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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선이 낚은 물고기

고용허가제 10년 한국의 이주노동자들 두 번째 이야기… 고등어·멸치·

오징어잡이 배를 탄 뒤, 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놀랍지 않은 생활
등록 2014-08-27 07:29 수정 2020-05-02 19:27
막 입국한 선원 이주노동자들이 커다란 가방과 이불 보따리를 들고 부산 남항에 정박한 통발 어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막 입국한 선원 이주노동자들이 커다란 가방과 이불 보따리를 들고 부산 남항에 정박한 통발 어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뱃일은 3D가 아니라 4D’라고 선원들은 말한다. 3D(Dirty·Difficult·Dangerous)한데 멀기(Distant)까지 하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은 땅 위에서도 어지럽다. 그들에게 넓고 막힘없는 바다는 좁고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격랑 위의 폐쇄공간’이다. 모국에서 멀고, 언어에서 멀고, 법에서 먼 바다에 갇혀 선원 이주노동자들은 물고기를 잡고, 그물을 고치고, 폭행을 당한다. 고용허가제가 도입된 지 10년(2014년 8월17일)이 지났다. ‘눈물의 밥상’(제1025호 표지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안전한 신토불이 해산물’이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바다에 떨군 그들의 짠물을 살폈다. 우리는 매일의 밥상에서 그들의 눈물을 먹고 있는지 모른다. 이주노동자 인권단체 ‘이주민과함께’가 취재와 자료를 지원했다. _편집자


[고등어: 한국 연근해에서 잡히는 고등어의 95%(정치망·낚시 등 5%)가 부산공동어시장(부산 서구 남부민동)에 모인다. 고등어잡이 ‘대형선망’ 어선들이 부산 남항으로 집결하는 까닭이다. 일본 대마도와 대만, 중국 인근까지 조업을 나간다. 주요 어장은 제주도 주변 해역이다. 대형선망 어선들은 2013년 11만8천t(1970억원어치)의 고등어를 잡았다. 공동어시장의 고등어 대부분이 중매인을 거쳐 서울 노량진시장으로 보내진다. 노량진에서 재경매를 통해 전국 각지로 유통된다.]

고등어 물 뿌리는 호스로

부산 남항으로 ‘불배’(등선)가 들어왔다. 서둘러 죽은 고등어들이 공동어시장 위판장에 배를 깔았다. 냄새를 맡은 갈매기들이 새벽 하늘을 늑대떼처럼 날았다.

고등어잡이 배들은 매월 보름에 돌아왔다. 고등어는 어두운 밤 불을 켜서 잡았다. 달빛이 흐드러지는 ‘월명’의 날엔 ‘집어’가 되지 않았다. 대형선망(커다란 그물로 물고기를 둘러싸 잡는 조업 방식) 어선은 음력 14일 귀항해 19일 출항(선주·선원 단체협약)했다. 지난 8월9일(음력 7월14일) 태풍 ‘할롱’이 보름달을 가리고 비를 뿌렸다.

인도네시아 선원 ㅅ(47)도 이날 뭍을 밟았다. 한국 배를 6년째 타고 있다. 달이 차면 선망 선원 이주노동자 200여 명(한국인 선원 포함 2천여 명)이 남항으로 들어온다. 본선(1척·25일에 1회 입항)과 등선(2척·1회 입항), 운반선(3척·4~6회 입항)이 대형선망의 한 ‘통’(선단)을 이룬다. 등선이 어탐·집어한 고등어를 본선이 그물로 잡아올리고 운반선이 항구로 실어나른다. 한 통엔 10~15명의 외국인 선원(한국인 선원 포함 72~73명)이 배치된다. 선주는 국적을 안배해 집단행동을 막는다.

ㅅ은 운반선 선원이다. 그는 자신을 겨냥해 물을 쏘는 호스가 무섭다. 고등어에 뿌리는 물이 때로 그를 향한다. 어창의 비늘 섞인 물을 뒤집어쓸 때 그는 자신이 고등어인지 인간인지 혼란스럽다. 그는 한국 선원들에게 “자주”(2012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 결과 43%와 94%가 각각 폭행과 폭언을 당한 경험) 맞는다. 나이 어린 동료들로부터도 “종종” 맞는다. 한국인 선원들이 머리를 때릴 때마다 모욕당한다는 생각에 그는 울음을 삼켰다.

