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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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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냐 암초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본은 섬, 중국은 암초라고 주장하는 오키노토리
300억엔짜리 인공섬,
최근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 결정은?
등록 2012-09-21 06:08 수정 2020-05-02 19:26

영토·인민·권력. 이 세 가지가 근대국가의 요소라는 것은 19세기 독일의 법학자 옐리네크를 들먹이지 않아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전근대 시대의 자연공동체가 그대로 근대국가 형태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이래의 ‘인공적’인 폭력이 자연공동체를 파괴하거나 이를 재편하는 과정을 반드시 동반하며 근대국가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생활공동체가 국경에 의해 갑자기 나뉘기도 하고 혹은 전혀 이질적인 공동체가 합쳐져 단일국가로 통합되기도 한다. 지도책을 보다 보면, 마치 잣대로 그어놓은 것 같은 국경선을 볼 수 있다. 몇천km나 떨어진 곳에 영토를 가진 나라도 쉽게 볼 수 있다. 근대국가가 제국주의의 폭력에 의해 얼마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이나 민족해방전쟁 등으로 국경선이 재구성되기도 했지만 현재의 국경선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기본 골격에 다소 덧셈·뺄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오키나와 유학생은 류큐 유학생
지금 일본이 주장하는 자국의 영토 면적은 37만7915㎢, 세계에서 62번째다. 한국의 4배에 가깝고 남북한을 다 합친 면적의 1.5배가 넘는다. 일본의 영토 길이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무려 3264km다. 한반도의 길이가 약 1천km이니 약 3배 더 길다. 또 해안선은 세계에서 가장 길다.
그런데 영토 면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배타적 경제수역의 넓이다. 1982년 국제해양법조약(1996년 정식 발효)이 배타적 경제수역을 규정한 이후, 각국은 연안에서 200해리(약 370km) 범위 내의 수산자원 및 광물자원에 대해 독점적인 권리를 갖게 되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답게 일본의 배타적 경제수역의 넓이는 영토 면적의 12배가 넘는다. 세계에서 6번째로 넓다.
일본 쪽이 주장하는 일본 영토의 동쪽 끝은 ‘미나미토리’다. 행정구역상 도쿄도 오가사와라촌에 속해 있지만 도쿄에서 무려 1879km, 오가사와라에서는 1220km나 떨어져 있다. 면적은 1.51km²로 아주 작다. 무인도지만 자위대가 있다. 1864년 미국 배가 발견해 마커스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본 영토에 편입된 것은 1898년이고 이때 일본 정부가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서쪽 끝은 오키나와의 ‘요나구니’섬이다. 오키나와의 현청 소재지인 나하에서 510km나 떨어져 있지만 대만까지는 111km이니 생활경제권은 대만과 더 가깝다. 원래 류큐왕국에 속해 있다가 18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될 때 일본 영토가 되었다. 지금 중국과 영토분쟁 중인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에 인접해 있다.
가장 북쪽은 홋카이도 위에 있는 ‘에토로후’다. ‘곶이 있는 장소’라는 선주민족 아이누 말에서 유래했다.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 일본 영토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러시아가 실효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남쪽은 ‘오키노토리’다. 1931년 일본이 영유를 선언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일본이 자국 영토라 주장하는 국경선과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가 메이지유신 이후에 만들어진 영토 범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영유권 분쟁이 일어난 센카쿠 외에 일본이 중국·대만과 갈등을 빚고 있는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오키나와다. 지난 7월 중국군 고위 장교가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해 일본 내에서 반중 여론이 악화된 적이 있다. 이 장교의 발언과 일본의 반발은 사실 새삼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중국과 대만이 오키나와가 일본 영토라는 사실을 인정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대만 공항에서는 오키나와행 비행기를 류큐행으로 표시한다. 대만에 있는 오키나와 출신 유학생은 일본인 유학생이 아니라 류큐 유학생으로 분류된다. 중국과 대만에 일본 영토 오키나와는 여전히 ‘독립국가’ 류큐다. 중국이나 대만은 오키나와가 ‘중국 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일본 땅’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오키나와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는 오키나와가 일본 땅에 편입된 이래 중국 쪽이 취한 일관된 태도다. 그래서 오키나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에 망명해 오키나와 독립운동을 펼친 적도 있다.

