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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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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따먹기 놀이, 팔레스타인의 현실

흩뿌려진 섬처럼 고립된 서안지구 르포…
삼엄한 검문 대신 넘을 수 없어 빙빙 돌아야 하는 벽이 넓고 높게 솟네
등록 2008-11-28 05:26 수정 2020-05-02 19:25
가자지구의 외로움이 깊다. 그나마 들고 나던 사람과 물건도 2주 전부터 꽁꽁 막혔다. 이스라엘 정부는 외신기자의 출입까지 차단한 상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까지 직접 나서 “봉쇄를 풀고 인도지원 물품 반입을 허용하라”고 요청했지만, 11월21일 오후 현재 이스라엘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은 고립감에 떨고 있다. ‘국제법 위반’이란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분리장벽’ 건설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장벽으로 둘러쳐진 팔레스타인 땅은 조각조각 ‘섬’이 돼가고 있다. 지난 10월 말 김동문 전문위원이 3년여 만에 다시 그 땅을 찾았다. 일주일 남짓 현지를 둘러본 김 위원은 “장벽이 가져온 변화는 고립의 고착화”라고 지적했다. 편집자
팔레스타인 땅 요르단강 서안의 베들레헴에서 한 여성이 이스라엘군이 세워놓은 거대한 분리장벽을 따라 걷고 있다. 유대인 정착촌을 따라 장벽이 차곡차곡 들어서면서 팔레스타인 땅은 조각조각 섬처럼 고립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땅 요르단강 서안의 베들레헴에서 한 여성이 이스라엘군이 세워놓은 거대한 분리장벽을 따라 걷고 있다. 유대인 정착촌을 따라 장벽이 차곡차곡 들어서면서 팔레스타인 땅은 조각조각 섬처럼 고립되고 있다.

어린 시절 즐겨하던 ‘땅따먹기’ 놀이가 떠올랐다. 팔레스타인에선 놀이가 아니라 현실이다. 정확히 말해 힘이 센 쪽이 일방적으로 벌이는 ‘땅 빼앗기’다. 요르단강 서안지구 곳곳에 ‘유대인 정착촌’과 이스라엘 땅을 잇는 도로가 건설되고, 정착민 보호를 명분으로 성벽을 둘러친다. 팔레스타인 땅 서안지구는 조각으로 흩어진 채 섬처럼 고립되고 있다. 벌써 여러 해째다.

이스라엘군은 무력시위, 학생은 짱돌

‘분리장벽’. 2004년 7월 국제사법재판소(ICC)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권고의견을 냈다. 그럼에도, 공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도, 더 많이 세워질 게다. 장벽이 없는 곳에는 어김없이 ‘휴전선’을 연상시키는 몇 겹의 철조망이 버티고 있다. 수용소의 망루처럼, 장벽 곳곳엔 이스라엘군의 감시탑이 드높이 솟아 있다. 계속되는 장벽 건설은 팔레스타인 땅에 지각변동을 불러와, 서안지구 곳곳에 흔적만 남은 이스라엘군 검문소가 즐비하다. 팔레스타인 땅과 이스라엘 땅을 들고 나는 무수한 이들을 통제하던 철조망과 바리케이드도 사라졌다. 삼엄한 검문을 하던 풍경도 쉽게 마주치기 어려워졌다. 분리장벽 안쪽, 팔레스타인 땅에선 최소한 그랬다. 그 안에선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칼란디야 검문소, 팔레스타인의 ‘행정수도’ 라말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한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통제하던 이스라엘군의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졌던 장소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다. 예고 없이 이스라엘군이 잠시 검문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예전의 그 ‘위용’은 찾아볼 길이 없다. 여전한 것이 있다면, 팔레스타인인들이 예루살렘과 라말라를 오가기 위해서는 8km 구간을 돌고 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회하는 번거로움은 감수할 만하다. 아침저녁으로 라말라를 오가기 위해 검문소 앞에서 몇 시간씩 ‘벌’을 서야 했던 일은 이제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 10월28일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는 라말라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3년여 만에 다시 찾은 도시는 이스라엘군 검문소가 있던 자리를 기억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라말라 일대를 거대하게 둘러친 분리장벽과 이스라엘군의 감시탑만 아니라면, 든든한 성이 지키고 있는 ‘평범한’ 아랍 도시로 느낄 만했다. 라말라의 시내 중심가 ‘사자 광장’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경찰관 이야드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며 “적어도 라말라를 드나들기 위해 겪던 번거로움은 사라졌다”며 웃었다. 물론, 이스라엘군 순찰 차량이 시내 안으로 들어와 무력시위를 하는 풍경은 여전했다. 순찰차가 나타날 때면 ‘짱돌’을 던지기 위해 학교 담장 근처로 빼곡히 몰려드는 중·고등학생들의 기민한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여명 전 80여m를 늘어선 사람들