“나는 로봇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겨냥해 물을 쏘는 호스가 무섭다. 고등어에 뿌리는 물이 때로 그를 향한다. 어창의 비늘 섞인 물을 뒤집어쓸 때 그는 자신이 고등어인지 인간인지 혼란스럽다. 그는 한국 선원들에게 “자주” 맞는다. 나이 어린 동료들로부터도 “종종” 맞는다.


ㅅ은 말했다. 한국 고등어배를 타기 전 일본 참치배를 8년 탔다. 일본인들은 때리지 않았다고 그는 기억한다. 배엔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귀항시킨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일본 배에선 주로 한 사람이 지시를 내렸다. 한국 배에선 모든 사람이 그에게 명령했다. 제때 일을 끝내지 못한다며 명령한 사람마다 때렸다.

뜰채가 수백 마리의 고등어를 뱉었다. 기계가 들어올리는 대형 뜰채가 배의 어창에서 고등어를 머금어 상인들의 리어카에 쏟아부었다. 비옷을 입은 인도네시아 선원이 리어카 밖으로 떨어진 고등어를 주워담았다. 배 한 척이 고등어를 토해낼 때마다 어시장 한쪽이 등푸른 빛으로 덮였다. 한국인 중년 여성들이 쪼그려 앉아 크기별로 분류했다. 왜소한 베트남 선원이 뜰채를 붙들고 요동했다.

주검 송환비도 보상금에서 지출

ㅅ의 ‘통 동료’ ㅌ(41·인도네시아)은 본선을 탄다. 1994년부터 한국 배에 올랐다. 악명 높은 사조오양의 참치 원양어선이 그의 첫 배였다. 2011년 뉴질랜드 앞바다에서 조업 중이던 오양75호의 인도네시아 선원 32명이 배를 탈출했다. 그들이 겪은 참혹한 폭력과 성폭행·임금체불을 뉴질랜드 당국에 고발했다. ‘노예선’ 오양호는 국제사회에 한국 선원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방증했다. 20년 전 ㅌ은 한국 땅을 밟을 일 없이 본국에서 출항했다. 태평양 전역을 떠다니며 매일 맞았다. “빨리빨리(40~41쪽 恨국어사전 참조) 못한다”고 맞았고, “샤워를 늦게 한다”고 맞았다. 100~120kg 참치를 잡아 얼리면서 동상에 걸렸다. 당시 한 달 월급이 175달러(당시 환율로 약 13만7천원)였다. 한국 연근해어선을 타면서부턴 ‘관리업체’(선주에게 위탁받아 선원 이주노동자 송입·관리를 담당)가 매달 3만원씩을 떼갔다. 그의 본선 어로장은 “착한 사람”이다. 그에겐 “때리지만 않으면 욕을 해도 착하다”.

ㅌ의 친척은 제주도 갈치배에서 일했다. 최근 한국인 관리자에게 맞아 눈 밑이 찢어졌다. 신분 확인이 안 돼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선주가 여권과 통장을 압류한 탓이다. 월급은 3개월째 못 받았다. 친척은 때린 관리자가 있는 한 그 배를 타지 않겠다고 한다. 현재 약을 먹으며 친구 집에서 견디고 있다. ㅌ이 말했다.

“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이젠 놀랍지 않다.”

지난 3월24일 제주도 차귀도 남서쪽 108km 해상에서 조업하던 유자망 어선에서 불이 났다. 진화가 어려울 만큼 불이 번졌다. 선원 9명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한국 선원 4명 중 1명이 죽고 1명은 실종됐다. 인도네시아 선원은 5명 모두 죽었다. 한국인 사망 선원은 장례비와 사망보험금을 합쳐 1억5천만원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선원에겐 3분의 1인 5200만원씩 지급됐다. 한국인 선원(월평균 임금 302만9천원으로 계산)과 외국인 선원(월평균 임금 110만원으로 계산)의 임금 차별 때문(상자 기사 참조)이다. 살아서의 차별은 죽어서도 이어졌다.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주검 송환비도 보상금에서 지출됐다. 사망자 중엔 ㅌ의 지인도 있었다.

