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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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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7.0의 ‘인재’

해마다 물난리 아니면 허리케인 겪은 아이티, 무법의 정치 아래 모조리 베어버린 나무가 화를 불러와
등록 2010-01-20 05:35 수정 2020-05-02 19:25
‘내 가족은 어디에?’ 지진으로 초토화된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거리에서 한 여성이 망연한 모습으로 주검을 살피고 있다. 연합/AP

‘내 가족은 어디에?’ 지진으로 초토화된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거리에서 한 여성이 망연한 모습으로 주검을 살피고 있다. 연합/AP

1월12일 오후 5시께(현지시각) 카리브해 에스파뇰라섬이 요동쳤다. 그 섬 서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티 공화국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불과 16km가량 떨어진 곳을 진앙으로 한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이었다. 대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일순간 대지가 몸을 떨었다. 삽시간에 뿌연 먼지가 도시를 삼켰다. 10여 분 뒤 먼지가 잦아들었을 때, 성하게 버티고 서 있는 건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린 건 사람이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AFP통신〉은 “아이티에서 이 정도 규모의 강진이 발생한 것은 1751년과 1770년 두 차례뿐”이라고 전했다.

2004년, 아이티 2500명·쿠바 0명의 이유

자연재해는 아이티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21세기 들어서만 따져봐도 그렇다. 지난 2000년을 시작으로 2003년에 두 차례, 그리고 2006년과 2007년엔 큰 물난리가 났다. 홍수가 없었던 2004년과 2005년엔 허리케인이 야차처럼 아이티를 할퀴고 지나갔다. 2008년엔 두 달여 새 무려 네 차례나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줄잡아 800명이 숨지고, 100만 명의 이재민이 났다. 아이티 인구 9명 중 1명꼴이다.

하늘이 내린 재해를 피할 순 없다. 다만 사람이 만든 재해는 줄일 수 있다. 재난이 휩쓸고 지나간 뒤 피해를 키운 원인을 찾게 되는 이유다. 아이티에서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세계 언론은 극도의 빈곤과 인프라 부재, 산림 파괴와 조기 경보체계 미비 등을 거론한다. 이번 지진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틀린 말 하나 없다. 이토록 속수무책만 아니었어도, 분명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터다. 그러니 하나씩 따져볼 일이다.

지난 2004년 9월 카리브 일대를 초토화한 열대성 폭풍 ‘진’은 아이티에서 무려 25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역시 ‘진’이 위세를 부렸던 이웃 나라 쿠바에선 단 1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두 나라의 차이는 뭘까? 그해 9월30일 은 벤 위즈너 런던대 벤필드위험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의 말을 따 “정치적 안정과 탄탄한 중앙정부 없이는 재난에 미리 대비할 수 없고, 재난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위즈너 연구원은 아이티가 수재에 특히 취약한 이유로 꼽히는 산림 파괴 문제를 그 단적인 사례로 들었다.

한때 아이티 국토를 뒤덮었던 산림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 그 무렵 세계시장에서 커피 가격이 급락했다. 아이티 농부들은 하나둘 커피농사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커피는 큰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에서 재배하는 게 이상적이다. 햇볕이 잘 들지 않으면 잡초도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그늘에서 재배하면 커피 열매가 천천히 익기 때문에 맛과 향도 풍부해진단다. 커피농사를 작파하면서 아이티 농민들은 숲에 공을 들일 이유가 없어졌다.

참사 나흘째인 1월15일 포르토프랭스에 마련된 구호식량 배급소 앞에서 유엔군의 경계 속에 기다랗게 줄을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던 여성이 고함을 치고 있다. REUTERS/ EDUARDO MUNOZ

참사 나흘째인 1월15일 포르토프랭스에 마련된 구호식량 배급소 앞에서 유엔군의 경계 속에 기다랗게 줄을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던 여성이 고함을 치고 있다. REUTERS/ EDUARDO MUNOZ

비슷한 시기 아이티에선 급격한 도시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조리용 숯 생산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커피농사를 포기한 농민들은 나무를 베어내 숯을 만들어 소득을 보전했다. 대를 이어 철권을 휘두른 뒤발리에 군사독재가 1986년 무너지면서, 중앙정부의 지방 장악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농민들은 숯을 구워내기 위해 국유림까지 남벌했다.

