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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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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먹고 자란 한류 콘텐츠의 힘

20년 전 건설현장 노무관리 뺨치는 방송가 갑질·탈법 실태…

‘방송계갑질119’ 온라인 채팅방에 쏟아지는 고발 사례
등록 2018-01-23 07:25 수정 2020-05-02 19:28
tvN 드라마 <혼술남녀>를 찍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한빛 PD의 유가족이 2017년 4월18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tvN 드라마 <혼술남녀>를 찍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한빛 PD의 유가족이 2017년 4월18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다스는 MB 것, 상품권은 우리 것!’

서울 여의도와 상암동 일대에 이런 내용의 ‘펼침막’을 내걸자. 비정규직 방송노동자들이 비실명으로 각자 고충을 털어놓는 ‘방송계갑질119’ 온라인 채팅방에 최근 올라온 아이디어다. 방송가 안팎에선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방송사의 잘못된 관행이 세상에 알려져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전세계에 ‘한류’를 확산시킨 1등 공신으로 꼽히는 지상파 방송의 ‘콘텐츠의 힘’이, 실은 오랫동안 고착화된 방송산업의 착취 구조에 있었다는 것이 이제야 새삼스레 드러나고 있다.

‘방송계갑질119’ 채팅방 운영진으로 참여하는 노무사가 “20여 년 전, 건설현장의 노무관리 실태를 보고 경악했는데, 2018년 방송가에 횡행하는 갑질과 탈법 실태는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 고발한 ‘상품권 페이’는 하루에 수백 개씩 올라오는 방송계 갑질 고발의 대표적 사례일 뿐이다. 비정규직 방송노동자에게 방송이란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기본으로 하면서 때론 월급을 현물로 받고, 각종 폭언과 성희롱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방송계갑질119’에 쏟아지는 제보 가운데 방송사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간략히 소개한다.

최저임금, 우린 잘 몰라요
KBS구성작가협의회 구인·구직 코너에 올라온 구인공고. 주 5일 상근 근무인데 임금이 주당 28만원으로 적혀 있다.

KBS구성작가협의회 구인·구직 코너에 올라온 구인공고. 주 5일 상근 근무인데 임금이 주당 28만원으로 적혀 있다.

‘상품권 페이’ 논란이 한창이던 1월18일 MBC 자회사인 MBC C&I는 막내작가 구인 공고를 냈다(오른쪽 사진 참조). 매주 화요일 낮 12시20분 MBC에서 방송되는 《TV 속의 TV》 막내 겸 서브 작가를 구하며 페이를 ‘주당 28만원’이라고 공지했다. 일요일과 화요일만 쉬는 주 5일제 전일 근무 형태다. 4주 기준으로 월급이 112만원이다.

그러나 법적으로 고시된 2018년 최저임금은 7530원이다. 주 40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월 최저임금은 157만3770원을 넘어야 한다. MBC C&I 공지의 경우 주말 근무가 끼었으니, 토요일 휴일근로 수당도 계산해야 한다. 결국 실제 지급되는 금액은 월 최저임금보다 더 높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사례뿐만이 아니다. 작가 구인 사이트에 올라오는 공고를 보면, 1~3년차 작가는 전일 상근 근무를 하면서도 임금은 외주제작사의 경우 120만~130만원, KBS와 MBC의 경우 150만~160만원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모두 위법이다.

작가뿐만 아니다. 외주제작사 조연출 PD는 낮은 연차의 급여가 대부분 100만~150만원으로 책정된다. 4년차 이상 돼야 160만원을 넘는다. 촬영팀의 경우 사람 단위로 임금이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팀 단위, 장비 기준으로 지급된다. 전일 근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20년차 촬영감독도 월 단위로 150만~200만원을 받는다.

장시간 노동, 밥 먹듯 해요
tvN 드라마 <화유기>의 역대급 방송사고. 모두 열악한 방송노동 환경과 맞물린 일들이다. <화유기> 갈무리

tvN 드라마 <화유기>의 역대급 방송사고. 모두 열악한 방송노동 환경과 맞물린 일들이다. <화유기> 갈무리

문재인 대통령은 1월16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장시간 노동과 과로를 당연시하는 사회가 더 이상 계속돼선 안 된다. 과로사회가 참사를 빚어낸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은 방송계 노동현장을 의식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지난해 7월 아프리카에서 EBS에서 방영될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찍다가 사고사를 당한 고 박환성·김광일 PD의 사례, 얼마 전 발생한 tvN 드라마 추락 사고까지 촬영현장의 과로 참사는 끊이지 않는다. 방송업계에선 정해진 방송 시간에 어쨌든 완성품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장시간 노동을 어느 정도 당연시하는 풍토가 있다. 법적으로도 사용자와 노동자 대표가 서면 합의하면 주 12시간을 초과 노동할 수 있는 ‘특례 업종’으로 지정돼 있다.