분리장벽 건설로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은 정작 따로 있었다. 예루살렘을 가장 빈번히 오가는 베들레헴 주민들이었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걸어가도 2시간 남짓이면 족하다. 팔레스타인 땅인 동예루살렘에는 시외버스 정류장이 2곳이다. 하나는 예루살렘 북쪽 지역으로 연결해주는 나블루스 거리의 정류장이고, 다른 하나는 베들레헴과 동예루살렘을 연결해주는 정류장이다.

베들레헴으로 향하기 위해 정류장을 찾았다. 손님을 끌기 위한 ‘호객’이 한창이었다. 베들레헴까지의 요금은 4세겔, 우리 돈 1500원 정도다. 베들레헴행 버스를 탔지만, 손님들은 베들레헴에 가닿기 전에 차에서 내려야 했다. 베들레헴을 둘러싼 분리장벽 앞 검문소가 버스의 종착지였다. 장벽을 넘는 것은 국경을 넘는 것과 마찬가지다. 까다로운 검문·검색이 여전했다. 불과 10여m나 될까? 그 거리를 넘나들기 위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출퇴근 시간마다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예루살렘∼베들레헴∼헤브론을 연결하던 도로도 막혀 있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두 번째 부인 라헬의 무덤이 있는 그 도로변에 일부 유대인들이 정착한 게다.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 정부는 어김없이 분리장벽을 세웠고, 길은 막혀버렸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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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9일 새벽 제법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빗방울이 뿌렸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하나둘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고 선 분리장벽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예 새벽 2시께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 새우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채 4시가 되기도 전에 몰려든 이들이 몇백 명이다. 여명이 시작되는 5시가 되자 분리장벽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늘어선다. 80여m는 족히 돼 보였다. 늘어난 인파도 2천여 명을 헤아린다. 출입구가 개방되는 새벽 5시를 전후해 분리장벽 출입구에 몰려드는 이들은 평균 2500명 안팎이란다.

“아니, 또 무슨 일이야? 왜 아직도 통과시켜주지 않는 거지?” 평소 같으면 출입 심사가 한창일 텐데, 이날은 6시가 다 돼서도 검문소 빗장이 열리지 않았다. 빗발은 주춤해진 채다. 새벽 3시45분께부터 줄을 섰다는 일용노동자 이브라힘은 힘 빠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 늘어선 사람들 대부분은 날품을 팔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거다. 최소한 아침 7~8시에는 검문소를 통과해 예루살렘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야 일거리를 얻을 수 있는데….”

6시15분께 장벽 사이에 나 있는 좁다란 철문이 한 명씩 사람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20분 남짓 만에 1천명가량이 허겁지겁 장벽 안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그건, 시작이었다. 장벽 사이에 있는 이스라엘군 출입 통제 사무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제부터 족히 2시간은 잡아야 장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절차는 단순하다. 그러나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먼저 분리장벽 들머리에 있는 철제 회전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스라엘 병사에게서 간단한 신원 확인을 받은 뒤엔, 출입 사무실로 들어서게 된다. 줄을 따라 건물 안에 들어서면 다시금 한 사람씩 안내를 따라 철제 회전문과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소지품을 모두 꺼내 보안 검색대에 올려놓는다. 가죽 허리띠는 물론 금속 성분이 들어간 건 뭐든 다 꺼내놓아야 한다. 그 다음, 최종 신원 확인 절차를 밟는다. 분리장벽을 통과해 ‘예루살렘 입성’ 절차를 밟는 데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이유다. 3년여 전부터 이런 일이 일상이 됐단다.

