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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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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

초보 러너 이정연 기자의 트레일러닝·로드러닝 비교 체험기
등록 2015-05-07 12:12 수정 2020-05-02 19:28
달렸다. 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 지난 3월부터였다.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 뛰다가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오는 순간엔 숨이 가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뛰어보곤 했다. ‘무엇을 위해서?’냐고 묻는다면 딱히 적당한 답을 찾기 어렵다. 뛰면 뛸수록 그렇다. 시작은 건강한 몸을 위해서라는 목표가 있었지만, 그 목표는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더욱 그렇다. ‘몸이 건강해지고 있다’는 징후는 찾기 어렵고 또 애써 찾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도 뛰어내고 말았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뛰는 즐거움이 커질수록 호기심도 커져갔다. 어디에서 어떻게 달리면 더 즐거울 수 있을까? 홀로 집 근처 하천가를 따라 한강까지 뛰면서 느꼈던 성취감과 즐거움을 좀더 키워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나섰다. 지난 4월11~12일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에서 있었던 ‘2015 제주트레일러닝캠프’와 지난 4월19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일대에서 열린 ‘뉴레이스 서울 2015’에 참가했다. 자연 속의 트레일러닝(Trail Running·비포장길, 오솔길 달리기)과 도심 속 로드러닝(Road Running·포장도로 달리기)의 비교 체험을 위해서다. 10km를 각각 2시간, 1시간에 걸쳐 달렸다.

트레일러닝

0km 지난 4월11일 오후 2시 제주 표선면 가시리 유채꽃프라자에 참가자 50여 명이 모여들었다. 참가자들의 옷매무새는 하늘의 엷은 구름만큼이나 가볍다. 트레일러닝을 위해 꼭 준비해야 할 것은 신발이다. 일반 로드러닝 운동화는 불규칙한 숲 속 돌길과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한 오름을 달리는 데 적합하지 않다. 트레일러닝화는 발목 꺾임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부상 방지에는 자신의 체력과 상태 등을 고려한 페이스 조절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아마추어 러너들의 경쟁자는 어제의 자신뿐이다. 이날 주최 쪽에서 마련한 10km 트레일러닝 구간은 따라비오름을 중심으로 짜였다. 유채꽃프라자 입구~잣성길~따라비오름~갑마장길~큰사슴이오름(대록산)으로 이어진다. 따라비오름 주변은 봄에는 유채꽃, 가을에는 억새가 지천인 풍경을 선물한다. 멀리 풍력발전기 지대 너머 완만하게 솟은 따라비오름과 큰사슴이오름의 정상이 보인다. 만만한 느낌이다.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2km 본격적인 코스로 들어서면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숲길이 시작된다. 선글라스를 벗었다. 벗지 않고서는 어두운 숲길 바닥의 지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잣성길(임금께 진상하는 말을 키우던 목장 ‘갑마장’의 경계를 표시하는 돌담길)은 현무암과 화산송이 무더기가 지천이다. 나무에서 뿜어져나온 향기와 시원한 공기에 취해 잠시 눈을 감을라치면 자빠지는 건 순식간이다. 뛰는 동안 ‘어이쿠!’ 하는 외마디가 절로 터져나온다. 그런 긴장감은 집중력을 가져다준다. 한가로이 산책하는 것이 아니라 러닝을 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게 한다.

제주 표선면 가시리 따라비오름에서 트레일러닝을 즐기고 있는 참가자들. 안병식 제공

제주 표선면 가시리 따라비오름에서 트레일러닝을 즐기고 있는 참가자들. 안병식 제공

4km 따라비오름으로 이어지는 길이 시작되자마자 ‘헉헉’ 소리가 나온다. 산책할 때는 만만하기만 하던 오름 초반부 길이 한라산 백록담 오르기만큼이나 힘에 부친다. 평소 잘 쓰지 않던 근육도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다. 트레일러닝 캠프 레이스 디렉터인 안병식씨는 “트레일러닝 훈련을 위해서 웨이트트레이닝 등을 통한 하체 근육 단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대로 몸으로 느낄 수 있다. 허벅지는 ‘이게 내 몸인가’ 싶을 정도로 무거워진다.

