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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진단서는 검경 ‘방패막이’

책임자 처벌 여부와 수위에 영향 미칠 사망진단서의 법적 의미와 파장
등록 2016-10-11 08:18 수정 2020-05-02 19:28
서울대병원이 작성한 백남기 농민 사망진단서. 사망의 종류란에 ‘병사’라고 표시돼 있다. 정청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제공

서울대병원이 작성한 백남기 농민 사망진단서. 사망의 종류란에 ‘병사’라고 표시돼 있다. 정청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제공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결국 숨진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를 보면 의문이 생긴다. ‘왜 외인사가 아니고 병사인가?’ 의문은 꼬리를 잇는다. ‘주치의는 왜 사인을 병사로 규정하고 가족이 치료에 비협조적이었다고 주장했을까?’ 주치의 백선하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의 의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법적 의미와 파장은 가늠해볼 수 있다.

백 교수의 주장은 피해자가 사망한 형사사건 피고인(가해자)들의 논리를 닮았다. ‘죽음의 원인은 자신의 물리력이 아니라 중간의 다른 조건이나 계기’라는 것이다. 이는 범죄행위와 사망의 인과관계를 끊으려는 주장이다.

이제 공권력 과잉 진압 논란은 사망원인을 둘러싼 진실게임으로 변질됐다. 경찰 물대포 살수와 지휘 당사자들을 상대로 한 진실 규명만큼 사망의 의학적 원인 규명이 사건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망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일이 향후 책임자 처벌 부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까닭이다.

새누리당·극우세력의 유가족 모욕 근거 제공

백선하 교수는 지난 10월3일 기자회견에서 백남기씨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16년 9월25일 발생한 갑작스런 사망”. ‘갑작스런 사망’의 원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백남기 환자 가족분들께서는 고인의 평소 유지를 받들어 여러 가지 합병증에 대해 적극적인 치료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약 6일 전부터 시작된 급성신부전이 빠른 속도로 진행하면서 고칼륨증이 단시간에 걸쳐 빠른 속도로 진행하였고 급성신부전에 대한 적절한 치료가 되지 않아 결국에는 고칼륨증에 의한 급성심폐정지가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급성신부전의 체외투석을 통한 적극적인 치료가 시행되었다면 사망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가족이 체외투석 치료를 원하지 않아 급성신부전증을 치료할 수 없었던 점을 갑작스런 사망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백 교수의 주장은 이후 새누리당과 극우세력이 백남기씨 유가족을 비판하는 근거가 됐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주치의가 치료를 하자고 했는데도 가족들이 적극적인 치료를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비방했고, 극우단체인 자유청년연합의 장기정 대표는 백민주화씨를 비롯한 유가족을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로 고발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백남기씨의 딸 백도라지씨는 페이스북에 “부디 사람의 길을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형사재판 피고인 방어 논리와 유사

최초 사건 발생 뒤 입원 단계에서 다른 요인이 작용해 피해자가 사망했다는 주장은 형사재판에서 피고인들이 주로 내세우는 방어 논리다. 대전지법 형사항소3부(재판장 황순교)가 2015년 4월9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치과의사 최아무개(51)씨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 사건에서도 그랬다.

이 사건은 최씨가 2011년 11월 79살이던 내원환자의 치아를 뽑는 치료 과정에서 다른 치아를 부러뜨려 기도로 들어가게 한 일이 발단이 됐다. 그 환자는 결국 다른 대학병원에서 흉부절개수술로 기관지에서 치아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11일 뒤, 환자는 급성장염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했지만 다발성장기부전증으로 3일 만에 숨졌다.


경찰 책임자의 처벌 수위를 낮추는 데도 ‘병사’ 진단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경찰이 백남기 농민을 직접 숨지게 한 것이 아니라 다치게 했다는 정도로 책임을 낮출 여지가 생기는 까닭이다.

재판부는 치과의사의 과실을 인정했지만 그 과실이 사망의 원인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이후 발병한 장염과 치료 과정에서의 부작용을 사망 원인으로 인정해, 최씨에게 업무상 과실치사죄가 아닌 업무상 과실치상죄를 적용했다.

백남기씨 사망진단서에 적시된 ‘병사’는 향후 경찰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상당한 방패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외인사라면 당사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가해자의 법적 책임을 가리는 일이 필수적으로 뒤따른다. 이번 사건의 경우 누가 물대포를 쏘도록 지시했고, 그 운용 과정은 지켰는지 등이 조사 대상이 된다.

하지만 병사는 가해자에 대한 진상 규명을 흐리게 할 수 있다. ‘병사’ 진단은 경찰의 물대포 직사로 백남기씨가 숨졌다는 인과관계를 부인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허일태 동아대 법대 교수는 “외인사로 사인이 적혀 있었다면 당연히 검찰이 (경찰을) 기소할 것이다. 그런데 병사라고 돼 있으니까 자신 있게 기소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서울대 교수가 그 정도로밖에 쓸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말이다. 검찰이 부담을 느낄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채상국 변호사도 “병사는 외상이나 외부의 힘에 의해 숨진 게 아니라는 것이니까, 기소 단계에서부터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경찰 책임자의 처벌 수위를 낮추는 데도 ‘병사’ 진단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최소한 경찰이 백남기씨를 직접 숨지게 한 것이 아니라 다치게 했다는 정도로 책임을 낮출 여지가 생기는 까닭이다.

검찰이 기소하더라도 외인사가 아닌 병사인 탓에 경찰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보다는 과실치상으로 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허일태 교수는 “사인을 외인사로 썼다면 상식적으로 보아 치사죄로 기소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면서 이 부분이 기소 내용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병원·경찰의 ‘긴밀한’ 관계

백남기씨의 큰딸 백도라지씨와 나눈 의 단독 인터뷰, 의료진이 작성한 의무기록지 분석 결과 등을 종합해보면, ‘병사’ 진단의 배후에 서울대병원과 경찰의 긴밀한 관계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백남기씨가 쓰러진 지난해 11월14일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직접 혜화경찰서장을 시켜 백선하 교수가 진료와 수술을 맡도록 했다. 유가족은 백 교수를 포함한 서울대병원 의료진이 회복이 아닌 연명치료를 집요하게 이어갔으며 경찰에 수시로 상황을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백남기씨 사망진단서를 작성한 서울대병원 레지던트는 당시 상급자와 통화하면서 세 번이나 “병사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백 교수의 사망진단서는 서울대병원 내부에서조차 조롱거리다. 서울대병원 노조는 “전 국민이 백남기 농민의 사망은 물대포에 의한 ‘외인사’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엉터리 사망진단서를 수정하지 않는 병원의 입장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외압 의혹은 갈수록 번지고 있지만 서울대병원장을 비롯한 수뇌부는 요지부동이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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