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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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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18, 우리 이야기 좀 들어볼래?

<한겨레21> 창간 18돌 맞아 18명의 일반고·특수목적고·전문계고·탈학교
18살 청소년에게 묻다…당신을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등록 2012-03-08 07:16 수정 2020-05-02 19:26

입천장과 혀 사이를 미끄러진 바람이 닫힌 입술에 막혀 안으로 말려드나 싶더니(시~입), 미세한 액체 파편들과 함께 격한 파열음을 입 밖으로 비산한다(팔!). 묘한 불온성이 감도는 이 소리는 만들기가 비교적 단순할 뿐 아니라, 조음 과정에 동반되는 심리적 이완의 효과마저 탁월해 어지간한 자제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선 한번 들인 그 맛의 중독성을 좀처럼 멀리하기 힘들다. 숫자 열여덟을 의미하는 이 기호를, 우리는 ‘18’이라 쓰고 ‘십팔’이라 읽는다.

한겨레신문사와 서울시교육청 주최로 해마다 열리는 서울학생 동아리한마당 개막 행사에서 학생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번 특집 기사에서 환호와 같은 ‘18’을 들어보자. 한겨레 신소영

한겨레신문사와 서울시교육청 주최로 해마다 열리는 서울학생 동아리한마당 개막 행사에서 학생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번 특집 기사에서 환호와 같은 ‘18’을 들어보자. 한겨레 신소영


창간 18돌을 맞은 이 18살 청소년 18명에게 물었다. “무엇이 당신을 ‘18거리게’ 만드는가.” 답변은 예상외로 다양했다. 즐겨 먹던 과자 값이 예고 없이 올랐을 때, 아르바이트 면접을 갔더니 부모 동의서를 요구할 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형·누나 행세하려 들 때…. 대화를 거듭할수록 이 불량기 어린 파열음의 빈도 높은 사용은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미성숙한 인격체들의 투박한 분노라기보다, 근거 없는 권위나 천박한 날것의 폭력 앞에 순순히 눈을 깔지 않겠다는 절박한 자존감의 선언처럼 들렸다. 이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해 싣는다.

18-1. 대책없이 취업을 강요하지 말아요

특성화고·전문계고라고 해서 취업을 강요하는 듯한 정부 정책이 싫어요. 우리 같은 특성화고 아이들이 졸업하자마자 무조건 취업을 원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 학교는 배우는 분야가 예술 쪽이잖아요. 만화창작학과, 애니메이션학과, 영상과, 컴퓨터게임과가 있는데, 만화·애니·영상 쪽은 막상 취업을 하려 하면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다른 학교의 경우 공기업 등에서 고졸자를 채용하거나 은행원을 뽑기도 한다지만, 우리는 ‘전공’을 배우러 왔지 그런 취업 자리를 생각하고 학교에 들어온 게 아니잖아요. 솔직히 우리 쪽 분야는 고졸자들이 갈 만한 괜찮은 취업 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취업을 한다 해도 대졸자와의 대우도 차이가 나고요. 그런 걸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이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 실제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갑니다. 반면 정부나 교육청 등에서는 어느 정도의 취업률이 나오길 원하는 거 같아요. 사실 학교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도 전공을 살리고 돈도 잘 버는 취업 자리가 있으면 갈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자리가 없잖아요. 김다현/ 경기 하남 한국애니메이션고

18-2. 남녀 할 일 구분하는 당신은 마초?

그림을 그립니다. 일러스트 작가나 만화가가 되고 싶어요. 가끔 탈학교 청소년 모임에 나가 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만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엔 왜 그렇게 마초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런 사람들 볼 때마다 조용히 속으로 ‘열여덟’을 셉니다. 지난해엔 활동하는 모임에서 단체로 일본에 다녀왔어요. 그곳의 탈학교 청소년들과 함께 생활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싶었거든요. 9박10일의 일정 동안 식사를 우리 스스로 준비했습니다. 메뉴를 정하고 시장에서 재료를 사다가 직접 요리를 했는데, 여기까진 남녀 구분 없이 일을 나눠서 했죠. 그런데 간식이나 야식을 먹을 땐 달라지는 거예요. 남자들은 당연히 여자들이 해야 한다고 하고, 몇몇 여자아이들은 그걸 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실 마초라는 단어는 중3 때 알게 됐지만, 그런 행동과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건 오래됐어요. 남자아이 중엔 욕하고 거칠게 행동하는 걸 남자다운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말을 걸며 공연히 툭툭 치는 아이도 있고. 일본 아이들 보니까 우리처럼 그러진 않더라고요. 그쪽 남자들이 좀 여성적이어서 그런가? 대체 남자가 할 일과 여자가 할 일은 언제부터, 누가 구분해놓은 겁니까? 김단/ 탈학교 청소년·경기 파주

