서 전투 중 또는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거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실종 처리된 경우 이들의 당시 행적이 비교적 상세히 적힌 전황 보고서와 각종 군사 첩보 등이 유해 발굴을 위한 1차 자료로 매우 중요하다. 이 기록들이 그동안 기밀로 분류돼 접근이 차단된 경우가 많아 실종자 가족들의 불만이 컸다.

‘기밀 보고서’ 포함한 기록물 모이도록

‘우리 영웅들의 귀환을 위한 법’(Bring Our Heroes Home Act of 2016, S.3448)으로 명명된 법안은 우선 국립문서보관소에 ‘실종 군인 컬렉션’을 새로 설치해, 한국전쟁을 포함해 미국이 참전한 전쟁에서 전투 중 사망했거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실종 처리된 뒤 유해를 찾지 못한 참전 군인들의 신상이 언급된 각종 기록물을 확보해 한데 모으도록 했다. 전투, 작전 상황과 피해 현황이 자세히 언급된 기밀 보고서뿐 아니라 사진, 녹화물, 지도 등 관련 기록물이 모두 포함된다.

현재 이 기록물들은 주로 정부기관과 대통령 기념 도서관에 흩어져 보관돼 있고 제대로 분류조차 되지 않고 있다고 법안은 지적했다. 기록물은 새로 설치될 검토위원회를 통해 유해 발굴에 유용하다고 판단되면 기밀 해제된 뒤 공개될 예정이다. 법안은 역사가와 변호사가 각각 한 명씩 포함된 5명의 검토위원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 인준을 거쳐 임명토록 했다. 위원회가 행정부 입김에서 벗어나 독립적 판단에 따라 기밀 해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기밀 해제에 소극적이던 행정부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평가된다.

에이요트 의원은 법안 발의 직후 성명을 통해 법안이 미군 유해 발굴에 필요한 1차 자료를 더 광범위하고 신속히 확보하게 할 것으로 기대했다. 10년 넘게 중단된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의 재개를 요구해온 ‘한국전쟁과 냉전 전쟁포로·실종자 가족 연합회’(Coalition of Families of Korean and Cold War POW/MIAs)는 즉각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에이요트 의원의 성명서에는 이 단체의 릭 다운스 사무총장이 밝힌 “적극 환영” 반응이 언급됐다. 법안 발의 과정에서 미군 실종자 가족들의 거듭된 청원이 큰 역할을 했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다운스 사무총장은 “입법이 될 경우 지난 수십 년간 계속돼온, 실종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려는 가족들의 노력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하고 긍정적인 진전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버지의 생사를 아직 확인하지 못한 다운스 사무총장은 기밀로 분류된 실종 군인들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도록 수년 전부터 미국 의회에 입법을 청원해왔다.

기밀 해제된 자료에서 실종 미군이 특정 지역에서 전투 중 사망했거나 포로로 이송돼 구금 중 사망했다는 기록이 공개되면 유해 발굴 작업 기간이 크게 단축될 수 있다. 실종 군인 가족들은 북-미 긴장으로 중단된 유해 발굴 작업의 조속한 재개를 행정부에 압박하는 계기가 될 걸로 기대한다. 한국 언론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법안이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이 북한에서 재개되도록 촉진하는 분수령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 중 하나다.

9월 민간기구 이례적 방북
‘한국전쟁과 냉전 전쟁포로·실종자 가족 연합회’ 릭 다운스 사무총장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버지의 생사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페이스북 갈무리

‘한국전쟁과 냉전 전쟁포로·실종자 가족 연합회’ 릭 다운스 사무총장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버지의 생사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페이스북 갈무리

‘영웅 귀환 법’ 발의가 북한에서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이 재개되도록 하는 ‘기초 다지기’였다면, 열흘 뒤 세상에 공개된 미국 민간기구의 방북은 한발 더 나아가 ‘현장 실사’로 평가된다. (2016년 10월8일치)의 단독 보도로 공개된 미국 민간사절단의 이례적 방북은 기사 제목부터 ‘흔치 않은 접촉, 미국 민간사절단의 북한 방문’(In Rare Encounter, a Private U.S. Delegation visits North Korea)이었다. 9월24일부터 27일까지 빌 리처드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가 설립한 ‘리처드슨센터’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지원 아래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왔다는 짤막한 소식을 전했다. 는 당시 방북이 ‘거의 2년 만에 이뤄진, 미국 대표단과 북한 관리들의 흔치 않은 대면접촉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눈길을 끄는 건 방북단의 면면이었다. 리처드슨 전 주지사의 핵심 참모로 이번 방북의 실무 책임자인 미키 버먼과 다운스 사무총장이 참여했다. 당시 방북에서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 재개가 북한이 억류 중인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석방 등과 함께 주요 의제로 논의됐다고 리처드슨센터 쪽은 밝혔다.

