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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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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반도체 ‘발암성 물질’ 6종 사용 확인

단독 입수한 엔지니어용 ‘환경수첩’에 명기돼
백혈병·림프종·유방암 관련성 깊은 TCE 등, 40여 종 ‘자극성 물질’도
등록 2010-05-18 01:44 수정 2020-05-02 19:26

‘백혈병 산재’ 논란을 빚고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트리클로로에틸렌(TCE) 등 발암성 물질 6종과 자극성 위험물질 40여 종이 사용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삼성이 직접 제작한 업무보조용 ‘환경수첩’을 통해서다. 삼성은 그동안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되는 물질에 대해 ‘기밀’이라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해왔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각 공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을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에 기록해 노동자들에게 공개하도록 하고 있으나, 삼성은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2008년 노동부의 시정명령을 받기도 했다.

깨끗한 반도체 공장? 지난 2007년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방진복을 입고 일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깨끗한 반도체 공장? 지난 2007년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방진복을 입고 일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회사 밖으로 반출 못하는 ‘기밀’수첩

이 입수한 ‘환경수첩’은 삼성이 반도체 기흥공장 공정관리 엔지니어들에게 지급한 손바닥 크기의 녹색 수첩으로, 삼성 쪽은 이를 ‘기밀’로 분류해 회사 밖 유출을 금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은 ‘환경수첩’에 기재된 4쪽 분량의 ‘공정별 환경영향 인자’ 목록에 나와있는 화학물질들의 유해성을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분석해봤다. 윤충식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최상준 대구가톨릭대 산업보건학과 교수, 박영만 산업전문의가 참여했다. 윤충식 교수와 최상준 교수는 지난해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사용하는 감광액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됐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은 ‘서울대 산학협력단 조사단’에 소속된 이들이다.

분석 결과, ‘공정별 환경영향 인자’ 목록에 공정별로 기재된 50여 개 화학물질과 가스 가운데 발암성 물질은 총 6가지였다. 트리클로로에틸렌, 시너, 감광액(PR), 디메틸아세트아미드, 아르신(AsH₃), 황산(H₂SO₄) 등이다.

우선 화학물질이나 가스를 사용해 웨이퍼(집적회로 제작에 쓰이는 얇고 둥근 실리콘판)에서 필요 없는 물질을 제거하는 ‘세정·식각’ 공정에서 발암물질인 트리클로로에틸렌이 쓰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트리클로로에틸렌은 백혈병, 비호지킨스림프종, 간암, 신장암, 뇌암, 유방암 등을 일으킬 수 있다. 최상준 교수는 “이 자료가 삼성반도체 엔지니어들의 수첩 내용이라면 매우 흥미롭다”며 “세정·식각 공정에 나타난 트리클로로에틸렌은 현재 삼성 쪽에서 사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물질”이라고 말했다.

역시 세정·식각 공정에서 쓰이는 디메틸아세트아미드도 발암성 물질로 불임·유산·호흡기 장애 등을 유발한다. 세정 작업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3라인에서 일하다 급성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황유미씨가 맡았던 일이기도 하다. 지난 5월13일 집단 산재 신청을 낸 나경순씨도 기흥공장 1라인 세정·식각 공정에서 5년간 일을 한 뒤 림프종이 발병했다. 이 작업은 이른바 ‘퐁당퐁당 공정’으로 불리며 화학물질이 담긴 수조에 웨이퍼를 담갔다 뺐다 하는 동작을 반복한다.

웨이퍼 내부에 미세한 가스 입자를 침투시키는 ‘이온 주입’ 공정에서는 발암성 물질인 아르신이 쓰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르신에 노출되면 빈혈·두통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아진다. 피부가 불긋불긋해지고 황달, 쇼크, 폐부종, 급성순환장애, 간염 등을 일으킨다.

삼성이 제작한 ‘환경수첩’을 분석한 결과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하는 발암물질 6가지가 확인됐다. 한겨레 보도영상팀

삼성이 제작한 ‘환경수첩’을 분석한 결과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하는 발암물질 6가지가 확인됐다. 한겨레 보도영상팀

“TCE는 삼성에서 사용 안 한다고 한 물질”

‘사진’ 공정에서 쓰이는 감광액에는 두 가지 발암물질이 들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크롬산염과 벤젠이다. 중크롬산염이 피부에 닿으면 알레르기성 반응이 나타나고, 천식이나 호흡 곤란을 유발한다. 벤젠은 백혈병 등을 유발하는 발암물질로 흡입하면 졸음이나 현기증을 일으킨다. 벤젠은 ‘시너’에도 포함된다. 시너는 세정·식각·사진 공정에서 모두 쓰인다. 감광액을 제거하는 데 쓰이는 황산은 폐와 후두에 암을 일으킬 확률이 매우 높은 물질이다.

