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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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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감금’을 깨고 나와 ‘광야’에 서다

예산을 틀어쥐고 말을 단속하는 학교 당국으로부터 독립한 대학언론
<성신퍼블리카> <국민저널> <외대알리> <고급찌라시> <잠망경> <연세통>을 소개합니다
등록 2014-06-21 03:43 수정 2020-05-02 19:27
80년 역사를 자랑하는 연세대의 교내 신문인 가 11일, 1면을 백지로 만든 ‘호외’를 발행해 눈길을 끌고 있다.(사진) 2007년 5월 학교 쪽과의 편집권 갈등으로 백지 1면을 낸 이후 두번째다. 연세춘추 페이스북

80년 역사를 자랑하는 연세대의 교내 신문인 가 11일, 1면을 백지로 만든 ‘호외’를 발행해 눈길을 끌고 있다.(사진) 2007년 5월 학교 쪽과의 편집권 갈등으로 백지 1면을 낸 이후 두번째다. 연세춘추 페이스북

철거되는 대자보는 말하고 있었다.

“비판이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선 필수적인 일임에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총장 눈치보기에 급급해 학생을 경찰에 넘기는 대학본부에 엄중히 항의한다.”

지난 5월27일 성신여자대학교 학내 게시판에 붙은 ‘ 입장서’가 대학 직원의 손에 뜯겨나갔다. 말을 시작한 지 10여 분 만이었다. 대자보를 붙인 서혜미 편집장은 학교 관계자로부터 “학생 같은 학생은 학교에 필요 없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는 이날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됐다. 학교는 그를 포함한 6명의 학생들이 유인물 배포와 팻말 시위로 학교 업무를 방해했다며 지난해 10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난도질, 삭제, 백지 그리고 해고

성신여대 독립언론 는 창간(2012년 11월28일) 직후부터 심화진 총장의 비리 의혹 사태(2012년 10월 교직원 채용 비리, 급여 및 수당 부정 수령, 교비 유용 등 35개 항목의 비리 의혹을 폭로한 탄원서가 학내에 돌면서 촉발)를 집중 보도해왔다. 취재 과정에서 부총장, 학생처장, 단과대 학장 등이 참석한 학생활동지도위원회에 불려가 취재원 공개를 추궁(2013년 9월)당하기도 했다. 지난 4월엔 결국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학교가 부착을 허락지 않았던 대자보에서 그는 예언하듯 썼다. “창간 당시부터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경찰이 수사 결과를 송치하기 전날 한 장의 성명서가 발표됐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를 가질 권리를 갖는다”며 성신여대에 “언론 탄압” 중단을 요구했다. ‘자치언론네트워크’가 성명을 썼다. 와 (한국외국어대), (국민대)과 (성균관대)가 멤버다. 그들의 창간은 말의 자유를 꿈꾸는 대학생들이 말의 숨길을 허락지 않는 ‘지성의 전당’을 향해 던지는 ‘말의 독립선언’이었다.

창간 준비 당시 는 두 달 앞서 세상에 나온 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은 국민대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강제해직’ 및 ‘권고사직’을 당한 기자들이 ‘검열받지 않는 펜’을 꿈꾼 결과물이었다. 2012년 전국대학강사노조 황효일 국민대 분회장을 인터뷰한 기사를 학교가 ‘방송 불허’했다. 유지영 편집장은 대표 기자 권한으로 기사를 내보낸 직후 “방송국을 운영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해직됐다. 그해 초 문대성씨의 국민대 박사논문 표절 사건이 터졌을 땐 국민대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기사를 쓰지 못하거나 써놓은 기사가 누락된 일도 있었다. “학교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말을 얻으려면 독립언론밖에 방법이 없었다”고 유 편집장은 말했다.

에 창간의 지혜를 구한 전화는 한국외국어대 쪽에서도 걸려왔다. 강유나 편집장(현 외대언론협동조합 이사장)이 학교로부터 강제해고 당한 직후였다. 2012년 가을 총학생회장 선거 당시 학교가 특집호 발행을 차단하자 강 편집장은 학보에 싣지 못한 기사를 A4용지에 사비로 인쇄·제작해 뿌렸다. ‘게릴라 신문’ 발행 뒤 학생들은 A4용지를 사 보냈고 지역 주민들은 전화를 걸어 격려했다. 그는 주간교수가 전체 학생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불미스러운 사건의 조속한 수습’을 약속한 직후(2013년 1월) 해고 통보를 받았다. “주간교수-처장단 회의-총장으로 이어지는 검열을 거치며 기사는 빨간색 펜으로 난도질당했다. 학교와 총장에 불리한 기사란 이유로 1면 머리기사가 삭제되거나 조판까지 마친 상태에서 면 전체가 백지가 되는 일이 수시로 발생했다.” 그는 학생회 선거에 출마해 총학생회의 일원이 됐다. 그는 총학에 독립언론의 필요성을 설득했고, 총학이 조합원으로 참여한 를 만들 수 있었다.

