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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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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에이즈를 아는가

등록 2001-12-05 15:00 수정 2020-05-02 19:22

커밍아웃 20주년에도 무지와 오해 수두룩… 통계에 드러나지 않은 에이즈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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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이름은 ‘동성애자관련면역결핍증’(GRID)이었다. 1981년 6월5일 미국 연방질병통제센터(CDC)는 LA에 거주하는 남성동성애자 5명이 희귀한 폐질환인 뉴모시스티스 카리나에 걸렸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검사를 받은 이들 중 세명이 면역기능 저하 현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의사들의 치료 노력에도 속절없이 이들은 죽어나갔다. 원인도 알 길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의 젊은 남성동성애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보고됐다. 언론은 좀더 자극적으로 ‘동성애자암’(Gay Cancer)이라고 떠들었다.

에이즈는 HIV 감염증의 일부일 뿐

머지않아 이 증상은 혈우병 환자, 매매춘에 종사하는 여성, 심지어 아이들에게서도 나타났다. 혈액과 정액의 교환을 통해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질병이란 사실도 명백해진 것이다. 1982년 비로소 이 증상은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란 제 이름을 얻었다. 어느덧 에이즈가 세상에 커밍아웃한 지 20년이 흘렀다. 한국에서도 1985년 11월 첫 감염인이 보고된 뒤, 우리 사회는 정확히 16년을 ‘에이즈와 함께’ 살아왔다. 이제 그 이름은 너무나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에이즈를 둘러싼 무지와 오해는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아직 에이즈바이러스(???HIV) 감염인과 에이즈 환자도 뚜렷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HIV 감염인은 HIV를 몸에 갖고 있지만, 몸에 나타나는 증상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HIV 감염증은 기본적으로 만성질환이다.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건강관리에 충실하면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넘게 에이즈 발병을 막을 수 있다. 농구스타 매직 존슨이 대표적인 경우다. HIV가 면역체계를 파괴해 합병증이 발생했을 때, 에이즈 환자가 되는 것이다. 에이즈는 HIV 감염증의 일부이다.

국립보건원은 2000년 9월 말 현재 ‘HIV 감염인’이 1515명이라고 밝혔다. 이중 현재 생존해 있는 ‘에이즈 환자’는 233명이다. 올 9월 말까지 확인된 신규 감염인 숫자는 235명.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3%나 증가한 수치다. 그러나 99년 이후 이어진 가파른 증가율에도 한국은 에이즈 확산 저지에 성공한 나라로 꼽힌다. 감염인의 절대 숫자나 전체 국민 중 감염비율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국립보건원 관계자는 “감염인이 발생한 85년부터 정부의 발빠른 대응이 이뤄졌고, 의료비 지원 등 정책이 효과를 거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다른 성병의 감염률이 외국보다 낮지 않은 점에 비하면 예외적인 경우”라고 덧붙였다. 낮은 콘돔 사용률과 번성한 성 산업 등을 고려하면 ‘이상 현상’임에 틀림없다. 한국에이즈연맹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항상 콘돔을 사용한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은 7.3%에 그친 반면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사람은 45.4%에 달한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우석균 정책실장은 “외국인과 성 접촉을 꺼리는 배타적 인식을 한 원인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제시한다. 배타적 인식이 HIV의 ‘대량 수입’을 막았다는 얘기다.

국내 감염률 낮지만 실제는 1만명 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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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통계수치에 마냥 안도할 수만은 없다. ‘잠재된 감염인’이 존재하는 탓이다. ‘유엔에이즈계획’(UNAIDS)은 통상 실제 감염인 숫자를 보고된 감염인 수의 2∼3배로 추정한다. 국립보건원의 김복환 사무관도 “우리나라도 통계수치의 2∼3배 정도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에이즈 예방단체들의 추산은 다르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는 실제 감염자가 1만명을 넘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최근에 ‘에이즈 환자’로 발견되는 신규 감염인이 많다는 사실도 통계에 대한 불신을 뒷받침하는 요소다. 지난해 겨울, 60대 여성 박아무개씨는 거의 실명된 상태로 서울의 한 대학병원을 찾았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녔지만 도통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대학병원 검사 결과, 에이즈 진단이 나왔다. 박씨처럼 두어해 전부터 에이즈가 발병한 상태에서 뒤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최초로 감염이 보고된 지 16년 만의 결과다. HIV는 감염 뒤에도 10년 넘게 증상이 거의 없는 잠복기를 거친다. 잠복해 있던 HIV가 무더기로 ‘커밍아웃’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한국의 에이즈 정책은 아직 ‘통계’로 나타나는 절반의 성공일 뿐이다.

한국의 에이즈 통계가 침묵하는 사실은 더 있다. HIV 감염인 중 지금까지 334명이 사망했다. 이들 모두가 에이즈로 죽은 것은 아니다. 103명은 다른 이유로 생을 마감했다. 자살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감염인 김중호(38·가명)씨는 “감염인이(???) 발생한 초기에는 자살 또는 사고를 위장한 자살로 죽는 경우가 많다”고 전한다. 초기만 해도 HIV를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병이라 여겼고, 사회의 시선도 지금보다 더욱 차가웠던 탓이다. 감염인 숫자뿐 아니라 감염 요인별 현황도 확실성을 의심받는 부분이다.

