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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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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다고도, 죄송하다고도 말하지 말라

한국과 모양새 같지만 내용은 다른 미국의 청문회…

233개 항목의 1차 검증, 철저한 서면 검증 거쳐 평균 석 달 만에 인준
등록 2010-09-07 07:33 수정 2020-05-02 19:26
지난 6월28일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에 지명된 엘리나 케이건 후보자가 미국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공화당 의원들로부터 ‘좌편향’이라는 공격을 받았지만 청문회 과정에서 탈세,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논문 표절 등이 논란이 되진 않았다. 사진 REUTERS/Win McNamee/Pool

지난 6월28일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에 지명된 엘리나 케이건 후보자가 미국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공화당 의원들로부터 ‘좌편향’이라는 공격을 받았지만 청문회 과정에서 탈세,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논문 표절 등이 논란이 되진 않았다. 사진 REUTERS/Win McNamee/Pool

지난 6월28일, 미국 상원 법사위원회는 미 역사상 네 번째 여성 대법관에 지명된 엘리나 케이건(50) 후보자에 대한 인준 절차를 시작했다. 이날 청문회에서 공화당 의원들은 케이건 후보자가 법관을 지낸 경험이 전혀 없는데다 이념적 성향도 ‘좌편향’이라며 날을 세웠다. 특히 케이건이 하버드대학 로스쿨 학장 시절 미군의 동성애자 복무 제한 정책인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에 반대해 모병관들의 하버드대학 출입을 금지한 것은 위법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청문회에서 탈세, 부동산 투기, 위장취업, 위장전입, 논문 표절 등이 논란이 되진 않았다.

지난 7월20일, 미 상원 정보위원회는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 지명자에 대한 인준 청문회를 벌였다. 청문회에서 논란이 된 건 업무 중복과 비대화, 용역회사 남발 등 미 정보기관의 문제점이 주였다. 또 클래퍼가 국방 분야에 집중했다는 점도 공화당의 공격 대상이었다. 그러나 역시 위장취업, 위장전입 등이 논란이 되진 않았다.

떳떳하지 않으면 감히 청문회 나서지 못해

미 상원 상임위에서는 인사청문회가 늘 열린다. 의원 20여 명이 타원형으로 이어진 의자에 앉아 있고, 그 가운데 후보자가 자리를 잡으면 의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지는 것은 우리와 거의 비슷하다. 상임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후보자가 선서 뒤 방청석에 온 가족을 일일이 소개하고, 가족은 후보자를 격려하는 것이 오랜 관행이다. 가족이 있다고 해서 의원들이 후보자를 봐주진 않지만, 그래도 가족 앞에서 “나는 몰랐다. 아내가 한 일이다” “장모님이 세금을 안 냈다면 잘못이다” “딸을 위장전입시켰다” 등의 응답이 나오진 않는다.

지난 2000년 도입된 한국의 인사청문회는 미국의 제도를 본뜬 것이다. 그러나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실상은 비슷한 점이 거의 없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대통령의 인사권 남용을 막기 위해 행정부의 장·차관, 대법관, 연방법원 판사, 군 고위직 등을 의회 인사청문 대상으로 삼아 의회 인준 없이는 임명하지 못하도록 했다. 한국의 인사청문 대상 직위는 장관급 등 모두 57개에 불과하지만, 미국은 장·차관, 차관보, 중앙정보국(CIA) 국장, 연방수사국(FBI) 국장, 각국 대사 등 행정부 안에서만 1141개에 이른다.

가장 큰 차이는 검증 절차다. 미 상원이 인준을 거부하는 경우는 2% 미만으로 매우 드물다. 특히 20세기 들어 장관 후보자 인준을 거부한 경우는 1925년, 1959년, 1989년 세 차례에 불과하다. 대통령의 선택을 의회가 존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후보자에 대한 문제점이 드러나면, 상원 인준 절차 이전에 후보자가 스스로 사퇴하거나 대통령이 지명을 철회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떳떳하지 않다면, 감히 청문회에 나설 생각을 않는다.

각 부처 장관 후보들이 상원 인준을 받는 데는 최소 두 달 이상 걸리며, 1년이 넘을 때도 있다. 이때 행정 공백을 우려하는 이는 아무도 없고, 행정 공백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의혹 있는 후보로 행정 공백을 메우는 것을 택하진 않는 것이다.

