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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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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배꼽 외계와의 통로

듀나의 SF <대리전>과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과 함께 걷는 부천 문학 산보
등록 2020-02-04 10:59 수정 2022-08-12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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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도시>의 저자 김시덕과 함께 걸었던 서울 영등포 산책(제1292호 레드기획)은 경인로 부천과 부평으로 이어졌다. 도시화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도시’의 주인공은 ‘경인로’다. 경인로는 ‘연선 모든 지역이 도시화되었다’는 말처럼 일제시대부터 발전했다. 경인로를 따라 도시의 발전을 더욱 부추긴 것은 전철 개통이었다. 부천은 근대 문화재가 드문 데 비해 2017년 유네스코 문학도시로 지정되었다. 판타스틱영화제와 만화축제 등 ‘장르’의 축제를 벌이고 만화박물관이 있다. 듀나 작가가 부천을 SF 무대로 가져오면서 부천의 ‘장르 본색’은 더 강화되었다.

원조 ‘조마루감자탕’의 동네

소설가 양귀자의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은 ‘원미동’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동네로 만들었다. 첫 편인 ‘멀고 아름다운 동네’는 은혜네 이삿날 이야기다. 서울의 미아리·화곡동·쌍문동을 전전하던 은혜네는, 갑작스럽게 집을 비워야 해서 새로 살 집을 알아보던 중 부천 이야기를 듣고 갔다가 연립주택을 산다. 집을 샀지만 이사는 썩 달갑지는 않다. “넓고 넓은 서울에서 그는 여태껏 집을 갖지 못하고 살았다. 희망 없이 살았다는 말과도 다름이 없다. 그런데 이제 집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것은 서울이 아니고 부천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도 집과 희망은 동의어인가. 그는 대답을 찾지 못하였다. 아니 쫓겨가는 것은 아니다, 라고 거듭 생각하기는 하였다.”

그가 이사한 원미동의 한자를 풀면 ‘멀고 아름다운 동네’가 된다. 원미동의 어원은 ‘마지막 땅’에서 설명된다. ‘멀리서 봐야 아름다운 산’이라 해서 멀뫼(멀미산)라고 부르던 산은 원미산이 되었다. 원미동이 되기 전에는 ‘조종리’ 또는 ‘조마루’라고 했는데 조씨 일가 집성촌이어서다. 조마루는 지금도 삼거리, 사거리 이름으로 남아 있다. ‘조마루감자탕’ 본점이 조마루사거리에 있다. ‘멀리서 봐야 아름다운 동네’가 ‘멀고 아름다운 동네’가 된 사연은 마뜩지 않아도 이사해 들어가는 동네에 정이라도 붙이려 해서일 것이다.

‘방울새’가 1985년, 연작이 본격적으로 연재된 것은 1986~87년, 원미동은 새 동네였다. 부천시 자체가 새로웠다. 1973년 부천군이 폐지되고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된다. 부천이란 지명은 인천과 부평에서 한 자씩 따와 1914년 만들어졌다. 소사는 복숭아로 유명했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에서 이사 트럭이 길을 잘못 들어서 소사동으로 진입하자 은혜 엄마는 말한다. “소사라면 소사 복숭아가 나는 곳 아녜요.”

서울과 시흥, 광명, 인천과 물려 있는 땅은 행정구역 개편 때마다 동을 주고받으며 지도를 변화시켰다. 먼저 들어선 것은 공장이었다. 아남산업, 삼성전자 반도체, 로켓트보일러 등의 공장이 부천에 있었다. 1973년 150곳이 안 되던 기업체는 1987년 1850곳으로 늘어났다. 삼성전자 반도체(당시 한국반도체)는 이곳에서 1984년 10월 256K 디램(DRAM)을 개발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옛 반도체 공장 자리(현 온세미컨덕터코리아 부천공장)에 ‘한국 반도체의 산실’ 기념석이 서 있다.

