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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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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에도 재키 로빈슨은 많다

인종차별 역사 잊지 않으려 첫 흑인선수 기리는 메이저리그
명멸한 스타와 감동의 이야기들 우리도 야구사에 남겨야
등록 2013-08-14 09:16 수정 2020-05-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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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이 시작하기 전, LA 다저스 선수단은 한 영화의 시사회에 참석했다. 영화의 제목은 .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선수였던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 재키 로빈슨의 일대기이다. 다저스 선수단은 65년 전에 그들의 유니폼을 입은 흑인선수가 백인들이 보내는 경멸과 모욕에 맞서 어떻게 싸웠는지, 지금 그들이 입고 있는 유니폼에 어떤 땀과 역사가 묻어 있는지를 지켜보았다(다저스의 루키 류현진이 이 시사회에 불참한 것은 큰 실수다).

하루를 온전히 로빈슨에 바치는 MLB

1997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입성 50주년을 맞아 그의 등번호였던 42번을 전체 구단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한다.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등번호로 42번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매년 4월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해 이날 하루는 모든 팀의 선수들이 유니폼에 42번을 새기고 뛴다. 이날만은 추신수도 류현진도 42번이다(한편 42번이 전 구단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기 전에 이미 등번호로 사용하고 있던 선수는 42번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데 그 선수가 뉴욕 양키스의 마무리 투수, 살아 있는 전설 마리아노 리베라다. 그는 현재 42번을 자신의 등번호로 쓰는 유일한 메이저리거다).

재키 로빈슨 이전의 메이저리그는 오직 백인들만의 리그였다(흑인들은 니그로리그라는 별도의 리그에서 뛰어야 했다). 인종차별의 역사는 메이저리그가 가진 최악의 불명예다. 지금 메이저리그가 시즌 중 하루를 온전히 재키 로빈슨에게 바치는 이유는 그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지나간 논란이지만, 롯데 자이언츠의 흑인 외국인 투수 유먼을 상대로 한 김태균의 농담은 메이저리그였다면 머리를 향하는 빈볼을 맞고, 자기 팀원들에게도 외면당했을 망언이다. 나는 김태균이 특별한 악의가 있어 한 말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마도 이것은 야구에 대한 성숙한 기억의 문화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메이저리그는 돈벌이에 혈안이 된 장사꾼으로 넘쳐나는 정글이지만, 재키 로빈슨 데이와 같이 그들의 부끄러웠던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리그의 품격을 지킨다.

7월29일, 일본 출신의 외야수 마쓰이 히데키는 그의 메이저리그 첫 팀인 양키스와 하루짜리 계약을 맺고 양키스타디움에서 수만 관중의 기립박수 속에 양키스 선수로서 은퇴식을 치렀다. 프랜차이즈 스타의 은퇴식을 위한 ‘하루 계약’은 메이저리그의 전통이기도 하다. 보스턴의 심장 노마 가르시아파라, 필라델피아의 강타자 팻 버렐 등의 선수들이 하루짜리 계약을 맺고 그들이 전성기를 보냈던 팀에서 그 유니폼을 입고 팬들의 박수와 함께 역사가 되었다. 메이저리그의 아시아인 최다승 기록을 가지고도, 미국과 한국 어디에서도 은퇴식을 치르지 못한 박찬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야구는 방어율, OPS(출루율+장타율), WHIP(이닝당 출루 허용)와 같은 자신만의 수학을 가진 스포츠이지만, 야구를 기록의 경기라고 하는 것은 타율과 방어율처럼 건조하게 산출된 숫자 때문만은 아니다. 피에 젖은 발목의 고통을 참으며 공을 던져 우승을 이끈 투수, 머리에 공을 맞고도 재기해 그 투수에게 홈런을 날려버리는 타자, 수십 년 전의 우승 기억을 심장에 품은 채 어른이 되어가는 팬, 이들이 만들어내는 벅찬 ‘역사의 기록’이 야구를 진정 기록의 스포츠로 만든다.

죽고 나서야 사직구장 올 수 있었던 최동원

우리는 어떠한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 최동원은 죽고 나서야 사직구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리그 사상 유일의 30승 투수 장명부는 일본에서 마작을 하다가 죽었다는 단신 뉴스로만 남았다. 프로야구 초창기, 리그를 이끌었던 재일동포 선수들은 생사도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싸워온 역사는 해당 선수들의 아픈 개인사로만 남았다.

한국 프로야구는 이미 출범 30년을 넘기며 만만찮은 역사를 쌓아온 리그이다. 그사이 야구장에서는 숱한 스타들이 명멸해갔고, 눈물과 탄식이 묻어나는 이야기들이 쌓였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역사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30년간 야구장에서 만들어온 가슴 벅차고, 때론 아팠던 역사에 품격을 입혀야 한다. 우리에게도 재키 로빈슨은 많다.

김준 칼럼니스트·사직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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