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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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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종전 뒤안, 강간과 학살의 기억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 미국·소련 점령군에 성폭행당한 독일 여성 피해자들과 프랑스가 자행한 알제리 세티프 학살의 기억
등록 2015-05-29 08:36 수정 2020-05-02 19:28

1945년 5월8일은 화요일이었다.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여기저기서 ‘새는 울고 꽃은 피었다’. 유럽에서 드디어 2차 세계대전이 끝났기 때문이다. 승리한 군인들은 환호하며 고향으로 돌아갔고, 살아남은 수용소 수인들은 누더기 몸이지만 편안하게 숨 쉴 수 있었으며, 억눌린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종이와 깃발을 찾았다. 자유이자 해방이었다.

패전국에서 해방국이 된 독일, 그러나…
영화 '베를린의 한 여인'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익명의 저자가 쓴 같은 이름의 책을 원작으로 삼아 만들어졌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독일 베를린을 점령했던 소련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생존을 위해 성매매에 나서야 했던 독일 여성의 비참한 기억을 담았다. 한겨레

영화 '베를린의 한 여인'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익명의 저자가 쓴 같은 이름의 책을 원작으로 삼아 만들어졌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독일 베를린을 점령했던 소련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생존을 위해 성매매에 나서야 했던 독일 여성의 비참한 기억을 담았다. 한겨레

그렇지만 독일인에게 그것은 일차적으로 패전에 불과했다. 독일은 점령되었고, 독일군은 포로가 되었으며, 동유럽 지역의 독일인들은 추방되었다. 1945년 5월8일은 독일인들에게 대립적인 기억의 날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동독 지역에서는 공산주의 지배 이데올로기 강화 맥락이긴 하지만 ‘파시즘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해석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서독 지역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다. ‘패배’ ‘항복’ ‘파국’ ‘몰락’ 등의 단어가 전후 초기 대다수 서독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었다. 그들은 5월8일을 ‘해방’의 날로 느끼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다는 것에 안도하긴 했지만 ‘해방’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일렀다. 나치 지도부는 궤멸되었지만 나치가 심어놓은 민족주의 자의식이 오래갔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향유했던 승전의 환희를 공유하기에는 자신들 앞에 놓인 폐허 더미가 너무 높았고 패전의 모멸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아울러 점령과 재판과 포로와 추방 및 빈곤의 일상은 자신들의 과거사와 대면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오히려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북돋았다.

그러다가 1960년대 나치 전범 재판의 정치적 반향과 1970년대 홀로코스트 범죄에 대한 정치적·학문적 정리 작업 뒤에야 비로소 인식의 전환이 확산되었다. 서독 사회에서 나치 범죄에 대한 단죄와 민족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85년 당시 서독 대통령이던 폰 바이츠제커는 종전 40주년을 맞은 연방의회 연설에서 독일인들이 과거사에 대한 ‘미화와 일방적 이해를 버리고 진실과 대면해야’ 한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1945년 5월8일을 ‘패배’가 아니라 ‘해방’으로 인식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나치가 이웃 유럽인들만이 아니라 독일인들도 폭력 지배를 했음을 명료하게 선언하며 나치의 희생자 그룹을 일일이 언급했다.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나치의 폭력 지배와 희생이 발생할 때 독일인들이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는데도 방관했음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연설은 독일인의 과거사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환기하고 ‘5월8일이 독일사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끝났다.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의 이 ‘해방’ 연설은 독일인들의 역사의식 변화에 큰 계기가 되었다. 독일의 과거 청산 작업에 큰 힘이 되었고 그 뒤 10여 년 동안 이정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보면 그 연설은 한계가 뚜렷하다. 먼저, 그것은 가해자를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로 한정한 것이 문제였다. 당 하부 조직과 군대, 경찰을 비롯한 다양한 가해자 집단들의 범죄 연루를 배제했다. 또 다른 문제는 그 ‘해방’ 서사가 1945년 5월8일을 ‘해방’으로 기억할 수 없는 독일인 피해자 집단을 포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전후 70년을 맞는 올해 독일에서는 ‘5월8일’의 복합적 성격에 주목하는 논의가 성황을 이루었다. 그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단연 1945년 5월 점령군으로 들어온 연합국 군인에게 성폭행당한 독일 여성에 대한 때늦은 주목이다.

