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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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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만큼 슬픈 동물, ‘옥자’

약자의 기구한 운명 포착해 묘사한 봉준호 감독…

맛에 끌려 비극에 동참한 관객에게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등록 2017-06-27 07:12 수정 2020-05-02 19:28
슈퍼돼지 옥자는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고, 학대당하고, 죽음의 위험에 놓인다. 미자(사진 왼쪽)는 옥자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향한다. <옥자> 예고편 갈무리

슈퍼돼지 옥자는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고, 학대당하고, 죽음의 위험에 놓인다. 미자(사진 왼쪽)는 옥자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향한다. <옥자> 예고편 갈무리

에 이어 까지, 봉준호 감독의 글로벌 프로젝트가 가진 특징은 한국 밖 세계가 아닌,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는 지구 전체를 쉼없이 달리는 기차 이야기지만, 시스템의 전복과 파괴라는 주제는 한국이란 정거장을 지나칠 수 없었다. 의 바탕이 된 문제의식 또한 한국을 열외시키지 않는다. 삼겹살과 치킨을 사랑하는 나라라 더더욱 그렇다. 아니, 지구에 사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주제다.

인간의 욕망이 만든 동물

의 옥자는 상상 속 동물이 아니다. 봉준호 감독은 매너티와 하마, 돼지 등을 섞어 핀란드의 만화 캐릭터 ‘무민’을 닮은 옥자를 상상했지만, 영화 속에서 옥자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미군이 한강에 방류한 독극물에 의해 속 괴물이 탄생한 것처럼 말이다. 단, 괴물이 ‘한강은 매우 넓다’는 편의주의적 발상에서 ‘우연히’ 탄생했다면, 옥자는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먹고 싶다’는 욕망에서 필연적으로 개발된 식품이다.

영화의 시작은 미국에서 열린 어느 기업의 사업설명회장이다. 다국적 식품기업인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최고경영자(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턴)는 유전자조작으로 슈퍼돼지를 개발한다. 루시가 강조하는 슈퍼돼지의 장점은 ‘친환경’이다. 친환경과 유전자조작이 어울릴 리 없지만, 이 회사는 그걸 마케팅으로 해낼 계획이다. 슈퍼돼지 26마리를 전세계 친환경 농가에서 기르고, 10년 뒤 그중 가장 건강하고 예쁜 돼지를 선별하는 콘테스트를 열겠다는 것이다.

그 돼지 중 하나가 강원도 산골의 농가로 보내져 ‘옥자’라는 이름을 얻는다. 옥자는 이곳에서 미자(안서현)의 사랑과 할아버지(변희봉)의 “그냥 풀어놓으면 되는” 사육으로 무럭무럭 자란다. 미자와 옥자는 귓속말을 나누고, 서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정도로 끈끈한 사이다. 4살 때 옥자를 처음 만난 미자는 어느덧 14살이 된다. 10년이 지난 것이다. 그리고 하필 전세계 26마리의 슈퍼돼지 중 옥자가 가장 아름다운 돼지로 선정된다.

이제 미자와 옥자는 헤어져야 할 시간. 하지만 미자는 고기가 되어야 할 옥자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도시로 나선다. 이때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비밀을 추적하는 동물보호단체 동물해방전선(ALF)의 대원들이 나타난다. 미자는 옥자를 구하려 하고, 동물단체 회원들은 옥자를 이용해 동물의 해방을 꿈꾸고, 루시 미란도는 옥자를 통해 더 많은 옥자를 팔려고 한다. 사연의 기구함으로 따지자면, 옥자와 괴물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사연의 기괴함으로 따져도 마찬가지다. 옥자도 괴물만큼 슬픈 동물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슬픈 동물이 세상에서 겪는 비애를 포착한다.

동물과 아이의 우정을 그리는 에서 익히 본 영화의 제목이 떠오르는 건 당연하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손을 내민 영화 속 아이는 정말 많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부터 등등. 특히 옥자와 미자가 숲속에서 서로 몸을 포개고 낮잠 자는 모습에서 토토로와 메이가 겹쳐 보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도 이들이 마치 자연의 정령인 것처럼, 미자와 옥자의 산속 생활을 묘사한다. 나무는 푸르고 물은 맑고 햇빛은 강렬하며, 둘의 포옹은 따뜻하다.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넷플릭스’와 극장에서 동시 개봉된 영화이지만, 를 극장에서 봐야 한다면 바로 이 장면들 때문이다.

목살·등심·삼겹살이 될 운명

물론 봉준호의 전작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도 있다. 옥자와 미자가 서울 을지로 지하상가에서 벌이는 난장의 추격전은 의 첫 한강 시퀀스와 비교할 법하다. 옥자를 맞닥뜨린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반응과 미국으로 향하는 옥자를 배웅하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란은 에서 본 한국인의 뜨거운 에너지와 닮아 있다.

무엇보다 ‘옥자’는 봉준호의 전작에서 보았던 가장 연약한 약자들을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에서 납치당하고 잡아먹히던 강아지들부터 속 마지막 피해자인 여중생, 의 현서와 세주, 의 종팔이, 에서 기차를 달리게 하던 아이들까지. 과 같은 상상력이었다면, 옥자는 자신을 탄생시킨 인간에게 복수하는 괴수가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극중 미자의 할아버지가 하는 말처럼 “처음부터 목살, 등심, 삼겹살이 될 운명”이었던 옥자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하는 존재다.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고, 학대당하고, 살까지 떼어지는 모습은 옥자가 처한 비극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이다. 돼지를 총으로 쏴서 죽인 뒤, 가죽을 벗겨내고, 몸통을 부위별로 잘라 따로 포장하는 공장 생산라인 광경도 그중 하나다.

언론 시사회를 다녀온 사람들이 당분간 돼지고기를 못 먹겠다고 한 건 농담이 아니다. 영화를 본 이들은 자신도 돼지의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 중 하나라는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은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이런 장면에 대해) 동물이 우리와 함께 자본주의 시대를 살며 겪는 피로와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는 직구를 던진다

아름다운 풍경과 귀여운 동물, 씩씩한 소녀, 그들이 벌이는 모험, 그리고 지금 지구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메시지까지. 는 관객의 사랑을 받을 부분이 많은 영화다. 대형 멀티플렉스가 상영을 거부했고 개봉날 넷플릭스로 볼 수 있는데도 약 12%의 사전 예매율을 기록한 걸 보면, 를 극장에서 관람하려는 사람 수도 상당해 보인다.

그런데 만약 봉준호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극장에서 를 보려는 사람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 수의 상당 부분은 봉준호에게 거는 기대일 것이다. 이전 봉준호의 영화는 의 살인범 같았다. 끝내 잡히지 않거나, 잡혀도 잡은 것 같지 않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게 봉준호가 그리는 영화의 지도였다고 할까. 관객은 길을 헤매면서도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영화적 감흥을 경험했다.

그와 달리 는 옥자를 찾아나선 미자도,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도 헤매고 다닐 필요가 없는 영화다. 메시지는 명징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대신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감흥 농도는 옅어진 듯 보인다. 는 과 등에서 경험했던 영화적 밀도에 비해 흥미로운 부분과 지루한 부분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영화다. 하지만 크고 귀여운 동물의 이미지에 호기심을 느꼈다면, 옥자에게서 비애를 느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팬이라면, 그의 전작에서 느낀 영화적 흥분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기억을 더듬을 것이다. 동물, 소비, 자본주의, 봉준호, 넷플릭스, 극장…, 가 품은 키워드는 무엇 하나 무시할 수 없다.

강병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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