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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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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은 두 번 덫에 걸리지 않는다

민간인 피랍 겪은 뒤 어렵사리 철군해놓고, 미국의 “재정 지원 적다”는 말에 덥썩 재파병이라니
등록 2009-11-05 09:13 수정 2020-05-02 19:25
‘임무 완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던 다산·동의부대 장병 195명이 2007년 12월14일 오전 경기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임무 완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던 다산·동의부대 장병 195명이 2007년 12월14일 오전 경기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낚시를 즐긴다. 간혹 방금 잡았다 놓아준 물고기가 입도 성하지 않은 채로 다시 미끼를 물고 나오는 경우를 만난다. 이런 물고기는 대개 ‘잔챙이’다. ‘대물’들은 좀처럼 두 번 덫에 걸리지 않는다.

‘지역재건’ 활동은 점령군 돕는 것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재파병을 결정했다. 2002년부터 2007년 말까지 약 6년간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기지에 주둔해왔던 다산·동의부대가 철군한 지 약 2년 만의 결정이다. 세상의 어느 실없는 나라가 어렵게 파병했다가 그만큼 어렵사리 철군해놓고, 다시 군대를 보내겠다며 국민과의 약속을 뒤집는다는 말인가.

외교당국은 이번 재파병이 “글로벌 코리아의 위상을 높이고 아프가니스탄의 민간 재건 인력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지난 2002년에 같은 말을 했더라면 국민도 그러려니 했을 터이다. 그런데 피랍사건 이래 아프간이 간단치 않은 곳임을 이미 국민도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영국과 소련을 패퇴시킨 곳,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8년간 가공할 화력과 재원을 쏟아붓고도 패배를 예감하는 ‘터가 센 곳’이 아프간 아니던가.

정부는 과거나 지금이나 아프간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2년 전 한국군은 미군이 운영하는 악명 높은 바그람 기지에 주둔했다. 수감자 고문과 증거 없는 무기한 구금, 이슬람의 성서인 ‘쿠란’ 모독 사건 등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의 표적이 돼온 그 기지의 울타리 안에서 ‘평화롭게’, 그리고 ‘무식해서 용감하게’ 주둔하고 있었다. 민간인 피랍 사태를 계기로 한국군이 점령군의 일원이자 부패한 현지 권력의 후견인으로서, 아프간 국민 대다수에게 증오와 저항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음이 공공연히 드러나기 전까지 말이다.

그런데 약 2년여가 지난 뒤 정부는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아예 미군기지 밖 ‘특정 지역’에서, 우리 자체로 군부대를 운용하겠다고 밝혔다. 동맹국들은 ‘출구전략’을 암중모색하고 있고, 하미드 카르자이 정권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처럼 무너져가고 있는데 말이다.

정부가 재파병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지역재건팀’(PRT) 활동이란 도대체 뭔가? 정부는 PRT 활동을 마치 민간단체들이 아프간에서 벌이는 활동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 점령군이 주도하는 지역재건사업을 말한다. 이 낯선 개념은 조지 부시 전 미 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PRT의 기본 논리는 군이 재건을 주도한다는 것. 전쟁으로는 테러세력을 근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외의 우려를 무시하고 아프간과 이라크에 폭격부터 퍼부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점령자로서의 이미지를 상쇄하기 위해 사후약방문 격으로 선택한 임기응변책이다.

2007년 할 일이 없어서 철군해놓고

본디 중립적이어야 할 인도지원 민간 주체들을 점령군과 섞이게 만들었으니, 관련 민간단체들이 이를 좋게 평가할 리 없다. 국제 인도지원 단체들은 이로 인해 아프간에서 자신들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고, 신변마저 위협받게 된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현지인들 처지에서는 병 주고 약 주는 시늉만 하는 형국이니 곱게 보일 리 없다. 전시효과 이상의 재건지원 효과도 실제로 없다. 한국 정부가 그걸 하겠다는 거고, 그것도 모자라 보호·경비를 위해 군대까지 보내겠다는 거다.