18-3. 나쁜 역사가 반복될 때

한국사 공부를 좋아합니다. 근데 역사는 반복된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옛날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머리가 굵어지고 책과 신문을 자주 읽다 보니 그 뜻을 알겠더라고요. 대표적인 게 삼정의 문란. 이거 조선시대 얘기가 아니더군요. 부자들 세금 깎아주면서 가난한 사람 쥐어짜고, 토호들과 건설업체 배불리려 멀쩡한 강 파헤치고, 권력자들이 온갖 편법을 동원해 자식들 군대 안 보내고. 이런 게 삼정의 문란 아니고 뭐겠습니까? 더 화나는 건 정치하는 사람들의 뿌리 깊은 사대주의 근성입니다. 병자호란이 왜 일어났습니까? 의리니 명분이니 떠들며 망해가는 명나라 편에 붙어 청나라를 자극하다 된통 당한 거잖아요? 그때 가장 많이 피해를 입은 게 누굽니까? 힘없는 백성들이잖아요. 광해군이 왜 중립외교를 했는데요? 도망간 아버지 대신 전쟁 피해 현장을 돌아다니며 전쟁이 백성들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똑똑히 목격했거든요. 그래서 명분론자들의 탄핵 위협을 무릅쓰고 청나라와 관계를 개선하려 했던 거죠. 지금 북한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사람들, 세계 정세 똑바로 보지 못하고 오로지 미국에만 매달리려는 사람들을 보면 나라의 안위는 뒷전이고 자기들 기득권만 지키려는 것처럼 느껴져요. 김동은/ 광주 지혜학교(대안학교)

18-4. 군대를 생각하면 벌써 갑갑해요

제가 다니는 학교에는 대학에 갈 때까지도, 아니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친구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음 한켠에는 늘 군대에 대한 고민이 자리잡고 있어요. 요즘처럼 고3을 앞두고 친구들이랑 이야기할 때면 군대 문제가 꼭 화제가 됩니다. 너나없이 입에서 욕이 튀어나옵니다. 뭐, 군대 얘기를 하다 보면 ‘우리도 진짜 남자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죠. 우리한텐 그 기간 2년이 그냥 허비한다는 느낌이 강해요. 군대를 안 가면 그 기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잖아요. 2년 동안 알바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돈으로 여행도 갈 수 있고, 학비에 보탤 수도 있겠죠.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한다면 그 기간에 인생을 바꿀 수도 있어요. 그리고 군대를 안 가는 사람도 있잖아요. 특히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안 가는 사람들, 그 생각을 하면 욕이 더 거칠어지죠. 어떤 사람들은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모르겠어요. 인생 고민을 군대에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일단은 기간을 좀 줄이는 방향으로 하고, 그리고 모두가 군대 안 가고 하고 싶은 것 하며 살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어요. 김동환/ 서울 용산공고

