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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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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르장머리 없는’ 학생들의 추억

등록 2006-06-09 15:00 수정 2020-05-02 19:24

숭의·휘문학교 동맹휴학으로 징계당했으나 작가가 된 강경애와 이태준…1920년대, 스승답지 않은 스승의 체면을 갈가리 찢어버리던 풍경들

필자는 국내의 학내폭력 관련 뉴스를 접할 때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학생이 교사를 때렸다는 내용의 ‘교권 침해’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바로 ‘충격적 뉴스’가 된다. 물론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모독적이고 폭력적 행동이 용납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가르치는 사람이 학생들에게 교육적 체벌이라는 미명으로 휘두르는 폭력이나 언어폭력은 뉴스거리라도 되는가? 한 학생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거나 평생의 상처를 남길 만한 인격적인 모독이라 해도 사회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 학생이 교사의 권위를 약간이라도 손상시키는 언행을 하면 학생에게 막대한 불이익이 돌아가지만, 반대로 체벌 관련 대법원의 판례로 봐서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 몇 차례 뺨을 때리는 것쯤은 법적인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뉴스거리도 안 되는 윗사람의 폭행·추행

아래로부터의 폭력과 위로부터의 폭력에 대한 사회적 잣대가 얼마나 다른지는 대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에서 더 분명해진다.

최근 “보직 교수들을 16시간 동안 감금했다”는 이유로 고려대학교 학생 7명이 출교 처분을 받아 학적을 영원히 상실했지만, 고려대 병설 보건대 학생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시정하기 위해 철야 대치했다는 그들의 말은 주류 언론에서 거의 무시됐다. 대학교에서 일어나는 학생에 대한 교수의 성추행 사건으로 해당 교수가 영원히 교수 자격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은가? 별다른 폭력 행위가 없는 ‘감금’보다도 ‘스승’의 성추행은 피해자에게 훨씬 더 큰 상처를 남길 수 있음에도 우리는 일단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분 서열부터 본다. 하극상의 혐의가 있으면 사회적 매장이 따르는 반면 ‘윗사람’의 폭행이나 추행은 ‘사랑의 매’나 ‘장난’이 되어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종 2년(1419)에 일어난 일처럼 상왕 태종에 의한 모독을 참다 못한 궁녀가 상왕에 대한 불경한 행동을 취했다가 세종의 명으로 사형에 처해진 반면, 노비를 죽인 상전을 처벌한 기록은 거의 없는 조선시대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21세기의 문턱에 선 세계의 통상대국 대한민국에서 보편적 이성을 원천봉쇄하는 이 ‘상급자 체면 중시’의 원리가 과연 어떻게 해서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꺼내는 상투적인 대답은 ‘유교 유습’과 ‘일제 잔재’다. 물론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체면’의 논리는 궁극적으로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사상과 일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고, 그 사상을 군사주의 이념으로 더욱 왜곡시킨 것은 일제였다. 그런데 한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한다. 일제 시절, 특히 1920~30년대는 한국 사상 교육 영역에서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의 권위에 적극적으로 도전했던 시절이라는 것.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됐다. 식민지 치하라 일인이나 친일파가 학교 경영자가 되어 학생들 보기에는 진정한 권위를 결여하고 있었으며, 사회주의·아나키즘이 대유행했기에 학교에서의 권력 관계가 ‘신사상’을 접한 많은 학생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됐다. 1920년대는 개인·인격이 사회에서 화두가 된 시절이기도 했는데, 개인으로서 자신의 존엄성에 눈을 뜬 많은 학생들에게 교권주의적 태도는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독”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우리로서도 상상하기 어렵지만, 1920년대에는 10대 후반의 학생들도 ‘악질 교육자 배척 운동’에 나서서 스승답지 않은 스승의 ‘체면’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1903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개교돼 1910년대 암흑기에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옥을 배출한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평양의 자랑거리 숭의학교. 그러나 이 명문 학교의 교칙도 ‘명물’이 될 만했다. 기독교 정신을 배양하겠다는 명목으로 학생 전원을 기숙사에 입사시키고 ‘평양의 제2 감옥’이라는 별명을 가진 기숙사에서 거의 병영을 방불케 하는 규율로 훈육했다. 허가 없는 외출이 불가능한 ‘준감금’, 서신 왕래의 철저한 검열, ‘기독교 정신에 위반되는 행동’ 금지…. 추석에 친구의 묘에 성묘 가겠다는 학생들에게 사감 라진경이 “성묘는 이교도들의 풍속, 절대 못 가!”라고 호령하자 “라진경을 내쫓고 기숙사 규칙을 개정하라”는 구호 아래 1923년 10월 학생들의 다수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교원을 자신의 ‘마름’으로 여기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조선인 여학생들에게 하등의 양보를 하지 않으려는 태세였다. 기숙사에서 전등이 꺼지고 방에 불도 들어오지 않고 음식 반입도 안 돼 학생들은 차갑고 깜깜한 방에서 끼니를 굶게 됐다. 결국 선교사와 라진경의 위세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게 됐는데, 그중 한 명이 나중에 유명한 사회주의 소설가가 된 강경애(1906~44)였다. 학교에서 쫓겨난 그는 결국 “나의 독특한 개성을 발휘해 내 존재를 빛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사감과 교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입신출세에는 치명적이었지만 ‘개성 발휘’에 도움이 됐던 셈이다.

