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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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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물타기’에 취한 일본

등록 2007-07-26 15:00 수정 2020-05-02 19:25

‘누가 먼저 쏘았나’에 집중한 중일전쟁 해석 등 본질적 문제를 비켜가면서 죄책감을 표백하네

▣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70년 전인 1937년 7월7일 밤 10시40분께 중국 베이징 교외 루거우차오(노구교) 근처에서 군사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국 주둔 보병 제1연대 제3대대 8중대가 누군가로부터 몇 발의 총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떴다. 그리고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이었다. 이 사실은 바로 연대장에게 전달됐다. 밤 11시께 행방불명이라던 사병은 귀대했다.

다음날 아침 일본군이 중국군을 공격했다. 8년간 수천만 명을 희생시키고 중국을 지옥으로 만든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중일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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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발설’선두에 선 하타 이쿠히코

한국전쟁 연구자들도 그래왔지만, ‘루거우차오 사건’ 연구자들도 ‘누가 먼저 쏘았나’에 집착하는 모양이다. 전쟁의 본질 문제를 비껴가는 수법일 수 있다. 일본 연구자들은 “중국 제29군이 우발적으로 쏜 것”이라는 데 대체로 의견일치를 봤단다. 개중에는 ‘중국공산당 쪽이 저지른 음모’설을 제기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중국군이 우발적으로 쏜 것’이라는 주장은 실은 절묘한 ‘논점 비켜가기’다. 물론 증거는 없다. 우선 그렇게 해서 일본군이 중국 침략을 위해 사건을 계획적으로 도발했다는 의심을 뿌리부터 자를 심산이다. 어쨌든 쏜 쪽은 중국이라니까. 그리고 ‘우발적’으로를 집어넣음으로써, 중국군도 의도적으로 도발한 게 아니라 실수 때문이었다는 쪽으로 숨통을 터준다. 타협하자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전쟁은 누가 원해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일어나버렸다’가 되고 책임소재도 모호해진다. 일본도 의도한 게 아니었다. 다수의 일본 연구자들이 그렇게 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중국군이 우발적으로 쏜 것이라는 주장의 선두에 하타 이쿠히코라는 사람이 서 있다. 니혼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있던 그는 얼마 전에 미국 하원의 ‘일본군위안부’ 사죄촉구 결의안 채택 움직임이 국제적 관심거리로 떠오르자 “2차 대전 중에는 독일군에도 위안소가 있었으며, 한국군도 한국전쟁 당시 위안소를 갖고 있었던 점이 한국인 연구자의 조사로 밝혀졌다”며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을 구사했다. 극우 등은 주로 그런 사람들 얘기를 받아 미국도 위안소를 운영하지 않았느냐고 힐난하며 초점을 흐렸다.

하타는 일제시대 제주도에서 군대위안부 강제모집책을 했던 요시다 세이지라는 사람이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강제동원 사실을 고백해 파문이 일자, 직접 제주도에 갔다 와서는 “그런 말 하는 제주도 사람 없었다”며, 요시다 얘기가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시다는 나중에 자신의 증언 가운데 장소 등에 일부 착오가 있었다고 밝혔으나 강제연행 사실을 부정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우파들 대다수는 주로 하타의 얘기만 거론하면서 강제동원 사실무근 주장의 유력한 증거로 써먹고 있다.

루거우차오에서 중국군이 우발적으로 쏜 것이면 일본엔 책임이 없을까. 그때 일본군은 왜 남의 땅 수도 근교에 가 있었나? 게다가 군사훈련까지 왜 벌였나? 그 6년 전에 일본은 이미 만주를 삼켰다.

1931년 만주침략 이후 패망 때까지 일제가 벌인 전쟁을 ‘15년 전쟁’이라 하지만, 근대 100년을 일본은 대내외 전쟁으로 보냈다. 대만 출신의 재일 작가 천순천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진행된 동아시아 정세 격변은 일제의 조선 병탄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최근 역사특집물에서 말했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 교수는 그 시작을 ‘제1차 조선전쟁’으로 잡았다. 그가 말한 제1차 조선전쟁은 1894년의 청일전쟁을 가리킨다. 6·25가 ‘제2차 조선전쟁’인 셈이다.

‘15년’ 동안만 나쁜 짓을 했나

‘15년전쟁’이란 이름은 운요호 사건 이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독립전쟁, 경제적 수탈 등 조선·대만 식민지배와 관련해 근대일본이 저지른 죄악들을 모두 표백해버린다. 미국이 주도한 도쿄 전범재판,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마치 ‘15년전쟁’ 기간에만 나쁜 짓을 한 양 오도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한 ‘전후 레짐(체제)’에서의 탈각을 외치며 미군이 강요한 헌법 개정을 부르짖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의 자민당은 개헌 초안 전문에서 아예 그런 전쟁에 대한 반성 내용을 빼버렸다. 과거사 문제는 이제 끝났다는 선언이다. 그러고는 한발 더 나아갔다. 43명의 자민당 국회의원은 ‘가치관 외교를 추진하는 의원모임’을 결성하고 ‘자유, 민주, 인권, 법’을 추구하는 가치로 내걸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나라로 중국을 지목했다. 이젠 그들이 심판자로 나서겠다는 것인가.

지난 7월6~7일 루거우차오 근처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는 루거우차오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 1천여 명이 모여 70주년 기념행사를 했다. 대만학자 100여 명도 참석했다. 그들은 “일본 우익 세력이 역사를 뜯어고치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참혹한 난징 대학살 장면을 담은 당시 미국인 선교사의 필름을 토대로 만든 기록영화 도 이달 중국 전역에서 상영됐다. 올가을 아베 신조 총리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대일 관계 개선을 꾀하고 있는 중국 당국은 공식 매체에서 루거우차오 사건을 다루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다고 감출 수 있나. 일본군 위안부도 마찬가지. 일본 정부는 미국에 하원 결의를 채택하면 양국 관계에 좋지 않을 것이라고 집요하게 압박하고 있다. 적나라한 과거와의 자기 동일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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