일본 면적만큼 배타적 경제수역 확보
일본이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가 바로 일본 영토의 남쪽 끝에 자리한 ‘오키노토리’다. 일본 정부는 이곳의 면적이 1.5㎢라 하고 있지만 이는 바다에 잠긴 산호초 면적까지 포함한 넓이고 실제로는 만조 때 두 개의 바위가 겨우 10~20cm 정도 고개를 내밀고 있을 뿐이다. 지형적으로는 섬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작다. 오키노토리가 일본 땅으로 편입된 것은 1931년 내무성 고시를 통해서다. 이때부터 오키노토리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앞바다의 새’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이곳에 새가 살고 있지는 않다. 16세기에 스페인 배가 발견해 ‘파레세 벨라’(Parece Vela·돛 같은 모양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그리고 1789년 영국인 윌리엄 더글러스가 발견했다 해서 ‘더글러스 암초’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곳이 일본 땅으로 편입된 데는 역사적인 경위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독일이 전쟁에서 지자 일본은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연합국 자격으로 독일의 해외 식민지의 일부를 위임통치하게 되었고 서태평양 적도 부근의 미크로네시아 지역에 퍼져 있는 섬들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한다. 지금의 북마리아나제도, 파라오, 마셜제도, 미크로네시아 연방 지역이다. 이를 일본에선 당시 ‘남양제도’(南洋諸島)라 불렀다. 그리고 이곳을 거점으로 서태평양 부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데, 1922년 일본의 측량선이 오키노토리를 ‘발견’했고 1931년 일본 땅으로 편입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조약으로 일본이 독립한 이후에도 이곳은 미국의 지배권하에 놓여 있다가 1968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오키노토리는 도쿄에서 1700km나 떨어져 있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미나미토리섬과 마찬가지로 도쿄도에 속해 있다. 1천km 떨어진 미국령 괌에서 더 가깝다. 인접 연안국도 없으니 일본을 제외하면 이곳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나라도 없다. 중국도 물론 일본의 영유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일본은 이곳을 ‘오키노토리섬’(沖の鳥島)이라 하고 중국은 ‘충즈냐오자오’(沖之鳥礁)라 한다. 한자를 자국식 발음으로 읽는 것은 한자문화권에서 늘상 있는 일이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곳을 일본은 ‘섬’이라 하고 중국은 ‘초’(암초)라고 하는 데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은 이 점에 있다. 섬이라면 배타적 경제수역이 인정된다. 암초라면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키노토리를 둘러싼 중-일 갈등은 배타적 경제수역을 둘러싼 대립이다. 일본 처지에서는 겨우 침대 한 개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작디작은 이곳이 섬으로 인정되면 일본 영토와 맞먹는 넓이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해양법상 이곳이 섬으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군사적 가치, 중국 봉쇄 효과
해양법 조약은 121조 1항에서 ‘섬’을 “자연적으로 형성된 육지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되 만조시에도 수면 위로 나와 있어야 한다”로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오키노토리는 ‘섬’일 수 있다. 그런데 121조 3항에는 “사람이 거주해 독자적으로 경제생활을 할 수 없는 바위는 배타적 경제수역이나 대륙붕을 가질 수 없다”고 돼 있다. 3항의 기준에 따르면 오키노토리는 바위다. 따라서 배타적 경제수역이나 대륙붕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사람이 독자적으로 생활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섬으로 만들려고 일본 정부는 1988년 무려 300억엔을 투입해 공사를 감행한다. 수면 위로 약간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콘크리트로 둘러싸는 공사를 한 것이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일본국’이라는 한자를 새겨넣었다. 사실상 ‘인공섬’을 구축한 것이다. 해양법조약 60조 8항에는 “인공섬, 시설 및 구축물은 섬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 영해를 가지지 못하며 배타적 경제수역이나 대륙붕의 경계 획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돼 있으니 콘크리트 공사가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오키노토리=섬’이라는 논리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키노토리=섬’을 주장하고 중국이 이에 반발하는 것이다.
사실 이곳이 섬이 아니라는 것, 즉 암초라는 것은 1931년 영유권 선언을 할 당시 이미 일본도 의식하고 있었다. 현재 외무성 외교사료관에는 1931년 영유권 선언 당시의 오키노토리에 관한 공문서가 남아 있다. 영유권 선언 직전에 당시 내무성 장관이 총리에게 보낸 공문서에는 이 “고립된 암초”를 ‘오키노토리섬’으로 명명해 도쿄도 소관으로 한다고 하면서도 “수면 밑으로 거의 가라앉는 산호초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점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암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영유권 선언을 단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당시 일본 정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군령부 내부에서는 이 산호초의 안쪽이 파도가 잔잔하기 때문에 수상비행기의 기지로 이용 가능하다는 의견이 있어 군사상의 견지에서 이 산호초의 영유권을 확정하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말하는 군령부란 해군참모본부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오키노토리의 일본 편입은 온전히 군사적 목적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도 기본은 다르지 않다. 물론 해양자원 및 광물자원의 잠재력도 중요하지만 일본이 ‘오키노토리=섬’을 주장하고 이에 미국이 침묵을 지키는 까닭은 이곳이 지닌 군사적 가치, 즉 태평양 쪽으로 군사적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중국 쪽을 봉쇄하는 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중과 일본, 같은 내용 다른 해석
올해 들어 오키노토리 문제에 다소 변화가 생겼다. 일본은 2008년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CLCS)에 오키노토리를 포함한 주변 해역 71만km²를 대륙붕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과 중국은 이에 반대했다. 그런데 올해 4월 유엔의 대륙붕한계위원회가 오키노토리를 암초가 아닌 ‘섬’으로 보고 31만㎢를 일본의 대륙붕으로 인정했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일본의 ‘승리’다. 그런데 중국과 한국은 대륙붕한계위원회가 일본 쪽의 요청 중에서 오키노토리를 제외한 31만km²에 대해서만 일본의 신청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렸다고 반론을 폈다. 사실상 일본의 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침대 한 칸 넓이의 바위를 둘러싼 분쟁은 19세기 이래의 제국주의 시대가 그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현재의 군사적 안전보장 문제가 이를 키우고 있다.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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