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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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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표 제왕적 대통령제를 넘어서

대통령 권한 줄이고 행정 자율권 확보해야
등록 2017-03-16 09:29 수정 2020-05-02 19:28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가운데)의 모습. 그는 쿠데타 이후 국회를 축소하고 부통령제를 없애는 방식으로 지금의 ‘제왕적 대통령제’ 기틀을 마련했다. 한겨레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가운데)의 모습. 그는 쿠데타 이후 국회를 축소하고 부통령제를 없애는 방식으로 지금의 ‘제왕적 대통령제’ 기틀을 마련했다. 한겨레

우리 제헌헌법(1945)이 만들어질 때 초안을 내놓은 인물은 유진오다. 헌법위원 10명과 함께 그는 ‘의원내각제’에 기초한 권력 구조를 설계했다. 하지만 당시 유력함을 넘어 유일한 대선 주자였던 이승만이 저항했고, 여파로 제헌헌법은 단숨에 대통령중심제로 바뀌고 만다. 국회의원이 간접선거를 통해 뽑는 대통령중심제 국가.

이후 이승만은 두 차례 헌법을 뜯어고치면서 대통령 권한을 강화했지만 사실상 그의 권력 기반은 특유의 절대적인 카리스마와 대중을 아우르는 명망, 그리고 관료와 경찰 조직 덕분이었다. 헌법 조문이나 법률, 행정명령에 시시콜콜 자신의 권한을 문자화하려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조차 없던 시대였다.

4·19 혁명 이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구조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갖추는 변화가 시작된다. 쿠데타 주역이던 박정희는 지금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유지하는 인물이자, 현재적 관점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5·16 군사 쿠데타는 육사 8기생이 적극 주도했고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음에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은 제2공화국의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이 박정희와 공동의장이 될 정도였다. 박정희는 저명한 독립운동가도 아니었고 오랜 기간 국민들 사이에 인지도가 높지도 않았다. 실제 박정희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제3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갈팡질팡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어코 박정희는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를 구조화하는 데 성공한다.

쿠데타 박정희, 헌법 가이드라인 제시

1961년 8월1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1963년 3월 이전까지 신헌법을 제정’해 ‘1963년 초부터 정당 활동을 허용’하는 등 구체적인 향후 정치 일정의 기본 구성을 선포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특별위원회로 ‘헌법심의위원회’를 발족했고 이 시점부터 박정희 본인은 향후 제정될 신헌법의 정체성에 대해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대안은 미국식의 강력한 대통령중심제다. 국회 규모는 축소해야 하고, 양원제 또한 필요 없다’는 식이다.

5·16 쿠데타 이전, 5대 국회의원 수는 291명이었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6~7대 국회의원 수는 각각 175명으로 줄어든다. 100명 넘게 축소됐다. 동시에 정당의 구성과 성립, 발기인의 수와 자격, 법정 지구당 수 등 정당 운영에 대한 제한 조치를 마련했고 국회의원이 소속 정당을 탈당할 경우 의원직을 상실하거나, 비례대표 의석 배분 방식을 엄격히 하는 등 승자독식 구조의 간명한 국회를 만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헌법을 통해 대통령이 제왕적 권위와 권력을 보유하게 된다. 선거로 뽑던 부통령제를 없앴고 대통령이 국무총리는 물론 국무위원까지 임명한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 또한 국무회의는 의결기구가 아닌 ‘심의기관’으로 전락했다. 국회 역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 ‘건의’ 정도의 권한만 부여받는다.

대통령은 긴급재정경제명령 및 처분권, 긴급명령권, 계엄선포권, 공무원임면권, 사면권, 법률안거부권까지 지니며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 등에 대한 사실상의 임명권까지 확보하게 됐다. 입법부와 사법부에 대해 행정부는 확실한 우월적 지위를 구축한다.

‘행정국가화 현상’이란 말로는 부족하다. 이 시기에 대통령은 행정부 내에서도 독점적 지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모든 경제부서를 통할하는 구조로 경제기획원이 만들어지는데 경제기획원 장관은 부총리로 경제 관련 분야를 모두 관할한다. 물론 국무위원으로 대통령을 보조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를 통해 국가 경제 발전의 모든 영역은 대통령에게 귀속되고 만다.

