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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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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투표 불참이 다른 구단에도 영향”

선수노조 출범시킨 프로야구선수협 손민한 회장
“KBO, 단 한 번의 대화 요청도 없었다”
등록 2009-12-18 06:22 수정 2020-05-02 19:25

2009년 가을 두산과 롯데가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에서 맞붙었다. 롯데 자이언츠로서는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었다. 롯데의 영원한 에이스 손민한(34) 선수는 그때 그 자리에 없었다. 부상 때문이었다. 10월2일 그가 미국 LA 다저스 구단 지정병원인 조브클리닉에서 오른쪽 어깨 관절경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손 선수에 관한 이번 시즌 마지막 기사였다.

프로야구선수협 손민한 회장

프로야구선수협 손민한 회장

손민한 선수의 이름이 다시 언론에 등장한 것은 12월2일이었다. 이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는 제10차 정기총회를 열어 손 선수에게 제6대 회장직을 맡겼다. 2007년 말 2년 임기의 선수협회장에 오른 뒤 두 번째였다.

마운드 위에서 ‘민한신’ 또는 ‘전국구 에이스’로 불렸던 손 선수가 애칭 대신 ‘회장님’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언론에 등장한 이유는 뭘까? 선수노조 설립이라는 인화성 강한 이슈 때문이다. 12월2일 만장일치로 손 선수에게 회장직을 다시 맡긴 선수협은 이날 선수노조 설립에 관한 찬반투표를 함께 진행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등록된 선수 530여 명 가운데 273명이 총회에 참석했고, 노조 설립 안건은 통과됐다. 투표에 참가한 선수 205명 가운데 91.7%에 해당하는 188명이 찬성한 결과였다.

이 12월9일 서울에서 만난 손민한 회장의 얼굴은 썩 밝지 않았다. 선수노조 설립이라는 긴 싸움의 선봉에 섰다는 부담감이 엿보였다. 대신 선수노조의 필요성을 말할 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손 회장은 “KBO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선수협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화. 손 회장이 말하는 선수노조의 필요성은 이 한마디에 응축돼 있었다.

-선수협 회장 연임을 축하합니다. 축하하는 게 맞는 건가요.

=별로 축하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축하를 받더라도 나중에 받아야죠.

-롯데 구단 쪽에는 회장직을 연임하지 않겠다고 했다면서요.

=구단은 선수협 회장직을 다시 맡는 건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구단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제 개인이나 팀을 생각할 때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죠. 무조건 회장을 그만두겠다거나 연임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건 아니었습니다. ‘회장을 맡지 않을 수 있다면 맡지 않는 쪽으로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정도로 말하고 총회 참석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회장이라는 자리가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고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회장직 연임을 수락했나요.

=서울에 올라오기 전 롯데 이상구 단장에게도 말했어요. 내가 회장을 맡지 않는다면 누군가 다른 선수에게 그 자리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 책임과 고통이 고스란히 해당 선수와 구단에 옮겨갈 것이다. 회장을 다른 선수에게 떠넘기는 건 근본적 해법이 아니지 않습니까.

-2000년 선수협 파동을 생각하면 구단의 압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아직까지는 압력이나 압박으로 받아들일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물론 앞으로 겪을 수도 있겠죠. 그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어서 부담은 없습니다. 구단에서도 나를 알기 때문에 압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12월2일 선수노조 설립 찬반투표가 있었죠. 찬성률은 높았지만 투표 참여율은 높지 않았습니다. 선수노조에 대한 선수협 내부의 인식이 부족한 것 아닌가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반대로 묻고 싶습니다. 만약 구단이 간섭하지 않았다면 투표를 안 할 선수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 것 같습니까. 선수들이 투표를 거부하거나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LG 이야기를 하게 돼 그런데요, 재활선수라는 이유로 총회를 불과 하루 앞두고 20명 가까운 선수를 데리고 해외로 나가버렸어요. 설득해봤죠. 하루 늦게 출국하는 게 큰 차이가 있겠느냐, 총회만 참석해달라. 결국 다 떠났습니다. 언론에서는 삼성과 LG 선수단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사실만 부각시키는데, 구단에서 어떠한 방해도 하지 않았다면 선수 530여 명 가운데 투표에 참여하지 않을 선수는 개인적 사정이 있는 10여 명 정도였을 겁니다.