사고났는데 조업 계속, 10시간 방치

[멸치: 멸치는 기선권현망(어탐선이 찾은 멸치를 2척의 본선이 양쪽에서 그물로 끌어당겨 잡는 방식)의 어획량(전체의 70~80%)이 가장 많다. 멸치는 성질이 급해 잡히자마자 죽는다. 선도 유지를 위해 건져 올린 즉시 가공선에 옮겨 삶는다. 선단(본선 2척·어탐선 1척·가공운반선 2척)에 가공선이 포함되는 이유다. 경남 통영과 전남 여수가 기선권현망 조업의 중심지다. 멸치는 중매인들을 거쳐 전국의 도매시장·백화점·대형마트·재래시장으로 납품된다. 서울의 도매 유통은 가락시장을 통한다.]


지난 3월24일 제주도 차귀도 남서쪽 해상에서 조업하던 유자망 어선에서 불이 났다. 한국 선원 4명 중 1명이 죽고 1명은 실종됐다. 인도네시아 선원은 5명 모두 죽었다. 한국인 사망 선원은 장례비와 사망보험금을 합쳐 1억5천만원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선원에겐 1인 5200만원이 지급됐다.


음력 7월14일인 8월9일 새벽 고등어잡이 대형선망 어선들이 일제히 부산 남항으로 들어왔다. 선망 어선에서 한국인과 이주노동자 선원들이 대형 틀채에 고등어를 담아 상인들의 리어카로 옮겨 싣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음력 7월14일인 8월9일 새벽 고등어잡이 대형선망 어선들이 일제히 부산 남항으로 들어왔다. 선망 어선에서 한국인과 이주노동자 선원들이 대형 틀채에 고등어를 담아 상인들의 리어카로 옮겨 싣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중국인 선원 ㅅ(25)은 경남 통영에서 멸치배를 탔다.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은 선주가 압류했다. 통장도 월급 지급 뒤 선주가 잠깐 보여주고 다시 가져갔다.

2013년 8월 조업을 마친 배가 항구에 들어왔다. 배를 정박시키기 위해 조리담당 선원이 부두에 내렸다. 그는 ㅅ에게 밧줄을 던져 선미와 비트(항구 정박용 쇠기둥)를 연결하도록 했다. ㅅ이 밧줄을 묶고 있을 때 선장이 시동을 걸고 배의 방향을 바꿨다. 밧줄이 ㅅ의 오른쪽 다리와 비트를 한데 묶어 조였다. 응급수술 뒤 다리를 절단했다.

선주는 장애급여신청서를 일방적으로 작성했다. ㅅ에게 내용 설명 없이 사인을 받아 처리했다. 선주는 산재 후 요양도 종결시켰다. 지난 1월 말 ㅅ을 해고했고, 기숙사에서 내보냈다.

ㅅ은 ‘환상통’을 앓고 있다. 다리는 사라졌으나 뇌가 다리의 고통을 기억했다. 가장 푸른 나이에 그는 평생의 노동을 잃었다. 그의 장해급여 금액도 월 110만원(외국인선원 최저임금)으로 계산됐다. ‘이주민과함께’는 한국인과 차별하는 장해급여를 두고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한국인 선원과 외국인 선원의 재해보상금에 차이를 두는 것은 부당하다는 판례(대구지방법원 2011 구합 4177·대구고등법원 2912 누 1397)가 있다.

2012년 5월 제주 해역에서 조업하던 배가 있었다. 새벽 4시 그물을 지탱하는 쇠기둥이 넘어지며 중국인 선원 ㅈ의 머리를 때렸다. 오전 10시에 정신이 들었고, 오후 2시 병원으로 옮겨졌다. 사고로부터 10시간이 지났다. 의사는 치료 시기를 놓쳐 영영 팔을 쓸 수 없다고 했다. 성대를 다친 ㅈ은 목소리도 잃었다. 그는 사고 뒤 조업이 계속돼 10시간이나 방치됐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사고가 나기까지 그의 체불임금은 1900여만원이었다. 선주는 상병급여(4개월까지 임금의 100%를 지급한 뒤 이후부터 70% 지급)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

고등어배가 입항한 남항 한쪽에서 통발 어선이 출항을 준비했다. 태풍이 물러나자마자 배는 닻을 올릴 것이었다. 갓 도착한 이주노동자들이 가방과 이불 보따리를 안고 승선했다.

“아프면 중국 가라, 일 못하면 왜 한국에 있냐”

[오징어: 오징어는 주로 동해와 남해에서 채낚기어선과 트롤어선이 잡는다. 대형 트롤은 오징어를 좇아 전국 연근해를 누빈다. 어선 1척이 어구를 끌어 오징어를 붙든다.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10월 이후엔 매일 바다와 항구를 오가며 조업한다. 남해 오징어는 부산공동어시장 위판장에서 경매에 부쳐진다. 중매인 간의 거래로 서울 노량진시장에서 재경매된다.]