1991년 또 쿠데타가 나면서 군부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불안한 정정 아래서 산림훼손 따위를 우려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1993년 군부를 압박하기 위해 미국과 유엔이 아이티 금수 조처를 단행했다. 수출길이 막힌 과수 농민들은 망고나무까지 베어 숯을 구웠다. 그렇게 숲의 98%가 사라져갔다. 8월에서 9월 사이 허리케인 철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재해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폭력과 극단의 공포 부른 정치

만연한 무정부적 혼란 속에 파괴된 것이 어디 산림뿐일까? 1804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이래 아이티의 역사는 정치적 불안으로 점철돼왔다. 최근의 역사만 잠시 훑어봐도, 폭력과 극단의 공포가 아이티 사회 깊숙이 ‘문화’로 자리잡은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다. 1956년 쿠데타로 집권한 프랑스와 뒤발리에는 폭력과 미신으로 아이티 국민을 호령하며 ‘종신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1971년 그가 죽은 뒤 권좌에 오른 것은 그의 아들 장 클로드였다.

세습독재는 1986년에 막을 내렸지만, 독재가 무너진 뒤 들어선 과도정부를 장악한 것도 군부였다. 오랜 논란 끝에 마침내 1990년 12월 사상 처음으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졌다. 아이티 국민은 해방신학자 출신으로 빈민운동에 앞장서온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독재의 잔재를 씻어내려는 그의 노력은 군부와 보수 엘리트층의 반발을 불렀다. 취임한 지 불과 7개월여 만에 아리스티드는 쿠데타로 권좌에서 축출됐다.

쿠데타 세력은 빈민층을 중심으로 한 아리스티드 지지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쿠데타 직후부터 1년 남짓 만에 4만여 명이 고무보트에 의지한 채 망명길에 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과 유엔의 압박 속에 마지못해 아리스티드의 권좌 복귀에 합의한 군부는 차일피일 약속 이행을 미뤘고, 1994년 9월 유엔이 미군 주도의 다국적군 파병을 승인한 뒤에야 권력을 내줬다. 복귀한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쿠데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코스타리카의 전례에 따라 군대를 해산했다.

헌법의 연임 제한 규정에 따라 아리스티드는 1995년 권좌에서 물러났고, 르네 프레발 전 총리가 그의 후임으로 당선됐다. 프레발은 아이티 역사에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뒤 임기를 모두 채우고, 역시 선거로 뽑힌 후임자에게 권력을 넘겨준 유일한 인물이 됐다. 2001년 대선에서 다시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옛 군부를 포함한 야권 세력의 반발이 거셌다. 크고 작은 정치적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아이티는 ‘친아리스티드’와 ‘반아리스티드’ 두 진영으로 갈려 극한 대립으로 빠져들었다. 그 결과는 옛 군부 세력이 중심이 된 또 한 차례의 무장반란이었다.

반란군의 수도 입성이 코앞으로 닥쳐온 2004년 2월 아리스티드는 미국이 마련한 비행기에 올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으로 몸을 피했다. 당시 그는 “미군이 납치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미 국무부는 “자진해서 사임한 것”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아리스티드가 자메이카를 거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장기 망명 생활에 들어간 이후에도 아이티 정정은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6년 대선에서 프라벨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2004년 6월 브라질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 평화유지군 9천여 명이 배치됐지만, 그 무렵 시작된 무장세력의 무장해제 작업은 지금껏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다. 법을 집행할 힘이 없는 정부는 포르토프랭스의 거리를 갱단에게 내준 지 오래다. 살인·납치·강도와 성폭행은 일상이 돼버렸다. 그래서다. 1월12일 지진으로 파괴된 아이티의 대통령궁을 바라보며 새삼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참극 속에서도 기적은 있다. 스페인에서 날아온 구조요원이 1월14일 무너진 건물 더미에서 2살 난 사내아이를 구해내고 있다. 연합/AP