-선수노조 찬반투표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투표를 시작하니까 선수들이 다른 팀 눈치를 봐요. 투표 자체를 두려워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게 현실인데, 잘못된 거죠. 그만큼 선수들은 약자입니다.

-삼성도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죠.

=답답하죠. 총회에서 삼성 선수들을 만났는데, 다른 구단 선수들 앞에서 얼굴을 못 들어요. 제가 삼성 선수들에게 말했습니다. 부끄러워할 것도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고개 들고 떳떳하게 참석해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요. 그런데 찬반투표가 시작되자마자 삼성 배영수 선수가 와서 투표장을 나가겠다는 겁니다. 정말로 모두 나가버렸습니다.

-회장으로서 제지할 수도 있지 않았나요.

=말렸죠. 투표는 하지 않더라도 당당하게 앉아서 자리를 지켜달라고도 했고, 여기서 삼성 선수들만 가버리면 더 우스워진다고도 했습니다. 그래도 굳이 퇴장하겠다고 하기에, 정 앉아 있기 불편하면 잠시 총회장을 벗어났다가 투표 이후 돌아와달라고 했습니다.

-반대하거나 기권할 수도 있는데 굳이 총회장을 벗어난 이유는 뭘까요.

=투표를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총회장을 나갈 이유는 없었죠. 투표 안 하면서 앉아 있는 게 다른 선수들 보기에 미안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구단의 지시가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무기명 비밀투표니까 투표장에 남아 있다가 어설프게 휩쓸려 투표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바보가 아니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죠.

-LG도 투표에 불참했는데, 마찬가지였습니까.

=삼성이 안 하면 자신들도 안 하겠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LG 선수단이 직접 그렇게 말했습니까.

=전체 선수단 앞에서 그렇게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삼성의 투표 불참이 LG뿐만 아니라 나머지 7개 구단 전체에 투표 방해의 구실을 제공하는 겁니다. ‘삼성이 안 하는데 너희는 왜 하냐. 삼성이 하지 않으면 너희도 하지 마’ 이런 식인 겁니다.

롯데 자이언츠 손민한 선수(오른쪽)가 12월2일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제6대 회장직을 맡았다. 9일 <한겨레21>과 만난 그는 한국야구위원회의 일방적 야구 행정을 비판하며 선수노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왼쪽은 권시형 선수협 사무총장.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롯데 자이언츠 손민한 선수(오른쪽)가 12월2일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제6대 회장직을 맡았다. 9일 <한겨레21>과 만난 그는 한국야구위원회의 일방적 야구 행정을 비판하며 선수노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왼쪽은 권시형 선수협 사무총장.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투표 이후의 각 구단 반응도 확인했나요.

=총회 바로 다음날 모 구단 고참 선수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구단이 투표 참여 철회 성명 발표를 요구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무순으로 정한 투표 순서를 트집 잡는 구단도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투표한 팀의 선수들에게 해당 구단이 ‘너희가 뭔데 앞장서냐’며 압박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죠.

-선수노조가 필요한 이유는 뭔가요.

=단적인 사례로 비활동 기간이 지켜지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매년 12월과 1월 두 달을 비활동 기간으로 정해놓고 있는데, 지금도 구단의 강압으로 대부분의 선수가 강제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선수들 불만이 높습니다. 1년 열두 달 가운데 프로야구 선수가 한 가족의 가장으로, 혹은 사회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간은 고작 두 달입니다. 이 비활동 기간만이라도 지켜달라는 겁니다.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지금이 비활동 기간이죠.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대다수 팀이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선수협 쪽으로 비활동 기간의 강제적 단체훈련을 막아달라는 전화도 많이 옵니다. KBO 이사회에서는 비활동 기간을 지키지 않는 팀에 벌금 5천만원을 부과하도록 했는데, 실효성이 거의 없습니다.