18-5.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름이 좀 특이하죠? 청소년 단체 활동명입니다. 제 본명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학교를 그만둔 뒤 서울 명동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일합니다. 홀에서 주문받고, 음식 나르고, 설거지를 하는데, 시급이 5500원으로 괜찮아요. 딱히 어려운 점은 없습니다. 근데 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형·누나란 호칭을 강요하는 건 싫어요. 첫 출근날 여직원 한 분이 저를 데리고 간단히 해야 할 업무를 설명해주더니 쉬는 시간에 제 나이를 묻고는 선심 쓰듯 이야기하더라고요. “앞으론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 나쁜 뜻이 아니란 건 아는데, 저는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저는 누나보다 ○○○씨라고 부르는 게 더 편한데요” 했더니 “왜? 넌 나보다 나이가 어리잖아?” 하며 토끼눈을 뜨는 겁니다. ‘뭐, 이런 황당하고 버릇없는 녀석이 다 있어?’ 하는 표정이더라고요. 사실 이런 마찰이 처음이 아니었어요. 전에 일하던 명동의 찜닭집에서도 그랬거든요. 거기선 심지어 “그런 식이면 사회생활 못한다. 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냐”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저는 나이로 위아래를 따져 붙이는 형이나 누나 같은 호칭이 싫습니다. 호칭으로 위계가 가려지는 순간 두 사람은 불평등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니까요. 매미/ 탈학교 청소년·경기 광명

18-6. 수능특강 교재 표지, 의도가 뭐죠?

교육방송 수능특강 교재의 표지 사진이 ‘꼬치’라니, 이게 말이 되나요. 친구들이 다 싫어해요. 아니, 왜 먹고 싶게 그런 디자인을 했을까요. 교재를 펴기만 하면 배가 고파지잖아요. 지난해 교재 표지는 꽃 그림이었는데 무난했어요. 그런데 왜 올해는 표지가 꼬치 사진일까. 수많은 교재를 봐왔지만 음식이 나오는 표지는 처음 봅니다. 밤에 공부하려고 책을 폈다가 갑자기 편의점에 가서 라면을 먹고 온 적도 있어요.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표지여야 하는데 보고 있으면 먹고 싶어지고. 교육방송 쪽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원래 교육방송 교재가 특별히 예쁘거나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표지 디자인이 이랬으면 좋겠다 이런 것도 없어요. 그냥 무난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표지 한가운데 덩그러니 꼬치가 놓여 있으니. 그것도 고기 꼬치라니요.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식욕도 엄청나요. 요리책도 아니고 수능시험 교재에 이게 무슨 일인가요. 언어·외국어·사탐·과탐 모든 과목이 꼬치 표지예요. 전국의 고3 수험생들이 매일 밤 꼬치를 보며 공부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박성연/ 전북 전주 전북여고

18-7. 교과서는 무용지물인가요?

교과서를 단체로 구매했는데 막상 수업을 하려니까 고3이라고 국어와 영어 시간에도 교육방송 수능특강 교재를 푼다고 하네요. 내신도 수능특강 교재에서 나온 문제로 시험을 본다니, 교과서는 쓸모가 없어졌어요. 교육방송 교재로만 꼭 해야 하는 거잖아요. 수능시험에 나온다고 하니까 어떻게든 꼼꼼하게 봐야 하고요. 정부 방침이 수능시험 쉽게 낸다는 것이고, 교육방송 콘텐츠가 교재도 싸고 강의도 무료라는 장점이 있지만, 교육방송만 좋은 일 시키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공교육 정상화한다고 교육방송과 수능시험 출제 연계를 늘렸다는데, 오히려 학교에서는 정규교과를 못 나가고 교육방송 문제집만 보는 이상한 상황이 됐잖아요. 교육방송 교재만 파고들면 된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학교 수업시간에 일종의 사교육 기관, 일종의 텔레비전 학원 문제집을 푼다는 것 자체가 공교육이라는 틀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학교 고3들도 수업시간이나 보충수업 때 대부분 교육방송 교재를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배들도 교육방송에 끊임없이 매달려야 한다니,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박소은/ 경기 평택여고

18-8. 외고생도 외국어는 어렵다고요

외고생이라고 하면 외국어를 무조건 잘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무조건은 없습니다. 저희도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외국어를 잘하는 친구도 많지만, 배우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친구도 아주 가끔 나옵니다. 1학년 때는 열심히 하다가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난이도가 높아지거든요. 저희 학교는 기본은 영어이고 중국어나 일본어를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중국어반입니다. 중국 영화나 드라마를 자막 없이 편히 볼 수 있냐고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죠. 기본적으로 듣기나 독해는 그래도 괜찮은 편인데 말하기는 아직은 조금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중포자’는 아니에요. 중국어를 중간에 포기하는 친구들을 중포자라고 하거든요. 요즘 외국어 선호도를 보면 일본어보다 중국어를 더 많이 선택합니다. 영어가 여전히 1위, 중국어가 2위, 일본어가 3위. 일본 만화나 음악 때문에 일본어가 더 인기 있을 것 같지만, 요즘은 중국이라는 나라의 영향력이 워낙 커져서 중국어를 배워두려는 친구들이 많아졌거든요. 박유현/ 경기 의왕 경기외고

18-9. 진짜 찍고 싶어!