예산과 ‘검열에의 순응’의 두 톱니

는 재벌(삼성)이 학교(성균관대)를 인수한 뒤 말이 꽁꽁 묶인 현실(38~41쪽 기사 참조)에 맞서는 대안으로 독립언론을 고민(2012년 3월 창간준비호 발행)한 경우다. 삼성에 불리한 기사가 실릴 때마다 학보 은 결호를 맞거나 배포 중단을 당했다. 편집장 개마고원(필명)은 “학교로부터 학생자치가 탄압받는 상황에서 관성적인 학생운동으로는 균열을 내기 어려웠다”고 했다.

중앙대 독립언론 도 ‘기업대학’에 ‘말의 자리’를 내려는 학생들의 고민으로 발행(2011년 12월 창간)됐다. 은 ‘자유인문캠프’와 짝이다. 두산그룹이 학교를 인수한 뒤 단행한 거센 구조조정(42~44쪽 기사 참조)이 언로를 끊으며(2010년 강제 수거, 예산 전액 삭감 사태 등) 학내 비판의 목소리가 빠르게 사그라지고 있었다. 일군의 학생들이 ‘잠수함 토끼’(콘스탄틴 게오르규 소설 에서 수병들이 잠수함에 토끼를 태워 산소 농도를 체크하는 장면에서 착안)를 자처하며 ‘자유인문캠프’를 열었다. 비판적 인문학 강좌를 통해 문제의식을 공유한 학생들은 “너무 깊이 잠수하지도 수면 위로 맨몸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도 얼어붙은 공론장에 작은 숨통을 틔우고 싶다며 을 올렸다. 와 은 학교의 탄압을 피해 필명으로 기사를 쓴다.

대학언론의 오늘은 잔혹하다. 학생들에게 저널리즘을 가르치는 대학이 검열로 재갈 물리고 돈으로 길들이며 저널리즘을 앞장서서 짓밟는 사례가 일상화돼 있다. 검열은 예산 지원을 빌미로 강요되고, 예산은 ‘검열에의 순응’을 전제로 보장된다. 둘은 서로 물려 돌아가는 톱니다.

는 2013년 3월 학교의 ‘선택납부제’(모든 학생이 납부하던 신문 구독료를 희망자에 한해 납부)에 항의하며 1면을 비운 호외판을 발행했다. 학교가 예산을 무기로 학내 언론을 고사시키려 한다는 반발이었다. 은 ‘비판 언어’를 얻기 위해 학교의 ‘예산 통제’를 거부한 연세대 독립언론이다. 1996년 학교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독립언론을 꿈꾸며 상경대생들이 만든 이 모체다. 2004년 인력난에 직면한 뒤 상경대를 넘어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으로 재창간했다. 폐간의 위기를 넘기며 ‘살아남은’ 은 대학 독립언론으론 드물게 자생력을 확보하고 있다. 황윤정 편집장은 “검열과 심의를 거부하며 18년이란 시간을 버텨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광고 수입도 제작비를 감당할 만큼은 된다”고 했다.

독립언론은 ‘말의 감금’을 깨고 나와 맞닥뜨린 ‘광야’다. 검열과 예산 대신 말을 선택한 그들 앞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은 없다. 대부분 기자들이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한호 한호 발행하고 있다. 힘들게 만든 매체를 누군가 몰래 뭉텅당이로 수거해 폐기하거나, 학교 공식 언론이 아니라며 취재를 거부당하는 일도 흔하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 모아 발행

지속 가능성은 독립언론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는 숙제이며 난제다. ‘대학언론협동조합’(2013년 5월 창립)이 만들어진 배경이기도 하다. “대학언론의 꺾이지 않는 비판정신은 자립모델과 민주적 소통구조 확보 없이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학교로부터 예산 독립의 의지가 있는 언론들을 대상으로 정책·재정 지원이 가능한 협동조합을 실험하고 있다.” 정상석 이사장(전 편집장)이 말했다.

의 ‘대학독립언론네트워크’는 공동기획·공동취재로 독립언론의 외연 확장을 모색한다. 의 6개 독립언론이 참여하며 대학언론협동조합이 더불어 길을 찾는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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