우선 후보가 되기 전에 백악관 인사국, FBI, 국세청, 공직자윤리위원회 등이 재산, 납세, 교통법규 위반, 전과 등 매뉴얼화된 233개 항목별로 조사한다. 상원 인준 절차의 특징은 시간적 제약이 없다는 점이다. 문제가 드러나면 철저한 조사와 청문회를 무기한 전개할 수 있다. 50달러 이상 교통범칙금, 1만달러 이상 대출 및 부채, 친구·친척 등으로부터 생일이나 기념일에 받은 50달러 이상 선물 내역, 10년간 소득원, 모든 출판물·논문·칼럼, 모든 증언·연설문, 10년간 보유했던 모든 멤버십, 거래 중인 금융회사·모기지대출·보험, 한 달 이상 고용했던 가정부·유모·운전기사·정원사의 법적 지위 정당성 여부 등을 따지기도 한다.

청문회장에서는 정책 질의에 집중

1차 관문을 통과하면, 대통령은 여야 지도자와 만나 사전 협의를 하고, 대략적인 합의가 이뤄지면 공식 후보로 지명하고, 상원에 인준동의안을 제출한다. 그다음에는 의회의 서면질의서가 기다리고 있다. 후보자는 상세한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 답변이 부실하면, 위원회가 자체 조사를 벌인다. “2006년 일은 기억이 안 난다”거나, “나중에 서면으로 제출하겠다” 등을 청문회장에서 말할 필요가 사라진다. 시한은 없다. 의원들이 납득할 때까지 답변해야 한다. 조사도 이뤄진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 대부이자 행정부의 의료보험 개혁을 지휘할 보건장관 내정자인 톰 대슐 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이 과정에서 과거 3년간 체납된 세금 10만달러를 뒤늦게 낸 사실이 드러나 청문회 전에 스스로 사퇴했다. 지명되고 나서 뒤늦게 미납분 의료보험료 등을 내고 청문회장에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결되진 않는다.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이 사람이 내게는 꼭 필요하지만 그대로 임명할 경우 미국이 ‘있는 사람의 법’과 ‘없는 사람의 법’이 적용되는 두 개의 미국으로 나뉠 수 있기 때문에 지명을 철회한다”고 했다. 이른바 ‘공정사회’를 위한 ‘실천’이다.

이렇게 2차 관문을 통과한 사람만 청문회장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그래서 지명된 뒤, 2~3달 뒤에 청문회가 열리는 게 미국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야인 시절 자신이 세운 싱크탱크인 신미국안보센터 운영 과정에서 기업체로부터 받은 후원금이 문제가 돼, 지명 5개월 뒤에야 청문회장에 설 수 있었다.

이렇게 도덕성 문제는 거의 다 걸러지고 나니, 미 청문회장은 정책 질의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경우, 청문회장에서 도덕성 문제와 관련된 질의는 전혀 없었다. 대부분 향후 미국의 외교정책을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이냐를 세세히 캐물어 마치 외교정책 세미나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연출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사전 정제 작업이 다 끝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 의원들이 청문회장에서 도덕성 관련 추궁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뒤늦게 문제점이 발견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지난 1989년 글렌 로리 교육부 장관 내정자는 청문회 과정에서 20년 전 대학교 때 받은 등록금 대출을 갚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과한 뒤 곧바로 사퇴했다. 이런 과정을 다 거치다 보니, 미국 인사청문회에는 행정부의 인준 준비에 28일, 상원 인준에 50일 등 평균 석 달 정도가 걸린다. 대법관의 경우는 지명에 앞서 백악관이 3~4배수의 후보자를 언론에 흘리고 이들을 순차적으로 백악관으로 불러 대통령이 개별 면담을 공개적으로 거치는 것이 관례다. 이는 언론을 통해 사전 여론 검증을 받도록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후보자의 거짓말은 처벌 대상

인사청문회에서의 위증 문제도 우리와는 차이가 있다. 미국의 경우 청문회에서 후보자, 증인 등의 위증은 모두 사법처리 대상이 된다. 이는 공식 석상의 거짓말은 행정부에 대한 일종의 공무집행방해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증인 또는 감정인이 허위 진술을 하면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지만, 후보자는 위증을 하더라도 처벌 규정이 없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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