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퇴행의 시대, 노란 불은 더 빛난다

지난 10년 가장 중요한 인물, 노무현 전 대통령
21세기 희망의 역사를 쓰다 사라지다
등록 2010-12-29 05:47 수정 2020-05-02 19:26

‘21세기 첫 10년의 가장 중요한 인물’을 찾는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이 꼽은 사람은 스스로 “대통령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응답자 100명 가운데 30명으로 압도적이었다.
새로운 세기 첫 전쟁의 도화선이 된 9·11 테러의 양 당사자인 오사마 빈라덴(11명)과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10명)이 뒤를 이었고, ‘애플 혁명’의 진원지 스티브 잡스(9명)와 민감한 세계 외교가의 봉인을 풀어버린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산지(8명)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6·15 남북 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 수상이 2000년의 일이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예시에서 빠졌음에도 ‘기타’란에 그의 이름을 적어넣은 응답자도 8명이나 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직임에도 하위권에 머물렀다. 단 3명만이 그를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여겼다.

» 각계 주요 인사 1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21세기 첫 10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 노무현은 대통령 퇴임 이후 인기가 더 좋았다. 봉하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을 만나는 게 ‘고단한 즐거움’이었는데 검찰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2008년 12월5일 이마저도 중단했다(오른쪽). 김대중 전 대통령(맨 위),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조사에서 21세기 첫 10년의 가장 중요한 인물 상위권을 차지했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연합 AP

» 각계 주요 인사 1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21세기 첫 10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 노무현은 대통령 퇴임 이후 인기가 더 좋았다. 봉하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을 만나는 게 ‘고단한 즐거움’이었는데 검찰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2008년 12월5일 이마저도 중단했다(오른쪽). 김대중 전 대통령(맨 위),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조사에서 21세기 첫 10년의 가장 중요한 인물 상위권을 차지했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연합 AP

“민주정부-독재회귀, 비교체험 극과 극”

왜 노무현일까?

우선 지난 10년에 그의 극적인 삶이 집약돼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정치인 팬카페의 선두주자였다. 2002년 ‘이인제 대세론’을 꺾고 민주당 국민참여경선에서 대통령 후보가 됐다. 지지율이 춤을 추다가 우여곡절 끝에 후보단일화를 이루고 12월 대선에서 승리했다. 재임 기간 수많은 공과 과를 남겼고,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소추의 대상이 됐다. 2008년 퇴임해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가 농부의 삶을 살려 했으나, 결국 그가 나고 자란 마을의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2009년 5월23일이었다. 대통령으로서 알고 저지른 범죄와 주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벌어진 사고의 차이를, 세상은 구별하지 않았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서전 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것 말고는 모두를 이 수렁에서 건져 낼 방법이 없었다”고 썼다. 죽음마저도 극적이었다.

하지만 극적인 삶이 집약된 시기라는 것만으로 모두 설명되진 않는다. 그리움과 울분과 회한이 응축돼 있는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다.

21세기의 첫 10년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평화와 화해협력의 기운으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전쟁의 불길한 기운 속에서 마감하고 있다. 소중한 것은 잃고 나면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다. 지난 3월26일 천안함 침몰 사고와 11월23일 연평도 피격 사건 이후 트위터와 페이스북에는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글이 쏟아졌다. 전쟁의 공포가 일상이 돼버린 탓에 평화의 길을 열고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한 두 전직 대통령의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상승한 것으로 보인다.

» 21세기 첫 10년의 중요한 인물

» 21세기 첫 10년의 중요한 인물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린 듯한 퇴행의 시대는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다수 의석의 힘인 ‘쪽수’와 ‘근육’이 대체했다. 토론과 합의는 비효율의 상징이 돼버렸고, 표현의 자유는 갇혔다. 인권은 땅에 떨어졌다.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태어난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 향상에 기여했다고 주는 상을 인권운동가와 언론이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 설문에 참여한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은 지난 10년을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도 많았지만 이명박 대통령 때문에 그때가 절실히 그립다”고 평했다. “민주화의 덫에 걸려 허덕이다 마침내 퇴행으로!”(정건화 한신대 교수·경제학), “민주정부-독재회귀, 비교체험 극과 극”(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21세기 희망의 역사가 쓰이다가 갈팡질팡 혼란으로 들어갔던 시기”(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희망으로 시작한 21세기, 그러나 20세기의 잔재에서 허덕였다”(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는 응답자들의 평가가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된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민주주의와 서민복지, 남북관계 면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는데 이명박 정부의 퇴행과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그 시절이 ‘참으로 소중했다’고 다시 인식하는 것 같다”며 “대통령 후보가 된 것, 대통령에 당선된 것, 퇴임 이후 고향 봉하마을로 귀향해 농부의 삶을 산 것, 그리고 충격적으로 그런 방법으로 서거하신 것 등 그 모두가 정치사에서 큰 전환점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치켜세웠던 그는, 1970년대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듯 노 전 대통령의 서거도 앞으로 오랫동안 정치문화와 사회의식의 변화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보개혁 세력에 밑불 던져줘

