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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은 꺼져라 푸시라이엇이 이긴다

푸틴 비판 동영상 통해 유명해진 러시아 페미니스트 밴드 푸시라이엇 멤버 3명 구속 재판에 당당… 폴 매카트니, 마돈나, 오노 요코 등 지구촌 지지 물결에 러시아 거리엔 복면 넘쳐날 태세
등록 2012-08-25 06:14 수정 2020-05-02 19:26

‘크람 크리스타 스파시텔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중심가, 크렘린이 바라다보이는 강둑 위에 ‘구원자 예수 대성당’이 있다. 러시아 정교회 소속 성당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19세기 말에 건축됐던 이 성당은 1931년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폭파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한 직후부터 국민 모금을 통한 재건축이 추진돼 2000년 8월 완공됐다. 성당 안에선 사진 촬영조차 금할 정도로, 러시아정교회가 애지중지하는 곳이다.

“주교님께선 푸틴을 믿으시네. 제기랄”
지난 2월21일 밤, 그곳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빨강·초록·노랑 등 원색 원피스 차림에 복면을 한 여성 네댓 명이 성당 안에서 발길질을 하며 날뛰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연신 성호를 긋기도 했다. 다른 한켠에서 성화가 그려진 벽면을 배경으로 또 다른 이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댔다. 이날의 ‘소동’을 고스란히 담은 동영상은 뮤직비디오로 제작돼 ‘유튜브’에 올려졌다. 성당 경비원에게 끌려나오기까지 이어진 ‘소동’은 1분 남짓에 불과했다. ‘푸시라이엇’이란 이름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 발단이었다.
푸시라이엇은 러시아 페미니스트 7명이 모여 지난해 결성한 펑크록 밴드다. 1990년대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페미니스트 펑크그룹 ‘라이엇걸’에서 ‘영감’을 얻었단다. 이들은 결성 직후부터 주로 얼굴에 복면을 한 채,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에 대해 과감한 즉흥 공연을 펼쳐 눈길을 끌어왔다. 란 제목을 붙인 2월21일 ‘구원자 예수 대성당’ 공연에서 부른 노래 가사를 들여다보면, 이들의 ‘성향’을 어렵잖게 가늠해볼 수 있다. “성모여, 동정녀 마리아여. 푸틴을 몰아내소서. 이런 젠장, 젠장, 젠장. 주교님께선 푸틴을 믿으시네. 제기랄, 차라리 신을 믿는 게 나을 텐데.”
한바탕 소동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사건이 커지게 된 사건은 3월3일 벌어졌다. 푸시라이엇 멤버 2명이 ‘난동’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게다. 이튿날인 3월4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선 블라디미르 푸틴 후보가 63.6%의 지지율로 1차 투표에서 무난히 당선됐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사건은 계속 커져갔다. 3월16일 또 한 명의 푸시라이엇 멤버가 같은 혐의로 붙들린 게다.
이른바 ‘잠정 구금’ 상태로 조사를 받던 이들이 정식으로 기소된 건 지난 6월4일이다. 당시 등 외신들은 “검찰이 내놓은 공소장이 무려 2800쪽에 이른다”고 전했다. 죄명은 ‘종교적 증오심에 기초해 조직적으로 저지른 계획적 집단 난동 사태’였다. 러시아 형법이 정한 형량은 최대 징역 7년이란다. ‘3명의 피고인’에 대한 안팎의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모아 정리한 그들의 이력을 살펴보자. 마리아 알료히나(24)는 저널리즘과 문예창작을 전공하는 대학교 4학년생이다. 그린피스 러시아 지부를 비롯한 환경·인권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기도 했단다. 예카테리나 사무체비치(30)는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많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다. 대학에선 사진과 멀티미디어를 전공했단다. 마지막으로 나데즈다 톨로콘니코바(22)는 철학도다. 민주화 시위에 적극 가담해왔고, 거리공연에도 열정을 보여왔단다. 21세기 러시아를 살아가는 평범한 청춘들이다.
기소 한 달 만인 지난 7월4일 재판을 맡은 모스크바의 하모브니키 지방법원 형사부 마리나 시로바 판사는 피고 쪽에 “5일 안에 변론 준비를 마치라”고 통보했다. 주말을 끼고 있으니, 사실상 사흘을 준 셈이다. 3명의 피고인은 이에 항의해 곧바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7월21일 시로바 판사는 이들의 ‘기소 전 구금 기간’을 6개월 연장했다. 이무렵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이들을 ‘양심수’로 규정했다.

“나는 당신들이 두렵지 않다”
첫 재판은 7월30일 열렸다. 이미 전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된 터다.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지난 8월9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피고인 모두에게 3년형을 구형했다. 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모스크바 각급 법원에서 처리된 형사사건은 모두 3만5626건이다. 이 가운데 무죄판결이 난 사건은 단 0.7%(239건)에 그쳤다. 그럼에도 이날 법정에서 취재하던 기자들을 통해 트위터로 속속 타전된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이 재판은 러시아 정부 자체에 대한 심판이다. 개인에게 가혹하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지독히 무관심한 바로 그 정부 말이다. 정부가 기어이 3명의 젊은 여성을 감옥에 가두기로 결정한다면, 이는 그들이 진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나데즈다 톨로콘니코바)
“우리는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있다. 당신들은 검열관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입을 열 수 있다. 누가 더 자유로운가?”(예카테리나 사무체비치)
“우리는 죄가 없다. 전세계가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나는 당신들이 두렵지 않다. 거짓과 조작도 두렵지 않다. 이 말뿐인 법정에서 내려질 판결도 두렵지 않다. 수많은 이들이 이 재판에 대해 읽고, 재판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는 살아남을 것이다.”(마리아 알료히나)
푸틴 대통령은 총리 시절이던 2008년 11월15일 영국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만난 자리에서 “러시아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비틀스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성장했다”며 “개인적으로 몇 년 전 폴 매카트니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고 말한 바 있다. 푸시라이엇의 선고공판을 이틀 앞둔 지난 8월16일 매카트니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렸다.
“나디야, 카티야, 그리고 마샤에게.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당신들을 지지한다는 점을 밝히고자 이 글을 씁니다. …나를 비롯해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들과 예술의 자유를 지지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란 점을 알아주리라 믿습니다.”

“모두가 푸시라이엇이 되자”
마돈나와 오노 요코를 비롯해 케이트 내시, 레드핫칠리페퍼스, 스팅, 펫숍보이스 등 이미 수많은 유명인들이 이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결심공판을 앞두고는 녹색당·기민당·사민당 소속 독일 연방의회 의원 121명이 블라디미르 그니닌 독일 주재 러시아 대사에게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취임 이후 재야 세력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온 푸틴 대통령은 이번 사건으로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많아 보인다.
“복면을 쓰고 거리로 나서라. 일터로 가라. 쇼핑을 가라. 극장에 갈 때도 복면을 쓰자. 모두가 푸시라이엇이 되자.” 은 8월13일 투옥되지 않은 푸시라이엇 멤버들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지난 5월 취임한 푸틴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이다. 연임도 가능하니, 길게는 2024년까지 집권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독일 주간 은 지난 8월13일 인터넷판에서 “푸틴의 러시아가 한 치의 결점도 없는 완벽한 독재국가로 전락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모스크바의 거리에서 ‘복면’이 넘쳐날 분위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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