500여 정착민, 2천여 이스라엘 병사

베들레헴 거주자 모두가 장벽을 넘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스라엘군 당국이 출입 허가를 내준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아랍계 이스라엘인’에게만 허용되는 특혜다. 출입 허가를 받은 이들에게도 제한은 있다. 저녁 8시까지는 돌아와야 한다. 사실상 통금 조치다. 기독교도라고 자신을 밝힌 팔레스타인 주민 조세프는 “베들레헴 검문소는 사실상 국경”이라며 “이스라엘과 맞닿아 있는 곳은 어디나 베들레헴 검문소 같은 국경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검문소 곁 장벽에 이스라엘 관광부가 써놓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예수 탄생의 도시, 베들레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발길을 헤브론으로 돌렸다. 3년 전만 해도 베들레헴에서 헤브론으로 가는 길엔 여러 차례 검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검문소는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요새 같던 이스라엘군의 원형 초소도 마찬가지다. 헤브론으로 향하는 길 양쪽으로 포도나무 과수원이 연이어 눈에 들어왔다. 전통적으로 헤브론은 포도 농사로 유명하다.

다시 찾은 헤브론에서도 변화가 느껴졌다. 도시 분위기가 말끔해졌다. 쾌적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옛 시가지로 들어서자 비좁은 길은 차량과 사람들로 넘쳐났다. 헤브론의 명물은 단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야곱 같은 이들의 무덤이 있는 이브라힘(아브라함) 사원이다. 성서의 아브라함은 곧 쿠란의 이브라힘이다. 이곳이 유대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최고의 성지로 꼽히는 이유다. 지금 사원의 절반은 유대인이, 나머지 절반은 무슬림이 차지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첫 번째 부인 사라, 야곱과 그의 첫 번째 부인 레아의 무덤이 있는 동쪽은 유대인, 그 반대쪽은 무슬림의 영역이다. 아브라함(이브라힘)의 묏자리를 둘러싸고 후손이 쟁탈전을 벌이는 현장인 게다.

이른 아침 베들레헴 검문소를 빠져나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기다랗게 줄을 늘어섰다. 장벽으로 검문소 수는 줄어들었지만, 이스라엘을 오가는 고단한 과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른 아침 베들레헴 검문소를 빠져나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기다랗게 줄을 늘어섰다. 장벽으로 검문소 수는 줄어들었지만, 이스라엘을 오가는 고단한 과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사원으로 가는 길은 좁고 기다란 시장 골목이다. 재래시장과 기념품 코너가 즐비하다. 그런데 대낮에도 문을 닫은 상점이 부지기수였다. 헤브론 출입을 번거롭게 하던 이스라엘군의 검문소도 사라졌는데 무슨 일일까? “당연히 장사가 안 되지. 요즘 분위기가 험악해서 이곳을 찾는 외국인도 거의 없고….” 좌판을 벌여놓은 팔레스타인 상인 아부 알리가 쓴 입맛을 다신다.

“이 땅은 1807년 헤브론의 유대인 공동체가 값을 치르고 사들인 곳이다. 그것을 1927년 아랍인들이 유대인 67명을 살해하고 강탈했다. 우리는 그저 빼앗겼던 땅을 되찾으려는 것뿐이다.” 6년 전 헤브론 인근 키르앗 아르바나, 키르앗 하아봇 같은 유대인 정착촌에 사는 일부 유대인들이 헤브론의 옛 시가지 일부를 점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충돌이 벌어졌지만, 헤브론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냈다.

이후 베이트 하닷사, 텔 루메이다, 베이트 로마노 등 헤브론 일대에 유대인 정착촌이 잇따라 들어섰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군은 전망 좋은 곳에 초소를 마련했다. 검문소와 군경비 초소, 막사가 하나둘 똬리를 틀었다. 새롭게 검문소 17곳, 출입 통제용 철문 7개가 설치됐고, 80여 곳이 철조망과 콘크리트 바리케이드 등으로 차단됐다. 500여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해 2천여 이스라엘 병사가 정착촌 안팎에 주둔하고 있다.

사원 앞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건 승전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통제하던 검문소는 분명 사라지고 있다. 분리장벽이 점점 넓게, 더 높게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유대인 정착촌은 팔레스타인 마을 깊숙한 곳까지 확장되고 있다. 그 정착촌을 위한 도로가 새로 닦이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시설이 들어선다. 그리고 장벽에 둘러싸인 팔레스타인 마을은 섬이 된다. 장벽이 가져온 변화는 고립의 고착화였던 게다. 스산한 거리를 지나 이브라힘 사원에 다다르니, 사원 앞 건물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히브리어 노랫소리가 넘쳐난다. ‘승전가’인가?

라말라·헤브론·베들레헴(팔레스타인)=글·사진 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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