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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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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뒤흔드는 ‘물의 전쟁’

90년대 수도 민영화 뒤 요금 폭등하며 불만 고조… 헌법 개정 통한 ‘물 공유화 원칙’ 천명 잇따라
등록 2009-07-31 06:06 수정 2020-05-02 19:25

혈액의 95%가 물이다. 체지방의 14%도 수분으로 이뤄져 있다. 뼈도 22%가 물이고, 피부에도 상당량의 수분이 포함돼 있단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 몸의 대략 60~70%는 물로 이뤄져 있다. 물이 곧 생명인 셈이다. 그래서다. 깨끗한 물을 필요한 만큼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은 ‘생존권적 기본권’이다.

지난해 9월 말 에콰도르 과야킬 지역의 알베르토 스펜서 경기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개헌을 지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물 사유화 금지를 포함한 국민의 사회·경제적 권리 확대를 뼈대로 한 당시 개헌 투표에서 에콰도르 국민 절대다수가 찬성표를 던졌다. 사진  REUTERS/ GUILLERMO GRANJA

지난해 9월 말 에콰도르 과야킬 지역의 알베르토 스펜서 경기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개헌을 지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물 사유화 금지를 포함한 국민의 사회·경제적 권리 확대를 뼈대로 한 당시 개헌 투표에서 에콰도르 국민 절대다수가 찬성표를 던졌다. 사진 REUTERS/ GUILLERMO GRANJA

유엔이 지난 2003년 내놓은 를 보면, 사람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물의 양은 20~50ℓ에 이른다. 인류의 어느 만큼이 ‘물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고 있을까?

세계보건기구(WHO)에 딸린 ‘물 공급과 공중위생 합동 모니터 프로그램’이 내놓은 최신 자료를 보면 상황이 좋지 않다. 약 8억8400만 명의 인류가 깨끗한 물을 전혀 공급받지 못하고 있단다. 지구촌 인구 8명 가운데 1명은 만성적인 물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는 얘기다. 적절한 하수시설이 없이 생활하고 있는 이들도 25억 명에 이른단다.

물 부족 따른 위생 문제로 하루 5500명 사망

상하수도는 공중위생의 시작이다. 상하수도 서비스를 받지 못하면 생활환경이 비위생적이 된다. 수인성 전염병을 비롯한 각종 질환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저개발국 하수의 90%가량은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채 하천과 지하수로 흘러들어 식수원을 위협하고 있다. 한 해 약 200만 명이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으로 인해 설사 등에 시달리다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루 평균 약 5500명꼴인데, 희생자 절대다수는 영유아다.

지구촌 전역 저개발국가에 깨끗한 물 공급 사업을 벌이고 있는 미 비정부기구(NGO) ‘워터포피플’(waterforpeople.org)은 지난 7월2일 펴낸 에서 “비위생적인 생활환경과 깨끗한 마실 물이 부족해 목숨을 잃는 이들은 해마다 자연재해나 전쟁 등 유혈 갈등으로 인해 숨지는 이들보다 훨씬 많다”며 “깨끗한 물을 충분히 쓸 수 있는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의 하나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구 표면의 70% 이상이 물로 덮여 있다. 그래서 물은, 자원이기도 하다. 자원의 가치는 그 ‘희소성’에서 찾아진다. 기후변화로 세계 각지에서 물 부족 사태가 이어지면서, 물은 어느 순간부터 ‘청색 금’이자 ‘21세기의 원유’로 불리게 됐다. 세계은행은 최근 “현재와 같은 속도로 인구 증가가 지속되면 오는 2025년께 인류의 3분의 2가 물 부족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희소한 자원은 분배 과정에서 ‘치우침’을 낳는다. 물이 부족한 지역에선 물을 마시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의 크고 작음이 빈부 격차와 비슷하게 나타난다. 미 싱크탱크 ‘미주문제위원회’(COHA)는 7월 초 발행한 최신호에서 “라틴아메리카 인구(약 5억9천만 명) 가운데 상수도 공급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무려 1억3천만 명에 이른다”며 “이 지역의 물 사정은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중남미 빈부 격차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지적했다.