저, 투표하고 싶습니다. 12월 대통령 선거 말입니다. 18살이면 사리 판단 다 하는 나이잖아요. 대통령 선거일이 수능 끝나고 있으니, 학업에도 지장 없습니다. 지금 후보로 거론되는 분 가운데 존경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분이 쓴 책도 읽었고요. 지금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이 사익과 공익을 혼동하는 거잖아요. 지금까지 그분이 걸어온 길을 보면 신뢰가 갑니다. 한국 정치를 바로잡을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 놈이 웬 정치에 그렇게 관심이 많냐고요? 그게 나쁜 일입니까? 저는 대학에 가서 정치학을 공부할 겁니다. 정치가 뭐 거창한 겁니까? 공동체의 일을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풀어가는 과정이 정치잖아요. 학교 학생회 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지금 학생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지난해 2학기부터 올 1학기까지가 임기죠. 누군 감투 욕심 있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전 그저 이 일이 즐겁고 보람 있을 뿐입니다. 요즘 주력하는 건 침체된 동아리 활동을 활성화하는 겁니다. 학교 동아리들이 동아리 본래 활동보다는 친목모임처럼 된 곳이 꽤 있거든요. 주변에선 이제 고3이니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남은 임기 중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볼 작정입니다. 백운중/ 충남 공주사대부고

18-10. 헉, 과자값 300원이나 올랐어

지금 전화받고 있는 제 앞 책상에 있는 가 가장 욕 나오게 하는 물건입니다. 교재들이 죽 늘어서 있어요. 교육방송에서 나온 수능특강 교재예요. 지난해까지는 정말 ‘고3’이랑 ‘군대’는 먼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코앞에 닥친 현실이 돼 있더라고요. 공부를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언어영역이랑 문학을 좋아해요. 어려서부터 읽고 쓰는 데 취미가 있었거든요. 나이가 나이인 만큼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일도 물론 좋아하고요. 싫어하는 과목은 수학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싫었어요. 그런데 수학 점수가 안 나와서 한동안 수학 공부만 했더니, 이젠 언어영역 점수가 떨어지네요. 어떨 땐 수학 문제가 외계어 같아요. 게다가 수학은 개성이 없어요. 언제나 정답이 하나잖아요. 세상이 어디 수학 문제 풀리듯 그렇게 명쾌하게 풀리는 건 아닌데. 그래서 진학하고 싶은 학과도 신문방송학과입니다. 기자 되는 게 꿈이에요. 6개월 동안 언론사 학생기자 활동도 했어요. 참, 초코 다이제스티브를 좋아했는데 최근 가격이 300원 올라서 욕 나오는 건 말하면 안 되나요? 용돈이 한 달 5만원인데 300원 오른 건 크다니깐요. 오죽하면 가격이 오른 뒤 아예 안 사먹는다니까요. 서형동/ 인천외고

18-11. 패딩 점퍼 좀 입으면 안됩니까?