부천을 서울의 ‘베드타운’으로 변모시킨 것은 지하철 1호선이다.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날은 수도권 전철 개통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당시 유일한 전철, 나중에 ‘1호선’이 된 전철을 타고 서울을 오가는 이들을 위한 거주지가 전철역마다 우수수 생겼다. 1975~80년 전국 인구 증가율이 27.7%, 서울이 21.4%였다. 부천은 102.9%인데, 이 수치는 비슷한 시기 수도권 다른 지역의 인구 증가를 능가했다. 1981~86년 안양은 56%, 수원은 48%, 부천은 126% 가까이 늘어난다. “부천시 송내역, 역곡역, 부천역에서 타고 내리는 사람이 이마적에는 하루에 삼십만 명이 훨씬 넘어서 출퇴근 시간에는 표를 사려는 사람이 역 광장에까지 대여섯 줄로 늘어선다.”(<한국의 발견> 시리즈 ‘경기도’ 편)

‘서울은 만원’이었고 부천은 그 흘러넘치는 사람들을 받아주었다. 원미동 23통에는 최근 들어와 서울로 통근하는 사람들(은혜네, 진만이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올라와 가게를 하는 이들(행복사진관, 원미지물포, 강남부동산 등), 원래 이곳에 살던 사람들(강 노인네)이 골목 양쪽으로 살고 있다. 이 지도는 <원미동 사람들>(1987년 문학과지성사) 초판 표지에 그려졌다. 거리가 반듯반듯한 이유는 시청 부근에 새로 조성된 신시가지였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원미동 사람들> 책에는 마을 지도가 표시돼 있다. 23통5반은 지금의 원미로 149번길에 해당한다. 원미어울마당 앞 ‘원미동 사람들’ 거리에 조성된 조각상. 원미구에는 유독 교회가 많다.

왼쪽부터 <원미동 사람들> 책에는 마을 지도가 표시돼 있다. 23통5반은 지금의 원미로 149번길에 해당한다. 원미어울마당 앞 ‘원미동 사람들’ 거리에 조성된 조각상. 원미구에는 유독 교회가 많다.

100m마다 교회가 있는 건

은혜네 이사 트럭이 지표로 삼은 부천시청은 원미구청을 거쳐 현재는 원미어울마당이 되었다. 지금 이곳에 ‘원미동 사람들’ 조각상이 늘어서 있다. 앉아서 책을 읽으며 담배를 태우는 이가 원미동 시인이고, 삽을 든 이가 강 노인이다. 짐을 나르는 건 형제슈퍼 김 반장. 원미어울마당을 둘러본 뒤 원미로 149번길로 들어선다. 대화파크아파트(1999년)에는 ‘소설 원미동 사람들 언저리’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표지판에는 소설의 주무대인 무궁화연립이 있던 자리이며, 작가가 원래 2층짜리 무궁화연립을 3층으로 가상으로 만들어 형제슈퍼 옆에 옮겨놓았노라고 쓰였다. 건너편 유림연립(1978년)은 은혜네와 원미동 시인이 살던 무궁화연립과 똑같은 구조다. 원단 공장 박군이 빌렸던 지하실 방처럼 화장실이 없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강 노인의 밭은 여전히 건물은 올라가지 않고 공원으로 조성됐다.

마지막 에피소드 ‘한계령’에서 ‘나’로 등장하는 은혜의 엄마처럼 양귀자 작가는 무궁화연립에 10년을 살았다. 딸 이름은 은혜가 아니지만. 부천문화재단에선 부천시청, 조각공원, 양귀자문학공원까지 이어지는 ‘원미동을 사랑한 양귀자’ 탐방길을 제안해놓았다.(지도1 참조, 원지도는 정지용 시인 거주지 터까지 이어진다. QR코드 참조.) 이 길을 만든 카툰캠퍼스 이원영 이사는 “작가가 상상과 실재를 섞어 ‘원미동 사람들’을 살려냈다. 급속도로 재개발이 진행돼, 소설의 흔적을 보존한 유림연립도 언제 헐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실제 원미구 거리에서 눈에 띄는 것은 거의 건물마다 하나씩 보이는 교회들이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교회가 많은 구 1위가 부천시 소사구, 3위가 부천시 원미구다. 각각 104m, 111m마다 교회가 하나씩 있다. 큰 교회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부천은 지구의 배꼽”이라고 종교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다고 한다(이원영 이사). 그래서 많은 개척교회가 부천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한 범박동은 기독교 계열 종교인 천부교의 집단거주지 신앙촌(전도관)이 있었던 곳이다(소사신앙촌). “1970년대 말에는 범박동 사람의 99퍼센트쯤이 전도관에 나가”(<한국의 발견> 시리즈 ‘경기도’ 편)는 걸로 조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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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나키샬레 아이스크림은 못 먹지만