-규정이 그렇다면 훈련을 하더라도 나가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선수에게 불이익이 가겠죠. 상대적으로 약자인 선수들은 구단이나 감독이 한마디 하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KBO와 협의는 해봤습니까.

=비활동 기간 준수 등 17개 제도개선안을 가지고 지난해 겨울 선수협 설립 이후 처음으로 KBO를 찾았습니다.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선수협과 KBO 양자 모두 웃으면서 대화도 하고 악수하며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오늘까지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못 받아들인다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묵살당한 겁니다.

-KBO에서는 오히려 선수협이 대화에 임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언론 플레이라고 생각합니다. KBO는 어떤 규정을 내놓더라도 일방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제도나 규정을 일방적으로 언론에 발표하는 식이었지, 선수협이나 선수들을 불러 논의하자는 시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요.

=‘군보류수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군복무 중인 선수에게 입대 당시 연봉의 25%를 지급해야 했습니다. 2008년 2월18일 KBO가 이사회를 열어 이걸 없애면서도 선수협과 일절 상의가 없었습니다. 연봉감액 제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해 연봉 1억원을 받았다면 올해 연봉은 40% 이상 깎지 못하는 조항이 있었는데 그걸 없앴습니다. 실제로 히어로즈 구단이 창단되면서 한 해에 연봉의 70%가 깎인 선수도 있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KBO가 선수협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데요.

=언론에는 선수협과 논의한다고 말하겠죠. 실질적으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노조 설립까지 오게 된 겁니다.

- KBO가 선수협의 17개 제도개선안을 받아들일 경우 선수노조 출범을 유보할 수도 있습니까.

=선수노조 설립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노조를 설립하지 않는 조건으로 협상에서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음달 다시 선수협과 상의 없이 바꿔버리면 그만인데요. 지금까지 그렇게 당해왔습니다.

-선수노조가 출범한다면 구단 운영을 포기하는 구단이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있던데요.

=그런 일은 생길 수 없습니다. 만약 노조로 인해 구단을 없앤다면 해당 기업 이미지에도 큰 타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2000년 선수협 출범을 주도한 선수는 모두 원치 않는 방출이나 트레이드를 겪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떨까요.

=트레이드 정도는 있을 수 있겠죠. 각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어야죠. 그동안 시간도 많이 흘렀고, 야구팬도 많이 늘었습니다. 또다시 그런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언론 보도를 보니 “선수 생활 그만할 각오도 하고 이 일을 시작했다”는 발언도 했더군요. 평생 해온 야구를 그만두면 뭘 할 생각이었습니까.

=나이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야구 그만두고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구단에 비해 롯데 프런트는 인간적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제가 스스로 ‘트레이드도 각오하고 있다’ 이렇게 나오면 괜히 롯데만 자극하는 결과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냥 ‘불이익도 각오하고 있다’ 정도로 해주시죠.

손민한 회장은 운동복 차림이었다. 10월2일 미국에서 수술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줄곧 서울 방이동 R&C재활센터에서 재활을 위해 땀을 쏟고 있다. 재활과 훈련에 집중하려면 아무래도 지방보다는 서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활동 기간인데도 일요일을 뺀 매일 아침 9시30분부터 오후4시까지, 그것도 가족과 떨어진 서울에서 스스로 훈련에 매진하는 까닭은 부활에 대한 강한 집념 때문이다. 손 회장은 “재활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를 경우 내년 1월초에는 공 던지는 것이 가능하고, 4월초까지는 정상 피칭이 가능한 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선수협 회장을 맡았기 때문에 부진했다는 핑계는 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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