총감염자 1515명 중 남성은 1326명으로 87.5%의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 국립보건원 한 관계자는 “남성동성애가 주요한 감염경로인 나라에서는 감염인 중 남성의 비율이 높게 나온다”고 전한다. 미국의 80년대 초 감염 비율이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이성애가 주요 감염경로인 아프리카의 경우 감염인의 남녀 성비가 1 대 1 수준으로 나온다.

구강성교 감염 위험… 감염자도 정상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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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통계로 잡힌 감염 요인별 현황으로 보면 동성애를 통한 감염은 27.4%를 차지한다. 주요 감염경로가 이성 접촉으로 바뀐 미국의 남성동성애자 비율 43%에 비해서도 낮은 수치다. 한 동성애자 감염인은 “죽을 때 유언처럼 동성애자임을 알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전한다. 그렇다고 남성동성애자를 에이즈의 주범으로 몰아 도덕적 비난을 가할 일은 아니다. 정확한 감염경로 확인을 통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한국 동성애자단체들은 오래 전부터 콘돔을 사용하는 안전한 섹스 캠페인에 주력해왔다.

“Safe sex is hot sex.”(안전한 섹스가 정열적인 섹스다)

종로3가에 자리잡은 남성동성애자인권단체 ‘친구사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포스터다. 80년대 초 에이즈의 기습으로 수많은 ‘친구’들을 잃은 전세계 동성애자 커뮤니티는 콘돔의 사용에 앞장서왔다. 이들에게 콘돔은 생명을 지키는 방어막이었다. 덕분에 전체 감염인 중 동성애자 비율은 세계 각국에서 낮아지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90년대 초,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시작될 무렵부터 콘돔 사용 홍보는 주요사업 중 하나였다. 98년에는 ‘콘도미’라는 콘돔 캐릭터를 활용한 마스코트도 만들었다. 98년부터 해마다 12월1일 세계 에이즈의 날이면 종로와 이태원 등지에서 에이즈 예방 홍보물과 콘돔을 배포하는 일도 거르지 않았다. 올해 에이즈의 날에는 친구사이와 동성애자인권연대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와 공동으로 홍보물을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삽입 성교시 콘돔 사용을 당연시하는 동성애자 커뮤니티지만, 구강성교(오럴섹스)를 두고는 입씨름이 벌어지곤 한다.

“정말 오럴섹스를 할 때도 콘돔을 써야 돼?” “원칙적으로는 써야지.”

“솔직히 오럴섹스할 때 콘돔 쓰는 사람?” “….”

구강성교시 HIV 감염의 위험은 간과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구강성교에 의한 감염확률은 생각보다 높다. 올 7월 영국 &ltBBC&gt는 영국, 미국 등에서 조사 결과 HIV 감염의 8%가 오럴섹스를 통해 이뤄졌다고 알렸다. 입 안에 상처가 있을 때는 더욱 위험하다. 사정하기 전에도 프리컴(precum·사정하기 전에 나오는 정액)이 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콘돔을 씌워야 한다고 한다. 구강성교용으로 따로 제작된 콘돔도 있다.

혹시 감염이 의심된다면, 보건소나 검역소를 찾아야 한다. 헌혈을 통해 감염여부를 확인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헌혈액은 HIV 검사가 의무화돼 있다. 그러나 현재 보건소에서 실시중인 HIV 테스트는 한계가 있다. 바이러스를 직접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체내에 생긴 항체를 통해 검사하는 방식이다. 항체가 형성돼야만 양성 판정이 나온다. 그러나 항체가 생길 때까지는 평균 석달(12주)이 걸린다. 이 기간을 윈도 피리어드(window period)라고 한다. 이때는 설사 HIV에 감염되었더라도 음성 판정이 나온다. 신분 노출이 꺼려진다면, 보건소에서 익명 검사를 받는 것이 최선이다. 89년부터 전국 보건소에서는 신분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익명으로 검사를 해주고 있다. 자신이 부여받은 번호만 기억하면 간단히 전화 한 통화로도 감염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설사 검사 결과 HIV 양성으로 판정받았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오히려 발병하지 않는 한,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서 일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다만 강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육체적으로 부담이 되는 경우에는 주치의와 상의하는 것이 좋다. HIV 감염은 해고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는 88년 발표한 성명을 통해 “HIV 감염은 고용관계를 끝내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국내의 에이즈 커밍아웃을 기대하며…

20년이 흘렀지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에이즈 역사로는 ‘에이즈 커밍아웃’이 있다. 록 허드슨을 비롯한 유명 연예인과 정치인, 학자들이 HIV 감염인임을 당당히 밝힌 것이다. 이런 토대 위에 감염인을 중심으로 87년 에이즈 운동단체인 액트업(ACTUP)이 결성됐다. 이 단체는 잘못된 에이즈 정책의 수정과 높은 약값의 인하를 요구하며 뉴욕 증권거래소에 난입하기도 했다. 결국 압력에 밀린 제약회사는 약값을 낮췄다. 최초의 환자권리운동인 에이즈운동의 성공에 힘입어 암환자 등 다양한 환자권리운동이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에이즈 커밍아웃을 하고 활동하는 감염인이 없는 상태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K+(케이 플러스)라는 감염인 자활공동체가 생겼고, 감염인이 직접 운영하는 사이트(www.love4one.com)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에이즈 커밍아웃이 우리 앞에 다가설 날도 멀지 않았는지 모른다. 에이즈 커밍아웃은 무지와 오해의 어둠을 걷어내고 에이즈의 실체를 정확히 알리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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