‘물 사유화, 물결을 되돌리다.’ 한때 중남미 물 사유화의 진원지로 불렸던 볼리비아에선 올 1월 말 국민투표를 통해 물의 공공성을 침해하는 사유화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사진 REUTERS/ VICTOR ROJAS

‘물 사유화, 물결을 되돌리다.’ 한때 중남미 물 사유화의 진원지로 불렸던 볼리비아에선 올 1월 말 국민투표를 통해 물의 공공성을 침해하는 사유화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사진 REUTERS/ VICTOR ROJAS

그리 새로운 소식은 아닐 터다. 이미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중남미 전역에서 ‘물 사유화’ 움직임이 일대 광풍으로 불어닥친 바 있다. 세계은행이나 미주개발은행 등 국제 금융기관이 가난한 중남미 각국 정부에 금융지원을 하는 전제조건의 하나로 상수도를 비롯한 공공부문의 민영화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볼리비아다. 세계은행은 1997년 볼리비아 정부에 2천만달러 금융지원을 하면서 ‘물 사유화’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에 따라 볼리비아 정부는 관련 법안까지 정비해 두 차례에 걸쳐 물 사유화 조처를 취한다. 2000년 미국계 초국적 자본 ‘벡텔’의 자회사인 ‘아구아스 델 투나리’가 코차밤바 일대 수자원을 40년간 위탁관리하기로 계약을 맺었고, 프랑스계 초국적 자본 ‘수에즈’의 자회사인 ‘아구아스 델 일리마니’가 라파스와 엘알토 일대 수자원을 장악했다.

하지만 사유화가 기대했던 ‘경쟁’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시장이 ‘효율’이란 허울을 벗은 자본의 ‘독점’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벡텔 자회사가 물 관리를 시작한 직후 코차밤바에선 상수도 요금이 평균 35% 치솟았다. 일부 지역에선 인상률이 200%를 기록하기도 했다. 관련 법령이 바뀌어 빗물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자기 집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리는 데도 요금을 내야 했다. 코차밤바의 성난 주민들은 그예 ‘물 전쟁’에 나섰고, 볼리비아 정부는 계엄령까지 내려야 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벡텔은 결국 이듬해 볼리비아에서 철수했다.

‘민영화’가 ‘분권화’나 ‘지역자치’로 변했을 뿐, 물 사유화는 중남미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공공자금으로 민간기업의 주머니를 채우는 현실도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코차밤바의 ‘작은 승리’는 비슷한 어려움에 직면했던 중남미 각국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미 싱크탱크 ‘푸드앤드워터워치’(FWW)는 지난 6월 말 내놓은 보고서에서 “물은 인권의 하나이자 공공재로서 절대 사유화할 수 없다는 내용을 헌법에 담아내자는 운동이 최근 몇 년 새 중남미에서 힘을 얻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우루과이에선 지난 2004년 10월 물 사유화를 금지하고, 깨끗한 물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인권의 하나로 규정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개헌안이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지난해 9월엔 에콰도르에서도 ‘물과 같은 귀중한 공공재를 혼란스런 시장에 내맡길 수 없다’는 내용을 포함해 국민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대폭 강화한 개헌안이 통과돼 물 사유화가 전면 금지됐다.

올 1월 말엔 볼리비아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뼈대로 한 개헌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져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코스타리카에서도 물 사유화를 금하는 내용의 법안이 만들어져 의회 표결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해 지난 2007년 2월 결성한 ‘물과 생명 보호를 위한 전국위원회’(CNDAV·이하 전국위원회)를 중심으로 물 사유화 반대운동을 3년여 이어온 콜롬비아에서도 마침내 의회가 개헌 논의를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콜롬비아의 국가인권위원회 격인 ‘디펜소리아 델 푸에블로’가 올 초 내놓은 조사 결과를 보면, 콜롬비아 4400만 인구 가운데 900만 명가량이 깨끗한 마실 물을 공급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2천만 명가량이 만성적인 물 공급 부족에 허덕이고 있단다. 전국위원회가 △충분한 양의 깨끗한 물을 공급받는 것은 기본적 인권의 하나이며 △정부는 수자원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수자원은 공공재이므로 민간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등의 내용을 뼈대로 한 5개항을 헌법에 명문화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우루과이·에콰도르 이어 콜롬비아도 개헌 논의

콜롬비아 헌법은 국민 150만 명 이상이 개헌의 필요성에 찬성한다는 서명을 해 제출하면, 의회는 곧 개헌 논의에 들어가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전국위원회는 이미 지난해 말 개헌을 요구하는 2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의회에 제출했다.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은 전국위원회가 마련한 개헌안에 수정을 가하려 했지만, 의회의 반발로 무력화됐다. 상하 양원의 논의가 마무리되면, 법원의 개헌투표 적법성 여부에 대한 판단을 거쳐 대통령이 투표일을 정하게 된다.

‘물의 권리’를 둘러싼 한판 싸움이 하반기 콜롬비아를 뒤흔들 모양새다. 하긴, 엘살바도르와 멕시코에서도 최근 전국위원회 형식을 딴 시민사회 연대체 건설 움직임이 가사회하고 있단다. 한때 ‘물 사유화’의 본류였던 중남미에서 ‘물 공유화’란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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