소련군이 전후 점령지 독일에서 독일 여성을 대량으로 성폭행했다는 사실은 이미 좀 알려졌다. 하지만 누구도 체계적인 연구에 나서지 못했는데, 그것은 자칫하면 나치 범죄를 상대화하고 독일을 전범 가해 국가가 아니라 희생자 국가로 포장하며 극우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동안 철저하게 이루어진 나치 과거 청산의 성과는 독일 학계로 하여금 더 다양한 역사의 희생자들에 주목하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쫓겨난 기억, 미군의 독일 여성 성폭행

지난 3월 라는 저서를 발간한 미리암 겝하르트에 따르면, 1945년을 전후해 점령지 독일에서 연합국 군인에게 성폭행당한 독일 여성의 수는 최소한 86만 명에 달한다. 길거리에서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집 안에 침입해 남자들을 쫓아낸 뒤 또는 심지어 가족이 있는 가운데 성폭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연합국 군인은 독일 여성을 일종의 전리품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정작 이 연구가 충격적이었던 것은 기왕에 알려진 소련군의 성폭행 사례를 넘어 독일 전역, 특히 미국 점령지에서 일어난 미군의 성폭행 사례를 소상히 밝혔기 때문이다. 먼저 이 연구는 소련군에게 성폭행당한 여성의 수를 ‘단지’ 50만 명에 그친 것으로 낮게 잡았다. 앞선 연구들은 소련군에 의한 성폭행 피해 여성을 200만 명으로 잡기도 했기에, 더 많은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다. 한편 겝하르트는 미군에 의한 성폭행 피해 여성을 19만 명으로 제시했다. 그는 사료 연구에 기초해 여러 사례를 소개했는데,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다. 미군 점령지의 일부 지역, 이를테면 뮌헨 근교 무스부르크라는 마을에서 독일 주민들은 미군을 위해 문 앞에 주거인의 나이와 성별을 적어두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 마을의 목사는 피해 여성을 병원에 실어다주거나 도피처를 제공해야만 했다. 그런데 성폭행 혐의로 군사법정에 서게 된 미군들은 한결같이 독일 여성이 거부하지 않았다고 발뺌했다.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또는 생존을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피해를 알리지 않았다. 게다가 독일 사회는 연합국 군인들의 성폭력 범죄를 문제로 삼거나 그것에 대항할 조직적 힘을 갖추지 못했다. 그 뒤에도 오랫동안 독일 사회는 그것에 대해 침묵했으며 집단적 기억 속에서 축출했다. 피해 여성들은 자신의 폭력 경험을 말하지 못한 채 전후 전범국가 독일의 ‘정상화’를 위해 ‘사적 불행’으로 여기며 감내해야 했다.

이 피해 여성들에게 1945년 5월8일이 ‘해방’이 아니었음은 당연하다. ‘해방군’에게 당한 폭력 경험은 그 ‘해방’의 더 큰 역사적 의미에 묻혀 갈 곳을 잃었다. 아울러 그것은 자칫 극우 정치집단의 선전 이데올로기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기에 역사가나 정치가들에게도 사실상 금기 사항이었다. 동독 지역은 소련의 지배가 관철되었고 서독 지역은 미국의 영향이 압도적이었기에 동·서독 양쪽에서 모두 잊힌 역사가 되었다.

영화 '알제리 전투'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격렬한 투쟁을 보여준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5월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세티프 지역에서 수만 명을 학살했다. 한겨레

영화 '알제리 전투'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격렬한 투쟁을 보여준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5월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세티프 지역에서 수만 명을 학살했다. 한겨레

한편 유럽 현대사에서 1945년 5월8일을 해방의 환희나 자유의 새 출발로만 기억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세티프 때문이다. 알제리 북부의 교통 요지였던 세티프와 인근 지역 주민 1만여 명이 아침부터 형형한 눈빛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격앙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인 5월1일 노동절 집회에서 식민 통치자인 프랑스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 또한 2차 세계대전 종결을 자신들의 역사로 갖고 싶었다. 그들은 집회와 시위를 통해 반파시즘 전쟁의 종결이 프랑스 식민 억압의 해방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외치며(“알제리를 아랍인들에게 돌려달라!”) 붉은 별과 반달 모양의 알제리 독립 깃발을 높이 들고 프랑스인들의 거주지로 행진했다. 프랑스 무장 경찰 20명이 시위를 해산하려고 다시 폭력을 행사했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그날 하루에만 28명의 프랑스인이 살해되었고 48명이 상해를 입었다. 그 뒤 일주일 동안 세티프의 이슬람계 주민 시위대는 프랑스인 주거지를 돌아다니며 100여 명의 유럽인을 살해했다.