방송사들은 이를 ‘포괄임금’이란 이름으로 악용해 별도의 수당 없이 착취를 정당화한다. 특히 드라마가 심하다. 밤샘 촬영과 장시간 연속 노동에 대한 방송노동자들의 무용담은 끝이 없다. 한 조연출 PD는 “TV조선 떼토크 프로그램을 하며 20시간 연속 촬영을 하고, 바로 이틀간 편집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한 기술직 스태프는 “24시간 계속 일하고 화장실 변기 위에서 잠들었다가 다시 일한 적이 있는데 월급 15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한 드라마 스태프는 “20시간, 19시간, 21시간 연속 사흘을 촬영한 적도 있다”고 고발했다.

안마기·배추, 현금 대신 받았어요

제1195호 표지이야기에서 방송계에 만연한 ‘상품권 페이’를 보도하자 한 비정규직 방송노동자는 “그나마 돈이라도 주면 낫다”는 반응을 보였다. 방송계엔 임금을 2~3개월 뒤나 프로그램 종방 뒤에 주는 일이 흔해, 돈을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하기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임금 체불 다음으로 놀라웠던 관행은 상품권도 아닌 ‘현물 지급’이었다. 2012년 말 MBC 에 출연한 연기자는 출연료 100만원 대신 비슷한 값어치의 현물을 받았다. 해당 방송에 협찬품으로 들어온 안마기와 건강보조식품 등을 받은 것이다. 송창곤 한국방송연기자노조 대외협력국장은 “2013년 1월께 현물을 받은 연기자로부터 민원을 받고 PD에게 연락해 현금을 지급하라고 했다. 2월 출연료가 정상 지급됐다”고 말했다.

송 국장은 “현물이나 상품권을 받고도 한마디 못한 채 그냥 넘어가는 연기자가 많다. 방송사가 방송출연 표준계약서를 지키게 하고, 안 지켰을 경우 처벌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했다. 방송출연 표준계약서는 2013년 7월30일 문화체육관광부 주재로 방송 3사와 한국방송연기자노조,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한국방송실연자권리협회 등이 참여해 만든 계약서다. 2년여의 노력 끝에 만들어졌지만 현재 표준계약서를 제대로 쓰고 일을 시키는 방송현장은 거의 없다.

한 촬영감독은 김장철에 KBS의 한 생활정보 프로그램에 쓰일 강원도 고랭지 배추 재배 현장을 촬영하고 “제작비를 배추 한 트럭으로 받았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역시 KBS의 인기 VJ 프로그램에 방송을 남품하면서 방송 아이템이던 ‘염색약’을 받았다는 사례도 있었다. 이 모두 ‘호랑이 담배 피우’고 ‘만주에서 개 타고 말 장사’하던 시절의 얘기가 아니라, 최근 몇 년 동안 벌어진 일들이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변지민 기자 dr@hani.co.kr

방송계 갑질 33가지 유형


갑질 당했습니까 채팅방에 오세요


방송노동자가 방송사로부터 갑질을 당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방송은 협업이 기본이다보니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직종의 사람들과 부딪힌다. 이 가운데 무엇이 갑질이고 어떤 문제를 제기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래서 ‘방송계갑질119’는 방송계 갑질 유형을 △임금 △노동시간 △노동조건 △문화 △기타, 5가지로 구분해 33개 항목으로 세분화했다.
임금 관련 갑질 사례로는 ①계약서 유무 ②기획료(프로그램 사전 단계의 임금) ③저임금 ④경력 깎기(방송가 은어로 ‘스메끼리’) ⑤체불 ⑥제수당 없음(교통비·시간외수당·휴일수당 등) ⑦결방시 임금 미지급 등이 있다. 노동시간의 경우 ⑧장시간 노동(밤샘·주말 노동) ⑨모호한 시작·종업 시간 ⑩관리자 미퇴근시 퇴근 불가로 구분된다. 노동조건은 ⑪과도한 업무 지시(아이템 조사·프리뷰·섭외 등 온갖 일을 시키는 것) ⑫사회보험 ⑬사비 지출(심야 택시비 미지급) ⑭“그만둬”라는 한마디로 해고 등이 있다.
방송계 특유의 문화에서 일어나는 갑질로는 ⑮호칭(‘막내’라고 부르는 것 등) ⑯갑을 구조를 당연시하는 인식 ⑰폭언과 인격모독 ⑱회식 강요 ⑲성희롱 ⑳사적 업무 시키기 감정노동 임신경력단절 협찬·영업 강요 등이 있다. 기타로는 근로기준법 적용이 안 되는 문제 노동자성 불인정(프리랜서 계약 관행 등) 장시간 노동으로 발생하는 건강 문제 블랙리스트 협박 협회 가입 절차 개선 체념 고용형태  휴식권  제작 방식(임금 지급 시기 관행, 기획료 문제 등)  조직화(노동조합 결성 필요) 등이 있다. 이 33가지 유형 가운데 하나라도 의심스럽다면 지금 당장 ‘방송계갑질119’ 채팅방에 입장하시라.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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