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합법화’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낙태 합법화한 미국 대법원 ‘로 대 웨이드’ 판결 40년… 각 주에서 낙태 금지 노린 법규 통과돼 낙태 시술 병원 크게 줄어

제947호
2013.01.31
등록 : 2013-01-31 16:44 수정 : 2013-01-31 23:24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헌법 제10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로써 모든 국민이 국가권력으로부터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근대국가의 헌법이 거의 예외 없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 바로 ‘자기결정권’ 말이다.  

2011년 92건, 2012년 42건 통과돼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밖에서 생존이 가능한 시기에 이르기 전까지, 임신한 여성은 어떤 이유로든 임신 상태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권리가 있다.” 1973년 1월22일 미국 대법원은 낙태와 프라이버시권에 관한 분수령이 된 이른바 ‘로 대 웨이드’ 사건에서 이렇게 판결했다. 이로써 낙태를 금지 또는 제한했던 각 주 정부의 법률과 연방법이 모두 폐기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낙태가 허용된 지역은 18개 주에 불과했다. 워싱턴·알래스카 등 4개 주에선 전면적으로, 캘리포니아·플로리다 등 14개 주에선 부분적으로 합법화했다. 나머지 32개 주에선 낙태가 원칙적으로 불법이었다. 낙태를 원하는 여성은 위험을 무릅쓰고 ‘뒷골목 시술원’을 찾거나, 아예 낙태가 허용된 지역을 찾아 주 경계를 넘어야 했다. 21살의 나이에 셋째아이를 갖게 된 제인 로(본명 노마 매코비)가 인권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텍사스주 댈러스 카운티 지방검사 헨리 웨이드를 상대로 소송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꼭 40년 전의 일이다.

낙태 합법화의 상징이던 매코비가 열성적인 반대론자로 돌아설 정도로 세월이 많이 흘렀다. 대법원의 판결 직후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미국 내 낙태 시술 건수는 1980년대 정점에 다다른 이후 줄곧 ‘하향 안정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낙태에 대한 여론도 갈수록 ‘우호적’으로 바뀌는 모양새다. 미 과 <월스트리트저널>이 공동으로 실시해 1월22일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70%가 ‘로 대 웨이드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뒤집혀선 안 된다’고 답했다. 사상 가장 높은 수치란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퓨리서치센터가 1월16일 내놓은 조사 결과도 엇비슷했다. 응답자의 63%가 ‘낙태를 합법화한 대법원의 결정이 뒤집혀선 안 된다’고 답한 게다. 흥미로운 건, 30살 이하 젊은 층 가운데 ‘로 대 웨이드 사건이 낙태 합법화와 관련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가 절반에도 못 미치는 44%에 그쳤다는 대목이다. 응답자의 53%는 ‘다른 사회·정치적 주제와 견줘, 낙태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단다. <워싱턴포스트>가 1월22일 인터넷판에서 “정치공학적으로만 따져도, (지난해 11월 대선 때 쟁점화를 시도했던) 공화당은 더 이상 낙태 문제를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고 꼬집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다. 어째 수상하다. 최근 몇 년 새 미 전역에서 낙태 시술이 가능한 병·의원 수가 급격히 줄고 있단다. 수적으로만 따지면, 1973년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 당시보다 되레 적어졌단다. 원인이 뭘까? 미 여성 건강권 전문 싱크탱크 ‘거트마커 연구소’는 지난 1월2일 내놓은 최신 자료에서 “2011년 미 50개 주 전역에서 사실상 낙태 금지를 노린 자치법규 92건이 통과된 데 이어, 2012년에도 비슷한 법안이 42건이나 통과됐다”고 지적했다.

‘낙태 불법화’ 위한 치밀한 사전작업


낙태 반대 진영의 ‘반격’에도 법적 근거는 있다. 1992년 6월29일 미 대법원이 ‘미 가족계획협회 펜실베이니아주 남동지부 대 케이시’ 사건에 대해 내린 판결 때문이다. 민주당 출신임에도 열렬한 낙태반대론자였던 로버트 케이시 당시 주지사가 마련한 낙태 시술을 어렵게 만드는 다양한 ‘걸림돌’의 위헌성을 따진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엇갈리는 판단을 내렸다. ‘로 대 웨이드’ 사건 판례에 따라 ‘낙태 합법화’란 원칙은 유지하되, 여성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각 주 정부가 낙태 규제 조항을 자체적으로 마련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게다. ‘지나친 부담’의 범위는, 각 주 정부가 정하면 그만이었다.

거트마커 연구소가 펴낸 최신 정책보고서(2012년 겨울호)를 보면, 각 주 정부의 낙태 반대 입법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뤄진다. 먼저 ‘수요자 측면’이다. 낙태 시술을 받는 데 필요한 과정을 최대한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게다. 시술 대기 기간을 길게 잡거나, 낙태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줄 수 있는 상담을 필수 절차로 끼워넣는다. 공공 의료보장 사업은 물론 민간 의료보험 약관에도 ‘낙태’를 비급여 항목으로 명문화하는 것도 낙태를 어렵게 만드는 주요 수단이다.

주로 낙태 시술을 제공하는 병·의원의 시설·위생 기준을 대폭 강화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뤄지는 ‘공급자 측면’의 공세도 만만찮다. 2011년 낙태를 포괄적으로 제한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법안이 통과된 펜실베이니아주의 상황이 대표적이다. 법안 통과로 외과적 낙태 시술이 가능한 병·의원에는 시술과 직접 관련이 없는 값비싼 의료장비 보유와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종합병원급’ 편의시설 설치가 의무화했다. 건물 내부의 통로도 넓혀야 했고, 주차공간도 과도할 정도로 충분히 확보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법안 통과 이전까지 외과적 시술을 해주던 병·의원 22곳 가운데 8곳이 시술을 포기했단다.

“낙태 합법화 이후 지금처럼 불안감이 커진 적이 없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월14일치에서 낙태 클리닉 관계자의 말을 따 “각종 규제 조처가 잇따라 강화돼 언제까지 외과적 시술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낙태 합법화 초기보다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고 전했다. 2008년까지만 해도 펜실베이니아주에만 낙태 시술이 가능한 의료시설이 모두 50곳이나 됐단다.

낙태 문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사그라지는 새, 반대론 진영은 ‘낙태 불법화’를 위한 치밀한 사전작업을 벌이고 있다. 진보적 인터넷 매체 <머더존스>의 보도를 보면, 이미 4개 주에서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사건 판례를 번복하는 즉시 낙태를 불법화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법안을 통과시켜둔 상태다. 13개 주에선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 이전에 시행했던 사문화한 낙태금지법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단다.

대법관 1명 바뀌면 낙태 ‘불법’ 될 수도

낙태 문제는 미국 사회에서 진보(찬성)와 보수(반대)를 가르는 리트머스시험지 노릇을 해왔다. 40년 전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 당시 미 대법원의 선택은 ‘7 대 2’로 갈렸다. 현 미 대법관 9명의 성향을 굳이 따지자면,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포함한 보수파가 4 대 5로 열세다. 대법관 1명이 바뀌면, ‘로 대 웨이드’ 사건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다. ‘낙태 합법화’는 끝난 싸움이 아니란 얘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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