긴급히 재무장한 프랑스인들은 더 참혹하게 복수했다. 프랑스군과 지역 자위대는 알제리인 거주 마을에다 수류탄과 박격포를 무차별하게 퍼부었다. 주검은 불태워졌고 시위에 가담하거나 저항 의지를 드러낸 알제리 주민들은 처참하게 고문당했다. 프랑스인들의 알제리인 사냥은 5월22일까지 계속되었다. 생존 알제리 주민들은 프랑스 깃발 아래 무릎을 꿇는 모욕을 당했고 일부는 다시 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아직까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는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대략 1만5천 명에서 4만5천 명의 알제리 주민이 프랑스의 폭력에 희생되었다고 한다.

수만 명 알제리인 학살한 프랑스군

그리하여 알제리인들에게 1945년 5월은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폭력의 시작일 뿐이었다. 프랑스는 이 사건을 빌미로 냉혹한 식민 통치를 더 강화했다. 애초 이 학살의 발단은 프랑스가 2차 대전 중에 알제리인들에게 제시한 약속, 즉 북아프리카의 연합군 작전에 참여하면 해방으로 보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었다. 아프리카 상륙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1944년 6월 파리가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되었음에도 프랑스는 알제리에 원래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알제리인들의 희망과 기대는 서서히 절망과 분노로 바뀌어갔다. 이런 분노는 알제리들 대다수가 공유하고 있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정치적으로 훨씬 각성된 세티프 지역 주민들의 분노는 1945년 5월1일의 시위 진압을 계기로 행동으로 표출할 만큼 극도로 고조되었다. 1945년 5월의 세디프 학살은 알제리인들의 기억에 깊은 그림자를 남겼고 트라우마였다. 그것은 1954년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결성을 촉진했고, 그 뒤 8년 동안 결사 항전의 원천적 동력이 되었다. 반면 영화 가 잘 보여주었듯,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할 때까지 프랑스는 수십만 명의 무장 병력을 알제리에 파견해 살해와 고문, 성폭행을 일삼았다.

그렇게 역사는 뒤틀렸고 기억은 충돌한다. 1945년 5월은 알제리인들에게 해방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학살의 나날들이었다. 반면 1945년 5월 프랑스는 반파시즘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며 몸으로 춤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식민지에서 해방 요구를 짓밟으며 피로 강을 만들었다. 나치즘의 만행에 서구 세계는 치를 떨었지만, 그 ‘해방’의 날에 자행된 연합국의 일원 프랑스의 세디프 학살은 프랑스인들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인들의 기억에도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1962년까지 지속된 알제리의 민족해방 투쟁에서 서독과 미국 등은 프랑스를 지원했고 식민지인들의 고통에는 어떤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서 역사는 손쉽게 정리되었고 머릿속에서 불편한 기억은 사라졌다. ‘해방자’는 자신의 신화를 만들었고 또 다른 해방의 요구를 시궁창에 집어던졌다. 1845년 5월 세계는 다시 갈렸는데, 흔히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적 냉전 대결이 아니었다. 식민지 해방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2015년 5월 그것에 대한 기억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유럽에서도 세디프 학살을 기억하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다.

해방 아래 갇힌 기억을 열어라

1945년 5월은 유럽 현대사에 자유와 해방, 귀향과 해후의 시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 점령과 병합, 성폭행과 학살, 추방과 억압의 시간이었다. 이 이질적인 역사와 기억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한 편의 찬연한 역사를 내세워 고통스러운 기억을 말살하거나 파괴적 역사를 빌미로 일정한 성취에 대한 기억을 상대화하는 것 모두 불편하다.

종전 70년, 세계는 더욱 밀접해지고 삶은 빠르게 뒤섞인다. 긴밀히 연루되는 ‘하나의 세계’ 속에서 이질적인 경험과 기억들은 더 자주 만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일방적인 역사 인식으로 타자의 기억을 누르며 ‘통합’을 내거는 게 아니다. 같은 날 기쁨을 분출한 사람들과 슬픔을 짓눌러야 했던 사람들 사이에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이때 필요한 것은 기억을 마구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의 근간에 놓여 있는 공통된 역사의 끈을 자각하는 것이다. 기억과 역사의식의 통합을 내세워 타자의 기억을 배제하거나 역사적 진실(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개별 인간들의 구체적 경험을 집단적 역사의식의 획일화로 밀어낼 수도 없다. 궁지로 몰린 개별 인간들의 몸과 마음에 짙게 내린 폭력 경험과 고통, 불안을 집단적 역사 서사로 충분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과 폭력은 일시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낳지만 모두에게 혼돈과 무책임, 신뢰 상실의 장을 연다. ‘해방’의 서사를 다듬는 게 아니라 그것에 갇힌 기억과 경험을 역사가 더 열어야 할 것이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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