그의 황망한 죽음으로 정치문화와 사회의식이 바뀌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의 잇단 이른 죽음은 2010년 6월 지방권력 교체의 동인으로 작용했다. 2012년 권력 재편기를 앞두고 지리멸렬하던 진보개혁 세력에 밑불을 던져주었다.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9·11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빈라덴이나 결국 관련성이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이를 빌미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부시에 비해, 혹은 지구 전체를 들썩거리게 만든 위키리크스나 앞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예측하기 힘든 정보기술(IT) 혁명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질지 몰라도, 응답자들이 국내적 관점을 우선해 노 전 대통령을 앞세운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설문 대상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국내외를 통틀어 지난 2001~2010년 가장 중요한 인물을 한 명만 꼽는다면?’이었다.


지난 10년, 당신을 웃게 한 사람은?

웃기기라도 한 각하


‘지난 10년 동안 당신을 웃게 한 사람을 한 명만 꼽는다면?’이라는 질문에 응답은 흩어졌다. ‘가장 중요한 인물’ 부문에서 하위권에 있던 이명박 대통령이 ‘웃게 한 사람’ 1위를 차지했다. 박지성 선수(11명), 줄리언 어산지(11명), 김연아 선수(8명) 등이 뒤를 이었다. 웃음의 종류가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 대통령과 박지성 선수가 만든 웃음은 격이 다를 테니까.
» 이명박 대통령은 ‘21세기 첫 10년 가장 중요한 인물’ 분야에서는 하위권이었지만 웃게 한 사람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다(왼쪽). ‘보온병’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단박에 5위에 올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이명박 대통령은 ‘21세기 첫 10년 가장 중요한 인물’ 분야에서는 하위권이었지만 웃게 한 사람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다(왼쪽). ‘보온병’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단박에 5위에 올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 대통령을 꼽은 몇몇 응답자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김종철 전 진보신당 대변인은 “그가 만든 웃음은 어이없음, 기가 막힘에서 나오는 헛웃음에 가깝다”고 말했다. “내가 ○○를 해봐서 아는데~” 식의 ‘MB 어록’을 보면 이 대통령이 만들어내는 웃음은 그가 시대의 변화를 좇아가지 못해서 가능하다는 게 김 전 대변인의 분석이다. 대중음악평론가인 김학선씨도 “대통령 후보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줄곧 웃긴다”고 했다. 흐뭇하고 즐거운 웃음과는 거리가 멀다.

이 대통령의 웃음과 비슷한 유형이 ‘보온병’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와 ‘줄기세포 대국민 사기극’으로 판명된 황우석 교수다. 둘 다 예시에 없었음에도 안 대표는 단 한 번의 엉뚱한 언행으로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지난 10년 동안 당신을 웃게 한 사람’ 5위(8명)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황 교수를 꼽으면서 “어처구니없는 사기극에 전세계가 속아넘어간 걸 보면 세계는 견고하지만 허술하다. 슬프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 21세기 첫 10년, 나를 웃게 한 사람

» 21세기 첫 10년, 나를 웃게 한 사람



웃음의 사전적 의미에 집중한 응답자들은 김병만·박지선·안상태씨 등 한국방송 출연진과 문화방송 시트콤 , 제작진을 꼽았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긴 토르비에른 야글란을,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G20 포스터를 쥐 그림으로 바꿔 기소된 박정수씨를 꼽았다.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은 ‘가장 중요한 인물’에 ‘촛불시민’이라고 답했는데, 지난 10년 동안 그를 웃게 한 사람도 촛불시민이었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