어쩌면 곳곳의 종교시설 중 하나가 외계인과 연결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숙주들이야 서울이나 인천에도 있지만 가장 많은 곳은 역시 부천이었지. 부천은 지구의 대문 도시였으니까.”(<대리전>, 2005년) 외계인을 위한 여행사가 등장하는 듀나의 소설 <대리전>의 배경도 부천이다. ‘나’는 우주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를 하고 있다. 외계 관광객이 지구인 숙주의 몸속에 들어가 ‘체험 여행’을 한다. 그런데 외계인이 숙주 몸에 들어온 뒤 탐사선을 강탈해 달아난다. 작은 공처럼 생긴 우주선을 안고 날아가거나, 어린이용 장난감으로 전투를 벌이는 등 시종일관 기발하면서 유쾌하다. 숙주로 알코올중독자나 행려병자를 이용한다는 설정이 지금 보면 마냥 유쾌할 순 없지만.

“네가 무나키샬레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왔을 때, 솔직히 난 너를 알아보지 못했어.” <대리전>은 ‘동네SF’라고 불릴 정도로 첫 문장부터 부천 곳곳의 지명이 등장한다. 외계언어를 상기하는 ‘무나키샬레’는 실제 홈플러스 상동점에 있었던 아이스크림 체인점이다. 미국 유타주 주립대학의 연구소가 만든 유기농 아이스크림을 한국으로 직송했다고 한다.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름엔 아이스크림과 겨울엔 핫도그를 팔았다”는 뉴스가 <대리전>에 등장하는데, 이 가게가 세상에 남긴 흔적이다.

무크지 <오늘의 SF #1>에서 전혜진 작가는 <대리전>을 들고(<두 번째 유모>에 수록) ‘전쟁’의 흔적을 찾아가는 탐사로를 제안한다. 상동역에서 시작해, 부천시청의 이마트(옛 월마트)를 거쳐 외계인과 한판 대결이 벌어지는 삼정초등학교 운동장까지 가는 길이다(지도2 참조).

원미동에서 조마루사거리를 지나 <대리전>의 주요 장소인 길주로를 향해 걷는 것은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길주로는 12차선 도로로 서울지하철 7호선과 나란히 달린다. 부천의 남쪽이 경인로와 1호선에 의해 나뉜다면, 부천의 북쪽은 이 길주로와 7호선에 의해 나뉜다. 길주로 양쪽으로 부천 최대의 상업지대가 펼쳐졌고, 북쪽은 아파트 단지로 연결된다. 원미동에 있던 부천시청도 길주로에 큰 건물을 지어 이주했다.

현재 부천시청이 자리잡은 길주로는 12차선의 넓은 길이다(위). 뉴코아아울랫 부천점에서 중동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아파트의 만화 벽화들.

현재 부천시청이 자리잡은 길주로는 12차선의 넓은 길이다(위). 뉴코아아울랫 부천점에서 중동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아파트의 만화 벽화들.

사랑도 하고 멸시도 하는

길주로를 걷는 것은 고속도로를 걷는 것처럼 길고 재미없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걷는 길보다 건너편 길이 눈에 훤하지만 건너갈 수 없다. 건너기에 너무 넓고 건널목은 뜸하다. 듀나의 <아직은 신이 아니야> <민트의 세계>에서처럼 배터리에 에너지를 받아 염력으로 몸을 띄울 수 있다면 또 몰라도. 길주로에서 삼정초등학교로 가는 길과 만나는 아파트 단지는 은하마을이다. 이쪽은 미리내마을이다. 길주로에서 만난 청소년 5명은 휴대전화를 들고 포켓몬을 잡고 있었다. “번치코(포켓몬 중 하나)를 잡았다고?” “얼마 전에 송내역에 떴다고.” “그게 말이 되냐?”

중동역에서 송내역으로 가는 길에는 강경옥의 <별빛 속에>, 이동건의 <유미의 세포들> 등 대형 만화 벽화를 아파트 외벽에 그려놓았다. 신기한 풍경이다. <대리전>에서 밝히는 부천이 관문으로 선택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건 애향심과 멸시가 반반씩 섞인 사장의 판단 때문이었어. 사장은 부천에서 태어나 부천에서 자란 사람이었어. 그리고 그 때문에 부천이 얼마나 무개성적이고 대체 가능한 곳인지 알고 있었지.”

글·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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