욕 나오게 만드는 것, 너무 많아요. 요즘처럼 날이 풀릴 때는 점퍼 하나 마음대로 못 입게 하는 게 가장 화가 납니다. 추울 때는 뭐라고 안 하는데, 날씨가 좀 따뜻해진다 싶으면 꼭 패딩 점퍼 입고 나오지 말라고 합니다. 학교 방침이라면서요. 이해가 안 갑니다. 학생이니까 학교 올 때 교복 입으라고 하는 건 수긍해요. 근데 패딩은 추우니까 겉에다 입는 거잖아요. 요즘 학교폭력 얘기하면서 문제가 됐던, 노스페이스만 입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패딩 점퍼는 무조건 안 된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노스페이스 입지도 않아요. 날이 좀 풀렸다는 게 이유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안 돼요. 추운데 어떡하라는 겁니까? 추울 때 패딩만 한 게 있나요? 게다가 노스페이스는 특히나 안 좋게 보는데, 그것도 과장된 거죠. 노스페이스 입는 것 갖고도 싸냐 비싸냐를 따져서 계급이다 뭐다 하는데, 사실 안 입는 애들이 더 많아요. 교복도 아니고 다 똑같이 입는 건 좀 웃기잖아요. 제가 섬유디자인과를 다녀서 특별히 그런 건 아니에요. 다들 똑같은 건 재미없으니까요. 그래서 요즘은 아이들이 노스페이스 잘 안 입어요. 그런데 굳이 그걸 갖고 입고나오지 말라고 하는 건 진짜 웃겨요. 양용식/ 서울공고

18-12. 요원하기만 한 학교 탈출

음대 지망생입니다. 성악이나 연주 쪽은 아니고, 작곡이에요. 그것도 고상한 클래식 쪽은 아니고요. 실용음악 정도라고 해두죠. 영화음악, 재즈 이런 거 있잖아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학교 공부엔 그다지 취미가 없었어요. 하하. 근데 학교라는 데는 정말, 우리의 숨겨진 재능을 끌어내기보다 교과 성적이라는 획일적 틀에 맞춰 모든 것을 뽑아내려는 곳이에요. 숫제 공장에서 장난감 찍어내는 것과 다를 게 없잖아요. 그러니 욕이 나오지 않을 수 없죠. 문제는 학교를 때려칠 만큼 저에게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란 사실입니다. 어쨌든 대학에 가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하니까요. 예술하는 사람이 꼭 대학을 나올 필요가 있냐고요? 참, 말 쉽게 하시네요. 고등학교만 나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 거 같아요? ‘쟤 품행이 불량하거나, 지능에 심각한 하자 있는 거 아냐?’ 이럴 거 아녜요. 여자친구 하나라도 생기겠어요? 사실 다른 나라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는 대학 안 나오면 사람 취급도 안 해주는 게 있잖아요. 근데 좋은 학교도 아니면서, 등록금은 왜 그렇게 비싸요? 이상현/ 서울 명지고

18-13. 한달 용돈 4분의 1 털어간 동생

영상을 좋아하는 학생입니다. 수행 평가하며 친구들과 영화도 만들어봤죠. 제목은 〈I’m prisoned〉예요. 갇혀 있다는 뜻의 ‘임프리즌드’도 되고, 중의적으로 ‘나는 갇혀 있다’라는 뜻도 돼요. 학교 생활의 답답함을 호소하고 싶었어요. 영화 만드는 내내 재밌었어요. 그렇지만 요즘 학교 생활 말고 저를 화나게 하는 건 동생입니다. 동생이 중3인데 자꾸 제 지갑에 손을 대요.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최근엔 잠깐 가출을 한 적이 있어요. 저희 집이 아파트 2층이거든요. 부모님이 문 밖에서 지키고 계시니까, 2층에서 밑으로 베개를 던지더라고요. 그러더니, 베개 위로 사뿐히 뛰어내린 뒤 사라지는 거 있죠? 제 딴엔 바닥에 충돌할 때 나는 소리를 줄이고 다치는 것도 방지한다고 꾀를 쓴 건데, 어떻게 그런 잔머리를 타고났는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보니 제 지갑에서 2만원이 없어졌더라고요. 제 한 달 용돈이 8만원인데 4분의 1을 털어간 거지요. 다행히 동생은 금방 돌아왔습니다. 배고프다고 하룻만에 백기투항한 거지요. 이 말썽 많은 녀석, 여동생입니다. 2만원 돌려받았냐고요? 그냥 쿨하게 안 받기로 했어요. 돌아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죠. 이종헌/ 인천외고

