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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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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아배의 아배도’ 총리였던 세습정치

등록 2012-11-23 10:20 수정 2020-05-02 19:27

2012년은 유난히 권력 교체가 많은 해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했다. 중국은 시진핑 시대가 막을 올렸다. 12월 대선을 앞둔 한국, 그리고 연말에 국회 해산과 총선이 예상되는 일본을 더하면 동북아 관련 주요 국가가 모두 권력 교체를 맞이하는 셈이다. 이에 지난해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북한, 1월 선거를 통해 다시 집권에 성공한 마잉주 총통의 대만, 그리고 3월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당선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동북아는 지난 1년 동안 선거와 권력 교체로 들끓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이니 큰 의미를 부여할 것까지는 없다. 사실 누가 당선돼도 체제 그 자체의 혁명적 변화가 예상되는 것은 아니니 권력 교체에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고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냉소적인 시선도 있다. 하지만 후일에 2012년은 어떤 ‘가능성’이 있었던 해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이런 시선의 옳고 그름은 제쳐두고 조금은 다른 시선에서 권력 교체 문제를 살펴보자.

일찍이 세습 정치인의 만남이 있었다. 2004년 9월, 서울 염창동 한나라당 당사에서 박근혜 대표가 당시 일본 자민당 아베 신조 간사장과 만났다. 지금 이들은 양국에서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한겨레 김경호기자

일찍이 세습 정치인의 만남이 있었다. 2004년 9월, 서울 염창동 한나라당 당사에서 박근혜 대표가 당시 일본 자민당 아베 신조 간사장과 만났다. 지금 이들은 양국에서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한겨레 김경호기자

김정은, 시진핑, 박근혜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치의 ‘세습’이라는 현상이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아들이다. 시진핑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고생을 거듭해 자수성가형 정치인의 풍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아버지 또한 혁명 원로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까지 지낸 인물이다. 마잉주의 아버지 마허링은 국민당 핵심 당원으로 장제스 총통의 경호원과 국민당 타이베이시당 부위원장을 지낸 당 간부였다. 일본의 차기 총리로 점쳐지는 아베 신조는 더 화려하다. 할아버지는 중의원 의원을, 외할아버지와 숙부는 각각 총리를, 아버지는 중의원 의원과 외상을 지냈다. 동생은 중의원 의원이고, 부인은 대기업 사장의 딸이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다. 만일 일본에서 아베 신조가, 한국에서 박근혜가 집권한다면, 동북아시아는 모두 세습정치가가 ‘점령’하는 꼴이 된다.

세습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한 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이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고 세습의 형태도 제각각이니 이들 정치가를 모두 세습이라는 범주로 묶어내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2세 정치가’로 묶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세습이든 2세 정치든 이런 현상이 동북아에서 앞다퉈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12월 대선을 겨냥해 “동남아형 2세 승계정치”가 한국에서도 나타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지만, 사실 엄밀하게 보면 ‘2세 정치’가 작동하지 않은 지금까지의 한국이 예외이지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에서 이미 ‘2세 정치’는 일반적이다.

일본의 세습정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1980년 이후 일본은 현 총리까지 포함해 모두 19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이 중 무려 12명이 세습의원이다. 자민당 출신 총리 16명 중 11명이, 민주당 출신 총리 3명 중 1명이 세습의원이다. 현재 국회의원 중 세습의원 비율은 대체로 4명 중 1명꼴이다. 자민당의 경우는 거의 2명 중 1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습의원은 국회의원 출신의 아버지를 둔 국회의원이라는 뜻이니, 세습의 의미를 좀더 확대해 지방의원이나 자산가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은 한없이 늘어날 것이다. 미국은 2007년과 2008년 통계를 보니 세습의원이 상·하원 모두 5% 정도다. 영국은 귀족원에 세습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지만 하원의원은 5% 미만이다. 중국공산당 고급 간부 중 ‘태자당’은 3% 정도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일본에선 아버지가 국회의원이 아니면 국회의원이 될 수 없고 나아가 총리는 꿈도 꿀 수 없는 셈이다.

물론 이런 현상에 대해 억울하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심판을 거쳐 당선됐으니 아버지·할아버지가 국회의원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를 세습으로 묶어낼 수 없다는 소리다. 형식논리로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유권자의 투표를 거쳐 국회의원 혹은 총리라는 권력이 승계되기 때문에 문제가 더 고약하다고 할 수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유독 권력의 대물림 심한 이유

