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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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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임금은 인권이다

패스트푸드 노동자 등 저임금 서비스산업 노동자
중심으로 미·영 등 세계 곳곳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생활임금운동
등록 2014-03-20 06:37 수정 2020-05-02 19:27

지난 3월4~5일 영국 런던대학 소속인 SOAS(School of Oriental and Asian Studies) 대학 용역업체 청소노동자들이 ‘청소노동자에게 정의를’이라는 구호 아래 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2008년 6월 ‘런던 생활임금 지급’을 쟁취한 데 이어 ‘직접 고용’을 요구하고 있다. 청소노동자들은 연금, 병가·휴일수당에 대해 대학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와 동일한 대우를 요구하고 있다. 용역업체에서 매일 괴롭힘을 당하고, 비용을 절감시키려는 시도가 지속돼온 탓이다. 2012년 학생과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 결과, 투표자의 98.2%가 청소노동자를 학교가 직접 고용하는 것에 찬성했다. SOAS 학생회는 2013~2014년 안내서에서 “학교는 강의실에서 전파하고 있는 평등과 사회정의의 가치를 실천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청소노동자도 학교 공동체의 당사자이므로 학교가 이에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청소노동자 지지 방안도 제시했다. 집회에 참석하기, 학교 경영진에게 ‘청소노동자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요구하는 내용의 편지 쓰기, 교내에서 청소노동자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기 등이다.

1994년 볼티모어에서 생활임금조례 첫 제정

이처럼 생활임금운동은 대학 청소노동자, 패스트푸드 노동자 등 저임금 서비스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 세계 곳곳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94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에서 최초의 생활임금조례가 제정되었다. 시 정부와 거래하는 모든 기업이 노동자에게 당시 연방 최저임금(4.25달러)보다 높은 6.1달러를 지급하고, 1999년까지 연방 최저임금보다 50% 높은 임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이후 생활임금운동은 빠른 속도로 미국 전역에 퍼졌고, 그 결과 140여 개 지방자치단체에서 다양한 형태의 생활임금조례가 제정되었다.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파업 투쟁으로 올해 미국 중간선거에서는 생활임금과 최저임금 인상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연방 최저임금을 10.1달러로 인상하는 데 찬성한다고 밝혔다.


생활임금운동은 대학으로도 확산됐는데, 볼티모어시의 생활임금조례 제정 이후 메릴랜드주에서 가장 큰 민간 고용주인 존스홉킨스대학의 학생들은 대학 당국이 생활임금을 주도록 요구했다. 이 싸움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현재는 메릴랜드주 남부에 있는 세인트메리스대학의 학생·교수·직원들이 “학교에서 임금이 가장 높은 사람(학장)이 받는 금액의 적어도 10분의 1을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01년 하버드대학에서의 생활임금 캠페인은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학생들은 대학에 고용된 모든 노동자에게 시간당 10.25달러와 수당을 지급할 것을 요구하며 대학 행정관을 점거했다. 3주에 걸친 연좌시위는 결국 대학 본부가 하도급 노동자에게도 생활임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대학’이라는 하버드대학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시간당 6.5달러의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청소·경비·식당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의 생활임금운동에 학생, 보스턴 지역사회의 지지가 이어지면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최근 미국에서는 월마트와 패스트푸드 등 저임금 서비스산업 노동자들의 생활임금 요구 운동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월마트 노동자들은 2012년 6월 이후 ‘시간당 15달러의 생활임금 지급’과 ‘부당노동행위 중단’을 요구하며 주요 도시에서 잇따라 파업시위를 벌였다. 그해 10월에는 월마트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전체 12개 주 28개 매장에서 동시 파업을 진행했다. 지난해에는 1500개 매장에서 동시 파업이 일어났다. 맥도널드·버거킹·웬디스 등에 고용돼 있는 패스트푸드 노동자들도 2012년 11월 뉴욕에서 시간당 15달러의 생활임금을 요구하며 사상 첫 파업에 나섰다. 1천만 명에 이르는 미국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은 대부분 연방 최저임금인 7.25달러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있다. 이같은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파업 투쟁으로 올해 미국 중간선거에서는 생활임금과 최저임금 인상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연방 최저임금을 10.10달러로 인상하는 데 찬성한다고 밝혔다.
영국에서는 처음 병원에 도입되었던 생활임금이 대학·호텔 등 다른 분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현재 보수당이 집권한 런던시를 비롯해 정부기관, 학교, 병원, 금융권 등 140여 개 기관이 생활임금을 채택하고 있다.

공공기관에서 민간기업까지 요구 확대

런던시는 2007년부터 생활임금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교회·학교·노조 등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공공부문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임금 쟁취를 목표로 캠페인을 전개한 결과다. 2002년부터 런던시 당국이 ‘공정 고용’ 조항을 민간업자와의 계약 절차에 도입했고, 런던시와 거래하는 민간업자는 직원들에게 적어도 공공부문 임금과 동일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 런던시의 직간접 고용 노동자들은 영국 법정 최저임금인 시간당 6.08파운드보다 높은 수준인 8.3파운드(2012년 기준·약 1만4970원) 이상의 생활임금을 지급받고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후원업체 등 계약을 맺은 1천여 개 기업에 런던시의 생활임금을 적용하도록 했다. 올림픽이 개최되는 곳에서 생기는 모든 새로운 일자리에 대해 생활임금을 지급함으로써, 투자 혜택을 런던의 근로빈곤층에게도 주려는 목적이었다. 올림픽 조직위와 계약을 맺은 민간업체 고용주는 ‘사회적 책임 계약 헌장’에 서명해야 했다. 이에 따라 △모든 직접 고용(계약) 직원에게 생활임금 지급 △20일의 유급휴가와 법정 휴일 부여 △노조에 대한 자유롭고 제한 없는 접근 등을 보장해야 했다. 그리고 민간업체들은 고용한 노동자의 임금수준과 노동조건에 관련한 상세한 모니터링 보고서를 올림픽 조직위에 제출해야 했다.
생활임금운동은 원래 공공부문 노동자나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부문과 계약을 맺고 있는 민간기업, 그리고 지방정부로부터 조세를 감면받거나 보조금을 받는 민간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와 같은 특정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다. 지자체는 공공계약을 낙찰받은 민간기업에 공공기금 사용에 따른 책임을 지운다. 그럼으로써 공공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공공부문이 모범적인 고용주로서 민간기업의 노동조건도 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외국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민간기업 고용주에게까지 생활임금 요구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저임금 및 빈곤 해소 운동

한국의 노동·시민단체도 ‘최저임금 현실화’를 위해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생활임금 보장을 요구해왔다.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6월 말에만 집중되는 운동의 한계를 벗어나, 일상적으로 저임금 및 빈곤을 해소하는 운동을 벌이기 위해서다. 또 생활임금운동은 지역을 기반으로 세금이 어떻게 사용되고, 공공자금으로 어떤 유형의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도 가능하게 해준다.
“생활임금은 인권이다.” 미국에서 생활임금운동을 벌이고 있는 월마트와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주장이다.

황선자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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