명성황후의 조카뻘 되는 민씨 일족 대표 격의 갑부 민영휘(1852~1935)가 1906년에 세운 휘문학교는 경성의 명문이었다. 1920년대 초반 교사로 시인 이병기(1891~1968)가 있었고 그 제자로 학예부장이던 이태준(1904~?)과 정지용, 김영랑, 박종화 등 나중에 유명해진 문학 청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민족 사학’의 표본이 될 만한 이 학교에서 같은 해인 1923년 11월에 동맹휴학 사건이 터져 결국 50여 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는다. 학생들이 교장의 퇴진을 요구해 들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을 잡지 은 이렇게 실었다. “원래 이 학교는 민영휘씨의 단독 경영이다. …학교를 신성한 교육을 하는 사회의 공공기관으로 생각하지 않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무슨 농장이나 회사로 생각한다. 따라서 학교의 직원을 자기의 마름이나 문객과 같이 본다. …그는 재정은 물론 일반 사무까지도 간섭하고 심지어 교원의 임용과 해고도 마음대로 한다. 임경재 교장이 만약 과단성이 있는 사람 같았으면 벌써 사직하여 학교 일과 민씨의 집안 일을 어떻게 엄연히 구분해야 하는지 보여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대우를 감수하고 여태까지 버티고 있고 학감, 교감과 함께 학교 사무를 다 처리하고, 나머지 선생님들이 오직 거기에 따르고 굴복·아첨만 한다. …”( 제43호, 1924년 1월)

‘주인’이 절대 군주로 군림하고 ‘권력의 피라미드’로 맹종과 아부만 강조하는 당시의 ‘명문 사학’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비슷한 오늘날의 우리 교육 사회가 떠오르지 않는가? 결국 세력가의 ‘마름’ 구실을 감수한 교육자를 학생들이 아무리 ‘스승’이라 해도 도저히 존경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을 당한 이태준은 나중에 소설 (1931)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 때 스파이질을 해서 출세를 도모한 기회주의적 지식인을 등장시킨다. 휘문학교에서 겪은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민씨 집단과 그 ‘마름’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작가 이태준’이 태어날 수 있었겠는가? 강경애의 경우도 그랬다. 그렇다면 위대한 문학은 결국 반란의 고통 속에서 발아되는 것이 아닌가? 과문의 탓인지 모르지만 필자는 어린 시절 본인과 같은 ‘모범생’ 스타일의 인간이 큰 작가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교권침해’와 교육운동의 과제

앞에서 본 것처럼 일제시대만 해도 ‘버르장머리 없이 웃어른에게 덤벼드는’ 청년기의 천재들을 조선에서 심심지 않게 구경할 수 있었다. 한국을 지금처럼 ‘윗사람’으로 군림하기 좋은 곳으로 만든 것은 결국 6·25 전쟁 이후의 살벌한 학살에 의한 ‘사상적 통일’, 즉 멸균실 수준의 반공주의와 박정희 시절의 학교 병영화 정책일 것이다. 학생들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교사들의 자율적 조직인 전교조마저도 끔찍한 탄압을 견뎌내야 하지 않았던가? 학교에서 병영의 분위기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이 시점에서, 두발 제한 반대 운동 같은 학생들의 학교 당국과의 동등한 대화의 시도가 달랑 ‘교권 침해’라고 오해받지 않고 결국 학생들의 학교 운영 참여와 같은 수준의 자치제도로 발전될 수 있게 하는 것이 한국 교육 운동의 과제가 아닌가 싶다. 학교가 ‘평등과 인권’을 몸으로 체험하고 실천하는 곳이 되지 않는다면 과연 대한민국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올 수 있는가?

참고 문헌:

1) , 서울문화사학회 엮음, 어진이, 2003.

2) “일제하 경기지방의 학생운동”, 홍선표- 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5.

3) (정음문고 3), 김성식, 정음사, 1974.

4) “1920년대 초 한국 개신교에 대한 사회의 비판”, 강명숙- 5.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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