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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사람

개발 탐욕에 스러진 ‘그린 노벨상’

온두라스 시민운동가 베르타 카세레스… 환경파괴 댐 건설 막으려다 괴한에 총탄

제1103호
등록 : 2016-03-16 16:07 수정 : 2016-04-0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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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이 윌리엄 시드니 포터인 미국 소설가 오 헨리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19살에 약사 면허를 땄고, 한때 은행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은행 돈을 멋대로 썼다가 횡령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할 때도, 야간 당직약사 노릇을 하며 교도소 병원에서 편안하게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896년 7월 횡령죄로 기소된 뒤 보석 상태에서 온두라스로 도망친 일이 있는데, 8개월 남짓한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집이 <양배추와 왕>(1904)이다. 미국에 휘둘리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나라를 비웃는 표현인 ‘바나나 공화국’이란 말은 이 책에 처음 등장한다. ‘바나나 공화국’의 오늘은 안녕하신가?

인권에서 생태·환경운동으로 확장

베르타 이사벨 카세레스 플로레스는 1971년 3월4일 온두라스 서부 내륙도시 에스페란사의 렌카족 원주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 대해선 알려진 게 많지 않다. 조산사로 생계를 꾸렸던 어머니는 마을 대표를 맡을 정도로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그는 군부독재의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어온 엘살바도르 난민 지원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어린 카세레스는 ‘혁명의 나라’ 쿠바와 ‘산디니스타의 나라’ 니카라과에서 전해오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자랐다. 당시 온두라스에선 ‘불법’ 행위였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교사 자격증을 손에 쥔 카세레스가 향한 곳은 학교가 아니었다.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그는 1993년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온두라스 원주민회의’(COPINH)란 단체를 설립했다. 인권단체로 출발한 원주민회의는 자연스레 생태·환경운동 쪽으로 외연을 넓혔다. 불법 벌목과 거대 농장의 환경파괴, 원주민 거주지에 자리한 미군기지 문제 등도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던 2006년 리오블랑크 지역에 사는 렌카족 원주민들이 카세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마을 주변으로 중장비와 각종 건축 설비가 몰려들고 있다는 게다. 원주민회의 쪽은 즉각 확인에 들어갔다. 온두라스 전력회사 ‘데사르로요스’가 세계은행에 딸린 국제금융공사(IFC)의 자금 지원을 받아 괄카르케강 유역에 발전용 댐 4기를 건설할 계획임이 드러났다. 이른바 ‘아과 카르카 댐 건설 프로젝트’다. 이미 중국 국영업체 ‘중국수전’(Sinohydro)과 합작건설 계약까지 맺은 것으로 확인됐다. 현지 주민들과는 한마디 상의조차 없었다.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한 주민들이 카세레스와 머리를 맞댔다. 집회와 시위로 댐 건설의 부당성을 알리고, 법정 다툼도 준비해나갔다. 미주간인권위원회를 비롯한 국제기구에서 호소문을 보냈다. 공사는 진척되지 못했다. 그런데 2009년 6월28일 뜻밖의 사태가 터졌다. 선거로 집권한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로 축출된 게다.

성공한 사업가 출신인 셀라야 대통령은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당 소속이다. 하지만 2006년 1월 집권 이후, 그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무상교육과 영세농민 보조금 제도를 도입하는가 하면, 최저임금을 80%까지 인상하는 등 개혁 조치가 잇따랐다. 이에 힘입어 중남미 최빈국으로 꼽히던 온두라스의 빈곤율이 10%포인트 급락했다. 집권 3년차인 2008년 들어선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주도하던 ‘볼리바르대안연대’(ALBA)에 적극 가담했다. 안팎의 눈초리가 사나워진 이유다.