지난 2002년 아프간 파병 이래 국회에 보고된 국방부의 논리대로라면, 아프간에 군을 재파병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미 피랍사태 7개월 전인 2006년 가을 정기국회에서 국방부와 외교부는 “아프간에서 한국군의 임무는 사실상 완료되어, 언제든지 철군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단 한-미 동맹을 고려해 1년만 더 주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예의상 1년 더’의 기간에 피랍사태가 일어난 거다. 이 점에서 한국군은 피랍사태로 철군한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할 만한 일이 더 없어서 귀환한 것이다. 2007년 철군 때도 국방부는 “아프간에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귀환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공식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2007년 아프간 철군을 최종 결정했을 때, 미국은 “지금까지의 협력에 감사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 감사는 지금도 유효한가? 적어도 버락 오바마 행정부 아래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동맹국을 존중하는 외교를 펼치겠다”고 주창해왔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미국은 부시 행정부 당시 “우리를 지지하지 않으면 적”이라는 식으로 접근해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훼손시키고 동맹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오바마의 동맹 중시 정책을 그냥 외교적 수사라고 취급하는 것은 미국이 부시 행정부 8년간 일어난 외교적 리더십 약화에 얼마나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는지를 간과하는 헛똑똑이 분석이다.

양국 정부 간에 이미 마무리된 민감한 사안을 재론하는 것이 큰 결례에 해당한다는 것을 미국 정부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최근 방한한 자리에서 한국 군대의 파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데 주저하면서 재정 지원이 좀 적다는 식의 언급을, 그것도 인터뷰 형식의 간접화법으로 전달했던 게다.

이런 경우 은근히 재파병을 기대하는 미국 정부에 대해 우리 정부가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대답은 “돈은 좀 댈 수도 있지만, 우리 국민이 동의하지 않아 군대를 다시 보낼 수는 없다”는 말일 터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혈맹’ 운운하거나, ‘관심법’을 동원해 미국의 ‘드러나지 않은 심기’를 살피기 시작하면 그건 민주정부 간의 외교관계에 합당한 품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한-미 동맹의 수준을 스스로 낮추는 것이다.

일부 파병론자들은 궁색한 파병 논리를 하나 만들었다. “지금 아프간 상황이 어려워 주한 미 지상군이 아프간으로 빠질 수도 있으니, 우리가 군대를 보내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그것이다. 이 논리의 가장 알기 쉬운 맹점은 “미군 대신 한국군을 보내자”는 논리의 황당함이다. 이 논리의 두 번째 맹점은 설사 한국군을 파병한다 해도 주한미군은 아프간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오랜 논란을 거쳐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주한미군이 한반도 방위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유연하게 이동하는 것)을 제한적으로 수용한 이래, 주한 미 지상군의 분쟁지역 파견은 예견된 일이었다. 이걸 막을 순 없다.

헌법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어긋나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주한미군만이 아니라 아예 한국군을 분쟁지역으로 보내서 자발적으로 그 분쟁에 연루되려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상황은 주한미군의 유연성을 넘어 한-미 동맹의 전략적 유연성, 혹은 한-미 군사력의 전세계로의 진출로 해석될 만하다. 한데 이러한 동맹의 세계화가 헌법과 한-미 상호방위조약과도 상충된다는 사실은 제대로 검토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전수방위(공격을 당했을 때 방어만 한다는 뜻)를 표방하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동맹국의 자국 영토와 영토를 위태롭게 하는 태평양 지구에서의 무력적 외침에 대한 공동 대처”로 행동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재파병은 단순히 ‘문구’의 훼손에 그치지 않고, 나라의 위신과 우리 국민의 안전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부메랑을 만들어낼 것이다.

친구 따라 강남은 갈 수 있다. 하지만 출구 없는 전장은 아니다.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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