18-14. 세상 알만큼 아는 열여덟입니다

독립을 꿈꾸는 제게 세상은 너무 불친절합니다. 올해 초 부모님 동의를 구한 뒤 다니던 대안학교를 그만뒀습니다. 명색이 대안학교인데, 분위기는 일반학교 못잖게 억압적이었거든요. 월세 보증금 200만원을 마련하려고 한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일곱 군데 면접을 봤는데, 제 맘에 드는 곳은 저를 거부하네요. 피자집 알바하는데 부모 동의서가 왜 필요한 겁니까? 어떤 데선 동의서가 없다는 이유로 시급을 깎는 만행까지 저지른다더군요. 그리고 자퇴했다고 하면 왜 그렇게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는 겁니까? 자퇴생이 예비 범죄자라도 됩니까? 얼마 전엔 인터넷 지원서에 분명히 1994년생이라고 밝혔는데, 막상 면접 보러 갔더니 너무 어려서 안 되겠다고 하더군요. 다 큰 사람 데리고 장난하는 겁니까? 집을 구하는 데도 제약이 많습니다. 월세 계약을 하려면 친권자(부모) 명의로 해야 하고, 내 이름으로 하더라도 언제라도 친권자가 직권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더군요. 저 이제 열여덟입니다. 세상 물정 알 만큼 아는 나이잖아요. 왜 기본적인 노동계약이나 부동산계약을 제 뜻대로 체결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이건 명백히 청소년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겁니다. 조은별/ 탈학교 청소년·대구

18-15. 서랍에 처박힌 주민등록증

혹시 “민증 안 풀렸다”는 말 들어보셨어요? 첨 들어보신다고요? 우리 사이에선 흔한 말인데. 열여덟 살이 되면 주민등록증이 나오는 건 아시죠? 주민등록증이 나왔다는 건 나라가 ‘너, 이제부터 어른으로 인정해줄게’ 하는 뜻이잖아요. 근데 민증은 내주고, 그걸로 할 수 있는 건 죄다 틀어막으니 열이 받지요. 이걸 가지고 술집을 갈 수 있습니까, 성인영화를 볼 수 있습니까? 이럴 거면서 민증은 왜 만들어주는 겁니까? 일찍 만들지나 말든가요. 그래서 전 주민등록증을 그냥 제 방 서랍에 처박아두고 있어요. 들고 다니면 지갑만 두꺼워지니까요. 이것저것 할인받는 걸로 치면 학생증이 훨씬 편하거든요. 저 올해 고3입니다. 이것 말고도 욕 나오는 일들 무지 많아요. 왜 민증은 내줘서 안 받아도 될 스트레스를 안겨줍니까. 한 가지 더 말해도 되죠? 사실 올해부터 대학 수시입학 지원이 6개 대학으로 제한되거든요. 그전까지는 무제한이었는데. 저도 벌써 수시지원서를 낼 대학 8개를 마음속에 정해놨는데 당장 2개 대학을 빼야 해요. 전형료 줄어드니 좋은 거 아니냐고 하는데, 어느 대학이든 붙는 게 우선인 우리 처지에선 그게 아니죠. 진솔희/ 경기 안성 가온고

18-16. 다이어트에 실패했을 때

실은 저 다이어트 중이에요. 어제 점심부터 안 먹었어요. 배고파요. 못 참겠어요. 치킨 조각들이 눈앞에 어른거려요. 그래도 참아야겠죠? 왜냐면, 다이어트 실패했을 때 찾아오는 좌절감이 장난 아니거든요. 진짜 욕이 막 나와요. 공감하시죠? 요즘은 30~40 먹은 아저씨들도 다이어트하잖아요. 그런데 꼭 다이어트할 때만 밥을 사준다는 친구들이 있어요. 나 굶는 것 뻔히 알면서 자기들끼리 맛있는 것 먹으러 간다고 그러고요. 엄마도 마찬가지예요. 꼭 제가 다이어트하는 날만 갑자기 맛있는 것 해놓고는 “수지야, 밥 먹자”라고 애틋하게 불러요. 정말 아무도 안 도와줘요. 실은 어제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뚱뚱해서 헤어졌냐고요? 당근 아니죠. 이별의 아픔을 이기려 밥을 굶는 것도 아니에요. 이별은 이별이고 다이어트는 다이어트죠. 어쨌거나 이번 다이어트는 꼭 성공해서 욕 안 나오게 할래요. 그런데 벌써부터 맛있는 것밖에 생각이 안 나요. 치킨, 라면, 떡볶이, 김밥. 이 유혹을 이겨낼 힘을 제게 주세요. 저를 유혹하는 악마 같은 사람들에게는,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이 볼과 허리로 가게 해주세요. 아멘. 최수지/ 서울 대일관광디자인고