쿠데타 뒤 신변 위협 커져

쿠데타군은 셀라야 대통령을 파자마 바람으로 납치했다. ‘순교자로 만들지 않겠다’는 군부의 뜻에 따라 그는 코스타리카로 강제 망명길에 올랐다. 국제사회는 한목소리로 쿠데타를 비난했다. 미국만 예외였다. 미 국무부는 군부가 선거로 집권한 대통령을 몰아낸 사태를 ‘쿠데타’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부가 지명한 임시 대통령과 ‘정국 안정화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미 국무장관은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쿠데타 이후 온두라스는 빠르게 ‘정상’을 되찾아갔다. 외자 유치를 명분으로 환경파괴 우려가 큰 초대형 개발 프로젝트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온두라스 국토의 30% 가까이가 각종 건설이나 광물 개발사업 부지로 지정됐을 정도다. 막대한 개발사업에 필요한 에너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온두라스 정부는 국토 전역에서 수백 건의 크고 작은 댐 건설을 승인해줬다. 카세레스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2013년 4월 카세레스는 원주민회의 활동가와 주민들을 이끌고 댐 건설 현장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점거시위에 들어갔다. 그해 7월15일 군은 주민들에게 총질을 했다. 활동가 1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다. 카세레스와 주민들은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결국 그해 말 중국수전과 국제금융공사는 댐 건설 포기를 선언했다. 데사르로요스 쪽은 포기를 몰랐다. 2014년 5월 괴한의 공격으로 활동가 2명이 숨지고, 3명이 중상을 당했다. 온두라스 법원은 ‘신변보호 조치’의 일환이라며, 카세레스의 출국을 금지하고 매주 정해진 시간에 법정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풀뿌리 주민운동을 통해 괄카르케강 유역의 초대형 프로젝트인 ‘아과 카르카 댐’ 건설을 가로막았다.” 이른바 ‘그린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드만 환경상 위원회는 지난해 4월 카세레스를 중남미 부문 수상자로 선정하며 이렇게 평했다. 그로부터 넉 달 뒤, 데사르로요스 쪽은 댐 건설 공사를 단독으로 재개했다. 활동가를 겨냥한 고소·고발이 난무했다. 폭력의 수위가 높아졌다. 살해 위협 빈도가 잦아졌다.

올해 들어선 상황이 더욱 급박해졌다. 지난 2월20일 댐 건설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주민과 활동가 100여 명을 업체 쪽 경비용역이 불법 구금했다. 닷새 뒤인 2월25일엔 댐 건설 예정지인 하르시아 지역의 원주민 가옥 50여 채가 무단 철거됐다. 위협의 수위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카세레스에 대한 살해 위협이 심각해지면서, 미주간인권위는 온두라스 정부에 그의 신변보호를 공식 요청했다. 동료 활동가들은 순번을 정해 그의 집에서 밤을 지켰다. 다국적 인권단체 ‘글로벌 위트니스’가 지난해 펴낸 보고서 ‘얼마나 더 죽어야 하나?’를 보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온두라스에서 살해된 시민운동가는 모두 101명에 이른다.

“지나치게 많은 진실을 말했으므로”

2016년 3월3일 새벽 1시께 카세레스의 집 뒷문으로 무장괴한이 들이닥쳤다. 더러는 2명이라고, 다른 이들은 11명이라고도 했다. 적어도 4발의 총알이 침대에 누워 있던 카세레스의 몸에 박혔다. 향년 44, 만 45살 생일을 단 하루 남긴 날이었다. 카세레스를 지키기 위해 함께 머물고 있던 멕시코 환경운동가 구스타보 카스트로 소토 역시 뺨과 손에 총상을 입었다. 활동가들과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아침 8시가 돼서야 현장에 나타난 경찰은 모여 있던 주민과 활동가들을 윽박질렀다. 보존돼야 할 현장은 깔끔하게 정리됐다. 애초 단순 절도사건 취급을 했던 경찰은, 얼마 뒤 태도를 바꿔 ‘치정에 의한 살인’으로 몰아갔다. 카세레스의 동료 남성 활동가들이 ‘살인 용의자’로 체포됐다. 경찰은 비난 여론이 급등한 뒤에야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이들을 풀어줬다.

유일한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소토도 구금됐다가 사흘 만에 풀려났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3월8일 “경찰은 구금 기간 동안 소토가 총격을 당할 때 입고 있던 유혈이 낭자한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게 했고, 잠 안 재우기 등 가혹행위를 했다”고 전했다. 온두라스 당국은 소토에게 ‘30일 출국 금지령’을 내렸다. 수사는 더디게 이어지고 있다. 미국 인권단체 ‘다른 세상’(OW)의 창설자 비벌리 벨은 지난 3월9일 대안매체 <커먼드림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애도했다.

“카세레스의 조사를 쓰기 시작한 게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다. 그가 자연사할 만큼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란 점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권력집단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진실을 말했으므로….”

정인환 <한겨레>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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