왜 ‘선진국’ 일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문화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방법도 있다. 일본에선 창업 100년 이상의 기업이 10만 개에 달하고 200년 이상의 기업도 무려 3천 개가 넘는다. 이를 흔히 ‘시니세’라 한다. 또 가부키 등 전통 예능이나 스모 같은 특수한 기능을 필요로 하는 세계에서는 이른바 ‘대물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부모의 숙련된 기능과 역사를 대대로 물려받는 일본의 문화적 전통을 한국에선 흔히 ‘장인정신’이라 표현하지만 사실 이런 세습 현상의 원인을 온전히 문화적 장인정신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먹고살 수 없다면 세습은 있을 수 없고, 상속세나 증여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으면 세습은 일어나지 않는다. 상속세 등을 감당할 수 있고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 때 ‘기회비용’을 지불하고도 남을 만큼 벌이가 가능하지 않으면 상속도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시니세도 있을 수 없다. 계속되는 불황 탓에 문을 닫는 시니세가 늘어나 ‘시니세 도산’이라는 말이 최근에 유행하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은 정치가를 포함해 모든 영역에서 세대 간 직업 승계가 일어나는 세습의 천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전후 일본은 서구 사회와 비교했을 때 세대 간 직업 이동 수준이 높은 사회다. 계층적 지위가 세대 간에 계승되는 경우도 서구 사회와 비교해 적은 편이다. 그래서 특정 직업이 계층 형성의 계기가 되는 경우도 비교적 적었고, 세대 교체시 직업 간 이동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도쿄대 이시다 히로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양극화가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에도 세대 간 직업 이동에서 유의미한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속된 말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 유동성이 현대 일본의 역동성을 지탱해왔다. 그렇다면 시니세나 가부키 같은 기능 집단이나 정치가의 대물림은 높은 사회 유동성과는 전혀 다른 흐름이다. 전체적으로는 사회 유동성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일부 직업에서 세습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니세 등의 대물림은 특수 기능의 대물림이지 권력의 대물림은 아니다. 권력의 대물림이 있다 해도 한정된 영역에 그친다. 정치가의 세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온전히 권력 그 자체의 대물림이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부모의 빛은 일곱 개의 빛(七光)”이라는 속담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일곱 개’란 무수히 많다는 뜻이다. 권력을 부모로부터 아이가 물려받는 일종의 권력 세습 현상을 빗대는 말이다. 이를 한번 비틀어 생각해보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되고 또한 ‘개천에서 용 날 수 없음’을 빗대는 말이 되기도 한다.

‘산반’ 물려받아 정치개혁 어려워

그렇다면 권력 세습은 일본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일본의 선거에서 이기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지반·간판·가방이다. 이를 모아 ‘산반’(三バン)이라 한다. 지반은 후원회 조직을 포함한 지역 지지 기반을, 간판은 지명도를, 가방은 돈을 뜻한다. 세습정치가는 이 점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아버지가 관리했던 지역구의 산반을 그대로 물려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반은 세습의원을 빗대 사용하는 말이다. 지역구 의원에 세습의원 비율이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정치자금법 등의 문제도 있다. 정치자금 관리단체나 정치단체는 상속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지역구를 물려받은 2세 정치가는 아버지가 관리했던 정치단체 등을 통째로 물려받게 된다. 지역 유지들도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2세 승계’를 환영한다. 표와 정치헌금을 대가로 자신의 지지 기반인 특정 지역과 특정 이익집단에 정책적 편의를 꾀하는 전형적인 이익유도정치(Pork Barrel)다.

이렇다 보니 선거는 거의 하나 마나다. 신규 진입을 가로막는 대기업의 독과점과 같다. 정치시장은 언제나 그 밥에 그 나물이다. 하지만 세습정치의 심각성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아버지의 정치이념도 계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이 어려워진다. 아버지를 승계한 2세 정치가가 개혁을 부르짖는 것은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이 이는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민당의 장기 집권은 이익유도정치를 지탱하는 세습정치와 이를 통해 승계되는 이념 세습의 결과물이다. 1990년대 사회당의 몰락과 민주당의 출범은 한편에서 이익유도정치의 위기를 뜻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자민당식 동시에 세습정치와 그 이념이 민주당으로 전염될 가능성도 뜻한다.

근대사회에서는 사회 유동성이 크기 때문에 대체로 부모에 비해 자식들의 학력 수준이 높으며 선택 가능한 직업도 다양한 게 특징이다. 거의가 농사꾼에 자영업자였던 부모 시대에 비해 자식 세대는 대부분 월급쟁이다. 세대 간 직업 이동이 광범위하고 격렬하게 일어났다는 증거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선 근대만큼 사회 유동성이 높지 않다. 아버지와 자식의 직업 사이에 세대 간 직업 이동의 가능성이 점차 적어진다. 그래서 권력·재산·소득의 위계는 현재이면서 미래이기도 하다. ‘9회말 역전’이나 ‘개천에서 용 날’ 가능성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바늘구멍’이다. 바늘구멍을 뚫은 사례는 미담으로 장식돼 위계질서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마취’시킬 뿐이다. 박근혜 지지자들이 박근혜에게서 박정희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아베 신조 지지자들은 아베에게서 그의 선친이 지탱한 ‘행복했던 고도성장기’의 향수를 떠올린다.

정치이념도 유사한 아베와 박근혜

이런 의미에서 박근혜와 아베 신조는 유사한 정치이념의 보유자라는 점 이외에도 세습정치의 계승자라는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에서 연말에 벌어지는 권력 교체는 이념의 문제이자동시에 이와 연동된 세습정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아베 신조의 집권 가능성이 큰 일본의 앞날이 더 어둡다. 더구나 아베 신조의 경쟁자인 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 현 총리,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 그리고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 모두 정치이념상 아베 신조와 다름없는 ‘그 밥에 그 나물’이니 고민은 더 깊어진다. 유권자들은 ‘마취’에서 깨어나서야 위계의 밑바닥에 있는 자신의 변함없는 위치를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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