이 시기에 대통령은 행정부 주요 기구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보유하게 됨은 물론 자문기관을 포함한 각종 기관을 거느리게 된다. 신설된 중앙정보부는 물론 감사원까지 대통령 직속 기관이 되었고 경제과학심의회, 국가안전보장회의도 대통령 직속 기관이 된다. 병무청·수산청·산림청·문화재관리국 등 증설된 단체, 국세청·관세청·과학기술처·원자력청·국토통일원 등 신설되거나 확대 개편된 단체 역시 정점에는 대통령이 서게 된다. 1964년 28만8천 명이던 공무원은 1971년 43만7천 명이 되었고 그만큼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중심에 대통령이 있고 대통령은 입법부, 사법부에 확실히 우월하다. 행정부에 대한 절대적 통제 권한을 누리는 구조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조선시대 왕보다 더욱 강력하다고 할 만한 제왕적 권력이 1960년대에 이미 구축된 것이다. 이 때문에 3선 개헌(1969)이 가능했고 궁극적으로 유신헌법(1972)도 관철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 국왕 권한 뛰어넘어
아버지 박정희는 대를 물려 대통령이 된 딸 박근혜(오른쪽 두 번째)에게 ‘제왕적 대통령제’를 정치적 유산으로 남겼다. 아버지의 유산은 딸에게 헌정 사상 첫 파면 대통령의 치욕을 안긴 부메랑이 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아버지 박정희는 대를 물려 대통령이 된 딸 박근혜(오른쪽 두 번째)에게 ‘제왕적 대통령제’를 정치적 유산으로 남겼다. 아버지의 유산은 딸에게 헌정 사상 첫 파면 대통령의 치욕을 안긴 부메랑이 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굳이 조선시대를 돌이켜보자. 국왕의 전제권이 부정되진 않지만 의정부와 6조에 속한 3정승과 판서는 정책 집행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신들은 여러 정책에 대해 독자적으로 협의할 수 있고 자유롭게 의견을 표명하며, 국왕은 이들과 협의해 정책을 진행해야 했다.

또한 3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젊은 관리들 역시 보장된 절차에 따라 국가 정책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표명할 수 있었다. ‘간언’이란 형태로 국왕을 압박할 수 있었다. 국왕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최악의 상황에선 사임하는 형식을 통해 수개월 동안 저항할 수 있었다.

과거제를 준비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궐기, 지방에 산재하는 명망 있는 유생들의 집단행동은 이들의 저항에 든든한 버팀목 노릇을 했다. 사실상 거의 모든 정무에 대해 국왕은 신하들과 합의하여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는 권력의 독단적 운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시대 왕의 권위를 훨씬 뛰어넘는다. 한때 무명의 군부 지도자였던 박정희는 여러 수단과 방법을 통해 절대적 지위를 구축했다. 특히 헌법에 기초한 합법적인 제도적 수단을 통해 절대적 카리스마를 구축했다.

이 구조는 지금까지 결코 해소되지 않았다. 유신헌법을 통해 극단화된 대통령의 권한은 전두환 정권과 6월 항쟁(1987)을 거치면서 상당 부분 해소됐지만, 제3공화국이 만든 ‘대통령중심제’의 틀로 본다면 현재에도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대통령이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을 임명하고, 국무회의를 주관하며, 모든 행정명령에 대해 권한을 행사하는 모습에 대해 국민 중 누가 이의를 제기한단 말인가. 제왕적 대통령제는 문화적으로도 이미 정착돼 있다.

프랑스는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임명하되 국무총리가 사실상 내치의 권한을 확보하는 이원집정부제 전통을 가졌다. 부통령 선거를 실시해 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게 미국식 구조로 잘 알려졌지만, 이승만 정권기 한때 우리도 여러 차례 시행한 제도이다. 이런 식의 제도 변화는 5년 단임제를 8년 중임제로 바꾸는 것보다 훨씬 실효적일 수 있다.

핵심적 권력 운용 방식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면 대통령에게 집중된 여러 행정력의 자율과 자치 또한 가능해진다. 이런 방식을 통해 행정부의 구조개혁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도 시작해볼 수 있다. 그저 막연하게 개헌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민들 사이에서 별 설득력이 없듯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효율적인 제어와 개선이 도모되지 않는 권력 구조 개편 역시 현재로서는 무의미하다. 무엇보다 막연한 개념의 나열보다 국민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사회적·범시민적 논의가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이해되고 고민할 때 비로소 상상력이라는 것도 생길 테니 말이다.

심용환 역사 & 교육연구소 소장
※꺼지지 않는 촛불을 드립니다. 탄핵/대선 특대호 1+1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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