백악관은 의 논평 요청에 대해 리처드슨센터와 방북을 사전에 논의했다고 공개하고 이러한 인도주의적 노력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이례적으로 밝혔다. 미군 유해 발굴과 송환 문제에 대해 참전 군인들의 유해를 타국에 방치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내 고향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대원칙을 재차 강조한 걸로 해석됐다. 하지만 사안의 성격상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겉도는 북-미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미군 유해 발굴 재개가 제공할 수도 있다는 기대 역시 가능한 상황이다.

미국 의회가 적성국에 대가를 지급할 수 있도록 거의 유일하게 예외를 둔 사안이 미군 유해 발굴과 송환 사업인 점을 감안하면 행정부로서도 북한과 관계 개선을 위한 출구전략으로 충분히 검토할 만한 의제이다. 당시 방북이 차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을 재개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 성격을 띤 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방북과 관련해 리처드슨센터나 한국전쟁 실종자 가족연합회는 인터뷰 외에 언론 접촉을 거부하는 등 극도로 말을 아끼며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전쟁 당시 실종 군인과 관련한 기밀 자료의 기밀 해제 법안 발의와 함께 미군 유해 발굴 재개가 북-미 주요 의제로 논의될 가능성이 여전하다는 지적이다.

북한과 대화 요구하는 목소리 잇따라

북한에서 이뤄진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은 겉으론 인도주의적 사안으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다는 명제가 붙긴 했지만, 실제 한반도 정세에 따라 재개와 중단을 반복하는 등 부침이 심했다. 북-미 양국은 1996∼2005년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와 평안북도 운산 등지에서 공동으로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을 펼쳤다.

당시 200여 구의 미군 유해를 발굴하는 등 성과를 거뒀지만 북핵 문제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면서 미국은 유해 발굴팀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격 철수했다. 이후 2011년 북-미 관계가 점차 개선되는 분위기 속에 유해 발굴 작업을 재개하기로 양국이 합의했지만, 이듬해 북한이 2·29 합의를 어기고 장거리로켓 발사를 강행하자 없던 일로 돼버렸다. 미국 국방부는 현재 북한 지역에 8천여 구의 미군 유해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미군 유해 발굴 작업 재개를 염두에 둔 일련의 움직임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만료를 눈앞에 두고 미국 내에서 북한과 대화 재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잇따라 나오는 것과 맞물려 있다. 먼저 10월2일 하원의원 출신 제인 하먼 우드로윌슨센터 소장이 기고를 통해 ‘핵과 미사일 개발 동결을 목표로 한 대북 협상 재개’를 주장했다. 10월4일에는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북핵특사가 존스홉킨스대학 한미연구소와 통일준비위원회가 공동 개최한 토론회에서 “북핵 문제는 세월이 갈수록 좋아지는 와인이 아니다”라고 일갈하며 북-미 대화 재개를 촉구했다.

갈루치 전 특사는 10월21∼22일 조지프 디트라니 전 6자회담 미국 쪽 차석대표 등과 함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한성렬 북한 외무성 부상 등과 ‘트랙투’ 대화를 통한 민간 차원의 대북 접촉도 했다. 존스홉킨스대학 한미연구소와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가 10월17일 공동 발간한 동북아 안보협력에 대한 정책 보고서 역시 ‘미국이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해 북한과 대화에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 작성에 참여한 보고서는 구체적으로 과거 클린턴 행정부 때 추진한 ‘페리 프로세스’ 같은 대북 포용 정책을 다시 꺼내들어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전 북핵특사 “북핵 문제 와인 아니다” 일갈

한-미 양국이 입을 맞춰 ‘대북 제재 강화’를 외치지만, 과거 직접 ‘북한을 다뤄본’ 미국 내 많은 북한 전문가들은 11월8일 대선에서 선출될 차기 미 행정부를 향해 북한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적극 해결에 나서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양상이다. 반면 북핵 문제를 사실상 방치해 문제를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재임해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핵심 참모들은 여전히 강력한 제재가 북핵 문제를 풀 유일한 열쇠라는 태도를 보인다.

내년에 출범하는 새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해 북한과 대화에 나설지 관심거리다. 이 경우 북-미 대화의 최종 목표는 북핵 문제 해결이 되겠지만 그 출발은 북한에서 한국전쟁 참전 미군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첫 삽질로 시작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강창민 재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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