참극 속에서도 기적은 있다. 스페인에서 날아온 구조요원이 1월14일 무너진 건물 더미에서 2살 난 사내아이를 구해내고 있다. 연합/AP

전체 인구 58%가 만성적 영양부족

주식인 쌀을 포함해 식량의 50%가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아이티는 국제시장의 식량값 변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2007년 말 국제 식량값은 천정부지로 폭등했다. 유가 인상으로 수송비가 비싸진데다, 아시아에서 수요가 큰 폭으로 늘었다. 또 바이오 연료 생산을 위해 농지가 줄어든데다 투기꾼까지 기승을 부렸다. 2008년 4월 다시 폭동이 포르토프랭스를 휩쓸었다. 그해 초 두어 달 만에 식량값이 3배가량 폭등하면서 굶주리다 못한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온 게다. 이 무렵 아이티 사람들이 진흙과 기름으로 과자를 구워 허기를 달랜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정부 예산의 30~40%를 해외 원조에 의존하는 아이티는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힌다. 1인당 국민소득이 주변 국가의 10분의 1에도 이르지 못한단다. 세계은행의 자료를 보면, 아이티의 국내총생산(GDP)은 50억달러다. 경제성장률은 경기가 좋을 때에도 2~3% 수준에 그치는 반면, 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10~13%대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갈수록 삶이 팍팍해질 수밖에 없는 게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자료를 보면, 아이티 인구 절대다수가 하루 2달러 이하에 기대어 산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는 “아이티의 영아 사망률은 1천 명에 57명꼴이며, 5살 이하 어린이 22%가 저체중 상태”라고 전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아이티 전체 인구의 58%가 만성적인 영양부족 상태”라고 전한 바 있다. 평균 수명도 2006년 기준으로 52살에 불과하다. 아이티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하고 지구촌에서 에이즈 감염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기도 하다.

극단의 빈곤 속에 그나마 아이티를 버티게 해주는 건 폭력과 빈곤을 피해 외국으로 떠나간 이들이 송금해오는 돈이다. 미주개발은행(IADB)이 지난 2008년 펴낸 자료를 보면, 약 150만 명의 아이티 국민이 미국·캐나다·도미니카공화국·프랑스 등지에서 이주노동자로 떠돌고 있다. IADB는 “이들 중 80% 정도가 고국에 있는 가족·친지에게 정기적으로 송금을 하고 있다”며 “2007년을 기준으로, 아이티 이주노동자가 송금한 돈은 16억5천만달러에 이른다”고 전했다. 이는 아이티 1년 예산의 2배, GDP의 30%에 육박하는 액수다.

“성난 주민들이 주검으로 바리케이드를 쳐 도로를 막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은 1월15일 포르토프랭스발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세계 각국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어오고 있지만, 참사를 당한 주민들에게 구호품이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리고 있다. 아이티적십자사는 이날 “이번 지진으로 인한 희생자가 4만5천 명에서 5만 명에 이를 것”이라며 “크고 작은 부상자와 이재민도 300만 명을 헤아린다”고 전했다. 아이티 국민 3명 중 1명꼴이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시위 벌여

“이미 7천 구의 주검을 매장했다.” 프레발 대통령은 1월15일 〈CNN방송〉 등과 한 회견에서 이렇게 전했다. 살이 깎이고 뼈가 꺾인 이들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면 사망자는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앞서 〈AP통신〉은 1월14일 아이티 정치권 인사의 말을 따 “사망자가 최대 50만 명까지 늘어날 수도 있다”는 끔찍한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이미 주검이 썩어가는 냄새가 도시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단다. 병원마다 실려온 주검이 넘쳐난단다. 아니, 병원도 무너진 채다. 여전히 건물 더미에 깔려 모진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 누구랄 것 없다. 도와야 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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