그 무거움을 한번에 날려버릴 수는 있다. 따라비오름 정상의 청량한 바람을 맞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진 느낌이다. 정상 직전 마지막 가파른 구간을 아주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뛰어오른다. 일그러진 얼굴에 바람이 닿자 금세 웃음이 난다. 이토록 간사한 몸이라니. 아니 솔직한 반응이라 해야 하나.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다 좋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7km 따라비오름 정상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달려 큰사슴이오름으로 향하는 길. 조금은 지루한 평지 달리기가 이어진다. 두 오름 사이에서 풍력발전기가 쇳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방금 전 따라비오름 정상에서의 청량함은 바로 옛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또 다른 즐거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사슴이오름 아래는 노란 유채꽃 카펫이 깔려 있다. 처음 느껴진 꽃향기는 아찔했다가 주변의 온 공기를 편안하게 감싼다.

큰사슴이오름 위 트레일러닝 구간은 따라비오름과 완전히 색다르다. 따라비오름은 분화구와 오름 능선에 나무가 많지 않은 민오름이다. 큰사슴이오름은 이와 달리 키가 크지 않은 푸릇한 나무들이 능선길을 감싸고 있다. 구간 후반에 들어서서인지 앞뒤에 보였던 다른 참가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온전히 그 길을 내가 차지한 느낌이다.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나의 유일한 러닝메이트다. 그 기분이 참을 수 없이 좋아 크게 소리도 질러본다.

10km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러닝에서도 마찬가지다. 구간 종반 다리에 힘이 풀린다. 트레일러닝을 할 때는 이 순간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다리를 끌다시피 뛰게 되면 비포장길의 돌부리에 걸려 휘청이기 쉽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무릎을 들자!’ 뛰는 즐거움에 취해 결국 마지막에 길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유채꽃밭을 가로질러 종점을 향해 달렸다. 꽃들에게 미안했지만, 그 순간은 황홀했다.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오는 10월 제주트레일러닝대회가 열린다. 3일 동안 100km를 달려볼까? 마음이 일었다. 가을 억새를 가르며 뛰는 그 황홀함을 놓치고 싶지 않다.

로드러닝
‘뉴레이스 서울 2015’에는 2만 명이 참가했다. 박승화 기자

‘뉴레이스 서울 2015’에는 2만 명이 참가했다. 박승화 기자

0km 자그마치 2만 명이다. 형광 주황색 티셔츠를 함께 입은 사람들이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 모였다. 혼자서, 때로는 동네 친구와 둘이서 한가롭게 한강을 뛴 게 로드러닝 경력의 전부다. 그런 초심자에게 2만 명이 떼지어 뛰는 경험은 그 자체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스피커에서 터져나오는 신나는 음악은 심장을 더욱 쿵쾅거리게 한다. 참가자들이 레이스를 준비하는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일종의 동아리인 ‘러닝크루’ 회원 수십 명이 친목을 도모하며 잘 달려보자고 의지를 다지기도 하고, 유모차를 끌고 나온 참가자는 뛰기 전 자신의 컨디션보다 유모차에 탄 아이를 챙기기에 더 바쁘다. 주변 참가자들을 모두 오징어로 만들어버리는 연예인 참가자들은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거의 완벽한 자태다. 참가자가 다양하고 많아 그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크다. 2만 명의 참가자는 세 번에 걸쳐 출발했다. 세 번째 출발팀에 속해 뛰기로 했다. 출발할 때마다 터지는 폭죽 소리에 환호와 파이팅 소리가 더해진다.

