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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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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시간을 공간의 가격으로

‘새로운 유통 활로’로 각광받던 분양형 쇼핑몰은 몰락의 길…
‘SPA 브랜드의 성장’은 도심 대형 쇼핑몰의 활로가 되고
도시는 입지와 브랜드로 특화된 쇼핑몰들 각축장으로
등록 2015-02-17 06:04 수정 2022-11-08 09:56

1998년 서울 동대문 밀리오레는 외환위기의 여파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분양을 마쳤다. 의류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임에도 낙후된 환경의 동대문시장에 조성된 고층 밀집형의 대형 쇼핑몰은 새로운 유통 활로로서 기존 상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에 힘입어 이듬해인 1999년 동대문의 두산타워가 개장했다. 밀리오레가 동대문 소매상을 흡수했다면 두산타워는 도매상을 흡수하는 전략으로 승부했다. 성숙한 상권과 함께 성장한 많은 상인들, 즉 충분한 분양 수요와 대중교통이 밀집해 있는 높은 접근성을 배경으로 비싼 토지 가격에 대응하는 고밀도 개발이 새로운 상가 개발 형태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개방형으로 설계된 대형 건물에 마치 주차장처럼 바닥에 금을 그어 2천 개 내외의 상가를 배치한 다음 이를 각각 분양하는 식이었다. 명동 밀리오레는 2003년 임대분양하던 400여 개의 상가를 등기분양으로 전환했는데 4평형 한 계좌의 분양가는 1층 2억3500만원, 2층 1억8800만원, 5층 1억4천만원에 달했다.

소규모 의류 상인들에게 직격탄 날려

고밀도의 도심형 분양 상가는 사업성에 확신이 생기자 주요 상권은 물론 전국 각지에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밀리오레는 2000년과 2001년 사이 명동을 필두로 부산과 대구, 경기도 수원, 광주점을 차례로 열었다. 이러한 열기는 2003년 동대문의 또 하나의 분양형 대형 쇼핑몰인 굿모닝시티 사태로 정점을 찍었다. 토지 매입도 하기 전에 상가를 분양했지만 이후 토지 가격을 합의하지 못해 토지 매입이 지지부진하는 동안 사업 진행이 난관에 부딪히자 사기 분양 사건으로까지 번졌다.

유니클로·자라 등 저가 스파(SPA) 브랜드의 성장은 도심 대형 쇼핑몰의 대안적 활로가 됐다. 서울에 자리한 모든 대형 쇼핑몰은 SPA 브랜드를 핵심 매장으로 유치해 고객을 모으고 있다. 정용일 기자

유니클로·자라 등 저가 스파(SPA) 브랜드의 성장은 도심 대형 쇼핑몰의 대안적 활로가 됐다. 서울에 자리한 모든 대형 쇼핑몰은 SPA 브랜드를 핵심 매장으로 유치해 고객을 모으고 있다. 정용일 기자

이후 분양형 상가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상권의 저변이 약한 지방 쇼핑몰의 미분양이 급증했다. 뒤늦게 개발에 뛰어든 서울 시내 쇼핑몰들이 그 뒤를 이었다. 굿모닝시티 사기 분양 사건은 호황의 막바지에 나타나는 흔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문제는 더 근본적인 곳에 있었다. 동대문과 남대문, 명동으로 대표되는 저가 의류 시장의 판도가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바로 2000년대 중반에 등장한 유니클로로 대표되는 SPA(의류 기획·디자인·생산·제조·유통·판매 등 전 과정을 한 업체가 관리) 브랜드가 저가 의류 시장을 잠식해갔던 것이다. 동대문과 명동의 의류 상인들이 창신동 등지의 저임금 봉제공장을 등에 업고 각개약진을 벌이는 동안, SPA 브랜드는 제조부터 판매까지 수직계열화를 통한 가격 및 품질의 합리화를 무기로 도심의 대형 매장을 통해 유통의 융단폭격을 가했다.

한국 진출 첫해에 300억원 규모의 매출을 올린 유니클로(한국법인 에프알엘코리아)는 2007년 340억원, 2008년 725억원으로 성장하더니 2009년 1226억원, 2010년 2260억원, 2011년 3280억원, 2012년 5050억원. 그리고 2013년 6940억원에 이어 2014년 8월 기준(2013 회계연도, 2013년 9월부터 2014년 8월) 8954억원을 기록했다. 유니클로의 폭발적인 성장은 중·고가 브랜드의 소비자를 흡수하는 동시에 기존의 저가 의류 소비자를 빠르게 잠식함으로써 소규모 의류 상인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분양형 쇼핑몰 수요의 근간이 사라진 것이다. 임차인인 의류 상인들이 몰락하는 동안 상가를 소유한 상인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 있었다. 도심에 대규모 창고형 매장을 운영하는 유니클로의 특성상 일부 쇼핑몰의 소유자들은 유니클로의 임대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니클로와 자라 등 SPA 브랜드의 성장은 도심 쇼핑몰의 대안적 활로에 실마리가 되어주었다.