부산 자갈치시장(중구 남포동) 옆 여관방에 담배 연기가 빽빽했다. 인근 여관의 중국인 선원들까지 찾아와 좁은 방이 후텁지근했다. 그들은 오징어잡이 대형 트롤 어선을 탄다. 선주가 얻어준 여관에 머무르며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롤 이주노동자들은 보통 자갈치시장 쪽 여관에 묵었다. 충무시장(서구 남부민동) 근처에선 고등어잡이 선원들이 잠을 잤다. 여관이나 모텔 숙박은 형편이 좋은 편이다. 입항한 뒤에도 땅을 밟지 못한 채 선실에서 자는 이주노동자가 많다. 입·출항 간격이 짧을수록 선원들은 ‘선상 숙박’에서 놓여나기 힘들다.

그들은 재출항(8월13일)을 나흘 앞두고 있었다. 지난 2월 ‘철망’(휴어기를 맞아 조업 중단)한 뒤 6개월의 휴어기(조업기 월급의 50%)를 쉬어야 했다. 반년이나 돈벌이를 제대로 못했다. ‘바짝 일하고 쉴 때 쉰다’는 선주들의 말은 정상 임금을 받는 한국인 선원들에게나 해당했다. 주먹으로 맞고 말로도 얻어맞으면서 돈벌이 때문에 버텨왔다. 휴어기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ㅎ(42)은 중국 다롄에서 택시를 몰았다. 2008년 한국에 왔다. 송출 사기를 당해 입국하는 데 8만5천위안(당시 환율로 약 1360만원)이 들었다. 4년10개월 뒤 재입국 땐 다시 3만위안을 내야 했다. 비자(E10)를 갖고 있지만 휴어기 동안 육지에서 일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ㅎ은 ‘오징어잡이 배를 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봤다. 부질없다. 그는 입국 전에 계약서는 보지도 못했다. 그의 주위에 무슨 배를 탈지 알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근무시간도, 휴게·휴일도, 정확한 임금도 몰랐다. 한국에 온 뒤 관리회사가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여권·외국인등록증·통장은 선주가 보관(2012년 국가인권위 실태조사 결과 본인 보관은 20.7%)했다.

재출항이 시작되면 ㅎ은 오후 3~4시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것이다. 어장에 도착해 조업을 준비하고 밤 12시께부터 그물을 내릴 것이다. 오징어가 많을 땐 하루 5~6망을 할 수도 있다. 조업량에 따라 다음날 아침 6시 혹은 9시 혹은 낮 12시에 입항할 것이다. 오징어를 위판장에 내리고 뒷정리를 끝내면 2~3시간쯤 눈을 붙일 것이다. 오후 3~4시면 다시 바다 위에서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아플 수는 없다. 언젠가 ‘아프다’고 했을 때 ㅎ은 ‘중국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일도 못할 걸 왜 한국에 있냐’며 선장은 화를 냈다. 많이 아프면 파스를 붙이고, 많이 힘들면 소주를 마시라고 했다.

한국인 선원들의 최저임금이 올랐는지 그는 관심 없다. 그들의 임금 인상은 남의 일일 뿐이다. 선택할 수 있다면 ㅎ은 뭍에서 일하고 싶다. 어떤 일이든 좋다. 그는 육지의 월급이 바다 위보단 좋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녹녹’한 것은 뒤집어도 ‘눅눅’할 뿐이다. 중국 허난성 출신 ㅈ(35)은 2010년 입국해 부산 기장에서 멸치배를 탔다. 적은 월급과 한국 선원의 욕설에 마음을 다쳐 남항 오징어배로 옮겼다. 휴어기에 중국을 다녀왔더니 계약해지가 돼 있었다. 미등록 상태로 양파밭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었다. 농사일이 만만치 않아 선원 출신을 환영한다는 말에 ㅈ은 ‘불법체류’를 택했다. 전남 고흥에서 땅을 밟은 그는 전남 강진→충남 아산→강원 횡성→강원 태백 등지를 오가며 배추밭에서 일한다. 바다를 버리고 오른 육지에서 농·축산 이주노동자들은 ‘연중 무휴’(제1025호 표지이야기 참조)의 혹사 속에 살고 있다.

부산=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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