2km 경기장을 벗어나 신천역으로 향하는 올림픽로에 올라섰다. 편도 5차선 도로가 2만 명의 로드러너들을 맞았다. 도심 속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였다. 도심 레이스를 빼놓지 않고 참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야기한다. “언제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도로를 이렇게 달려보겠냐”고. 그 이야기가 솔직히 와닿지 않았다. 강가도 아닌 매연이 가시지 않은 도심 도로에서 뛰는 게 무슨 매력이 있겠냐고 생각하는 축에 속했다. 인정한다, 이제.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꼭 다시 뛰어보리라 결심도 했다. 광클(빛의 속도로 클릭)로 참가 신청을 성공하는 게 관건이겠지만.

4km 2km 구간을 지나자 물을 건네는 자원봉사자들이 러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전날의 과음으로 온전하지 못한 컨디션이었다. 레이스에 꼭 참가해야 했기에(이 기사를 위해서라도) 숙취 해소의 노력을 전날 잠들기 전까지 기울였지만 허사였다. 제대로 뛸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뛸수록 몸과 머리는 가벼워졌다. ‘해장 달리기’라고 해야 할까. 추천까지는 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언젠가 또 이런 상황이 생긴다면 주저 없이 뛰어야겠다 생각했다. 잠실역을 지나 잠실대교로 향하는 길,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오르막 구간이 나타났다. 완만했지만 속도는 서서히 줄었다. 그 순간 맞은편에서 반환점을 돈 참가자들이 떼지어 달려왔다. 아, 부럽다! 물 한 잔에 오아시스 만난 듯이 기뻐했다가, 곧 레이스를 끝마칠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렇게 즐거움과 힘듦이 수없이 교차하는 순간 시원한 강바람이 느껴졌다. 복잡하고 괴로운 뱃속과 머릿속은 개운해졌다.

가파른 지형을 뛰어오르려면 평소 근력 훈련도 필요하다(왼쪽). 로드러닝 마지막 구간에서 속도를 내어 달려보았다. 안병식 제공. 박승화 기자

가파른 지형을 뛰어오르려면 평소 근력 훈련도 필요하다(왼쪽). 로드러닝 마지막 구간에서 속도를 내어 달려보았다. 안병식 제공. 박승화 기자

7km 4~6km 잠실대교 구간은 해방감의 정점을 선물한다. 다리 위 로드러닝 참가자들의 얼굴에서도 그런 느낌을 읽을 수 있다. 유모차를 끌고 가던 한 아빠 참가자는 다른 일반 참가자들 못지않은 속도로 내달리며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한쪽 다리에 의족을 한 러너는 여유롭게 한발 한발 내디뎠다. 저마다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뛰는 사람들이지만, 하나의 팀은 아니지만 모두가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소속감을 주는 듯했다.

그들 모두를 응원하는 마음, 스스로를 응원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그래요, 우리 잘 달리고 있어요. 이렇게 끝을 향해 가면 되는 거예요.’ 대규모 도심 레이스가 주는 즐거움 중 하나가 이런 소속감이 아닐까 싶었다. 프로는 아니지만 ‘러너’의 이름으로 서로와 스스로를 격려하며 자신과 싸우는 이들과 하나 되는 느낌을 준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달리는 느낌을 준다.

10km 구간 종반 올림픽주경기장 입구에 들어설 때 실력은 천지 차이지만 프로 마라토너들의 마음을 쪼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곧 이기게 될 것이라는 마음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다. 주경기장 트랙에 들어서니 마치 진짜 선수가 된 느낌이다. 푹신한 트랙을 발로 힘차게 딛자 도로 위에서보다 넓은 보폭으로 뛰게 된다. 그렇게 진짜 스퍼트를 해본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다리는 이미 내 다리가 아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짭짤하다. 몸은 뛰고 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웃게 된다. 어제보다 나은 나를 이제 곧 만날 수 있으니까. 그걸로 됐다. 그거면 됐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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