SPA 브랜드의 성장은 도심 대형 쇼핑몰의 새로운 질서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니클로나 자라가 입점한 쇼핑몰은 다른 쇼핑몰에 비해 집객 능력이 현저히 높아졌다. 이들이 운영하는 매장을 둘러보는 소비자들은 쇼핑의 사이사이 쇼핑몰 내에 위치한 카페에서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하거나 끼니를 해결했다.

유니클로와 SPA 브랜드의 성장은 도심 대형 쇼핑몰의 새로운 질서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니클로나 자라가 입점한 쇼핑몰은 다른 쇼핑몰에 비해 집객 능력이 현저히 높아졌다. 이들이 운영하는 대형 매장을 둘러보는 소비자들은 쇼핑의 사이사이 쇼핑몰 내에 위치한 카페에서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하거나 끼니를 해결했다. 유니클로가 옆에 자리한 카페와 식당을 먹여살리는 모양이 된 것이다. 이른바 ‘키 테넌트’(Key Tenant)라 불리는 유명 의류 매장, 백화점,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등의 입점으로 인한 집객 능력의 차이가 쇼핑몰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리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전의 쇼핑몰이 개별 상인들 간의 각축장이었다면 이제는 도시가 입지와 브랜드로 특화된 쇼핑몰들 사이의 각축장이 된 것이다.

유명 SPC 매장을 경쟁적으로 유치

2000년 삼성동에 공연장 및 컨벤션센터와 함께 탄생한 코엑스몰은 이런 상황이 반영된 복합쇼핑몰의 효시다. 300개에 육박하는 의류·잡화점과 식음료 매장이 늘어선 몰을 통과하면 멀티플렉스(메가박스)나 대형 서점 혹은 수족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복합쇼핑몰은 쇼핑뿐 아니라 도시의 여가생활 전반을 한 장소에서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된다. 용산역의 아이파크몰(2006), 영등포의 타임스퀘어(2009)와 신도림의 디큐브시티(2011), 여의도의 IFC몰(2012), 최근 일부 개장한 제2롯데월드까지 호텔과 오피스 등 배후 수요를 위한 시설과 함께 복합쇼핑몰 내에 극장, 대형 서점, 멀티플렉스 등을 갖추고 유명 외식 프랜차이즈 브랜드(SPC) 매장을 경쟁적으로 유치했다. 이들 곁에는 카페와 식당이 자리한다.

복합쇼핑몰의 경쟁에서 최근의 흐름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무엇보다 점유율 경쟁을 위해 매장을 공격적으로 확대하는 저가 SPA 브랜드와 쇼핑몰 내 식당가의 차별화 전략이다. 자동차 보유율이 높은 중·장년 중산층을 주 타깃으로 하는 교외 아웃렛 쇼핑몰과 달리, 도심에 위치하는 복합쇼핑몰은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20∼30대와 주말 고객이 집중 공략 대상이다. 최근에 개장한 제2롯데월드는 중산층 공략을 위한 프리미엄 식품관과 고급 식당, 더불어 서울의 주요 맛집거리를 쇼핑몰 내에 옮겨놓고 1인당 1만원 내외의 메뉴로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을 여럿 배치했다. 자력으로 대량의 고객을 유치할 수 있는 키 테넌트의 역할이 중요해지자 쇼핑몰의 수익 전략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유명 SPC 브랜드나 멀티플렉스의 유치 경쟁을 위해 정액 임대료 대신 수익의 일부를 수수료로 받는 형태로 우대한다. 대신 이들의 집객력을 근거로 나머지 임대 공간에서 임대료 수익을 얻는 전략을 취한다. 따라서 쇼핑몰 전체의 운영 수지를 맞추기 위해 임차자를 섭외하고 조율하며 이를 쇼핑몰 설계에서부터 반영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결과적으로 지명도가 낮은 업체는 유명 업체 주변의 입지를 얻기 위해 추가 임대료 부담을 지게 된다.

도시 여가생활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2000년대 초반 복합쇼핑몰은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의 도래와 함께 높아진 소비 수준을 충족해줄 문화적 소비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미래의 유통 형태로 각광받으리라는 전망과 함께 제시됐다. 문화적 소비는 소득과 소비의 양극화에 따라 조금 다른 형태로 현실화됐다. 복합쇼핑몰은 중산층뿐 아니라 저소득층 역시 도시의 여가생활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산책자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시간을 공간의 가격으로 바꾸고 있다. 복합쇼핑몰은 그 대가로 도시 규모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공공 공간과 여름과 겨울의 혹독한 날씨를 막아줄 냉난방 시설을 제공해준다. 도시의 저소득층에게 몰링은 딱 이만큼의 의미일지 모른다.

박재현 시각창작집단 ‘옵티컬레이스’ 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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