18-17. 검정고시, 참 뭐 같습니다

2월에 ‘꽃피는 학교’라는 대안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생일이 빨라 학교를 1년 일찍 갔거든요. 지금은 학원 다니고 있어요. 재수생이냐고요? 아뇨. 검시생입니다. 남들과 똑같이 12년 동안 학교 다녔는데 검정고시를 봐야 하는 현실, 참 뭐 같습니다. 어려운 시험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요? 그래요. 평균 60점만 넘으면 되는 시험입니다. 떨어지는 사람 거의 없어요. 그래도 이게 없어져야 한다는 제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일반고나 전문계고 나오면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학력을 인정해주면서, 왜 대안학교 졸업생은 안 되는 겁니까? 어떻게든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을 통해 줄을 세우겠다는 거잖아요. 왜 배움을 알량한 국가시험으로 재단하려 합니까? 우리가 무슨 의사나 변호사 자격 인정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친구 중엔 검정고시 자체를 안 보겠다는 친구도 있어요. 대학도 안 가겠대요. 용감한 친구죠. 저로선 대학을 가려니까 어쩔 수 없어요. 한 달 수강료가 33만원이나 하는데, 돈도 너무 아깝고. 더 욕 나오는 건 제가 가고 싶은 음악치료과가 정규학과로 돼 있는 대학이 딱 한 군데인데, 거긴 여자만 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학교에 편지를 써볼까요? 혹시 여대에 남학생이 입학한 전례가 있나요? 허두원/ 검정고시 준비생·서울

18-18. 남녀공학,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녀공학에 대한 편견을 깨드릴게요. 남녀공학 학생들은 공부 안 하고 놀 거라는 편견, 사실이 아니에요. 내신을 따기 쉽다는 편견, 그렇지 않아요. 남녀공학에 가면 내신성적 쉽게 딸 거라는 일부 학부모님들, 과연 자제분이 우리 학교에 오기만 하면 전교 1등을 할 거 같은가요? 다른 여고 시험지를 가져다 풀면 우리 학교보다 문제가 쉬운 경우도 있어요.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을 위해 내신을 깔아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학부모님, 그렇지 않습니다. 남녀공학이라면 다들 연애하느라 공부를 안 할 것이라는 생각, 틀렸어요. 연애? 10명 중에 1명 정도 할걸요. 몰래 하면 모르겠지만요. 게다가 대전 남녀공학의 특징은 합반이 아니라 남자반, 여자반 따로 있다는 사실. 심지어 우리 학교는 1학년 때는 건물동도 따로 사용합니다. 그럴 거면 왜 남녀공학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연애를 했더니 남자친구의 성적이 오히려 올랐다는 친구도 있습니다. 어떤 커플은 선생님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기도 해요. 선생님들이 지지하는 연애가 있다는 거죠. 대놓고 ‘연애 금지’를 선언하는 선생님은 없습니다. 홍나라/ 대전 둔원고

열여덟 청춘들의 화를 돋우는 일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저임금의 아르바이트 현장, 획일적 수능시험, 폭력적인 복장 단속…. 이들이 쏟아내는 ‘18’이란 파열음은 미성숙한 인격체들의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투박한 분노라기보다, 근거 없는 권위나 천박한 날것의 폭력 앞에 순순히 눈을 깔지 않겠다는 절박한 자존감의 선언처럼 들린다.

열여덟 청춘들의 화를 돋우는 일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저임금의 아르바이트 현장, 획일적 수능시험, 폭력적인 복장 단속…. 이들이 쏟아내는 ‘18’이란 파열음은 미성숙한 인격체들의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투박한 분노라기보다, 근거 없는 권위나 천박한 날것의 폭력 앞에 순순히 눈을 깔지 않겠다는 절박한 자존감의 선언처럼 들린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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