5월13일 현재 삼성에서 일하다가 암이나 희귀질환에 걸렸다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에 알려온 이들은 총 47명이다. 주로 발생한 질병은 급성골수성백혈병, 만성백혈병, 뇌종양, 악성림프종, 직장암, 간암, 중증재생불량성빈혈, 난소암, 자궁암 등이다. 이번에 밝혀진 반도체 공장 내 6개 발암성 물질은 이러한 질병과 연관이 깊다. 공유정옥 산업전문의는 “가족 병력이 없고 건강하던 젊은이들이 암에 걸렸는데 그가 일하던 회사에서 이렇게 여러가지 발암물질을 사용하고 있는 게 확인됐다면 실제 노출된 양과 관계없이 업무상 질병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환경수첩’을 통해 40여 종의 ‘자극성 물질’도 확인됐다. ‘자극성 물질’로 분류된 물질 중 10여 개는 발암 여부가 아직 연구되지 않은 ‘미확인’ 물질이다. 박영만 산업전문의는 “황산 같은 경우 일반적으로 자극물질로 알려졌지만 장기간 노출시 암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며 “자극성 물질이라도 충분히 암 발생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상자기사 참조)

삼성 쪽은 ‘환경수첩’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유해한 화학물질이 노동자들에게 노출됐을 가능성은 부인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홍보 담당자는 “‘환경수첩’은 화학물질 취급 인증 교육 수료자에게 제공한 것”이라며 “반도체 생산현장에는 화학물질 유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안전장치가 2중, 3중으로 시설되어 있어, 작업자에 노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의 증언은 다르다.

지난 5월13일, 삼성반도체에서 일한 뒤 백혈병 등이 발병한 5명이 ‘삼성 직업병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었다. 이날 이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집단 산재 신청’을 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지난 5월13일, 삼성반도체에서 일한 뒤 백혈병 등이 발병한 5명이 ‘삼성 직업병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었다. 이날 이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집단 산재 신청’을 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1996년부터 최근까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일했던 엔지니어 김기영씨는 “생산량 경쟁을 시키기 때문에 작업 속도를 늦추는 불필요한 인터록을 해제하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며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안전에 치명적인 것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70~80건의 인터록을 해제해주었다”고 털어놨다. 또한 “기계 유지·관리·보수나 설치를 위해서는 안전과 직결되는 인터록을 해제하는데, 이 경우 엔지니어들이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재직 중에 희귀병인 베게너육아종 진단을 받았다.

엔지니어들 “누출사고, 인터록 해제 빈번”

누출사고와 관련된 증언도 쏟아진다. 1990년대부터 기흥공장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한 엔지니어는 “재직 때 유기용제와 가스 누출사고가 비일비재했다”며 “많을 때는 한 달에 두세 차례 사고가 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기영씨도 “화학물질이 누출되면 경보음이 울려야 하는데, 경보음이 울리지 않고 엔지니어들끼리만 문자메시지를 통해 알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며 “특히 1·2·3라인은 워낙 노후해 사고가 비일비재했다”고 증언했다. 박사급 직원으로 1983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설립 때부터 근무해온 주교철씨는 “공장 초창기에는 라인이 난리도 아니었다”며 “기술은 빈약하고 작업량은 많다 보니 잔류 가스도 충분히 뽑아내지 못한 채 일을 했다”고 말했다.

박영만 산업전문의는 “물질의 독성 연구와 이에 따른 노출 기준 설정은 대부분 장기간 정상적인 조건에서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며 “누출사고 등으로 단기간 고농도에 노출됐거나 교대근무로 생체리듬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발암물질을 흡수했다면 면역체계가 암의 공격에 대응을 못하게 되어 암 발생이 훨씬 더 촉진된다”고 설명했다.

누출 사고가 아니어도 일상적으로 화학물질에 노출됐다는 노동자들의 주장도 잇따르고 있다. 림프종이 발병한 나경순씨는 “작업장에서 비릿한 황산 냄새, 지린 암모니아·아세톤 냄새가 뒤섞여 역겨운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한 뒤 유방암에 걸린 신송희씨는 “역겨운 화학약품 냄새로 인해 자주 구역질이 났다”며 “나 말고도 구역질을 하는 동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반올림 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는 “1970년대 미국에서 반도체 공장의 위험성을 연구할 때도 ‘사방에서 소녀들이 구토를 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말했다.

박영만 산업전문의는 “근로자들이 수시로 자극 증상을 느꼈다는 것은 작업장에서 유해물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의미”라며 “단순한 자극물질이 관리되지 않았다면 발암성 물질도 관리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각종 발암성 물질과 자극성 물질이 가득한 반도체 공장. 그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걸까. 삼성의 주장과 노동자 증언 사이의 간극은 ‘진실’만이 채울 수 있다. 최상준 교수는 “반도체 공정 작업자들의 조혈계통 암 발생 위험 인자에 대해 더 심도 있는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사용되는 자극성 물질들
불임·유산 등 유발 물질 다수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쓰이는 자극성 물질 가운데는 우선 생리불순, 불임, 유산 등 생식계 이상을 유발할 수 있는 물질이 눈에 띈다. ‘사진’ 공정에서 쓰이는 현상액의 주성분인 하이드로퀴논과 아세톤((CH₃)₂CO), ‘세정·식각’ 공정의 염화메틸(CH₃Cl)·이소프로필알코올(C₃H8O), ‘UTIUTY’ 공정의 과산화수소(H₂O₂)·영화나트륨(NaCl)·메탄올(CH₃OH) 등이다. 지난 3월31일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숨진 박지연씨는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생리가 끊겼다. 2년9개월 만에 하얀 방진복 바지에 시뻘겋게 하혈을 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11년간 일했던 정애정씨는 “주변에 생리불순·유산·불임을 겪는 경우를 수없이 목격했다”고 말했다.
두통, 현기증, 구역질, 호흡기 자극 등을 일으키는 물질도 많았다. 표면밀착제(HMDS), 디클로로살렌(SiHiCl₂), 육불화텅스텐(WF6*), 이소프로필알코올, 포스핀(PH₃), 차아염소산나트륨(NaOCl) 등이다. 특히 포스핀에는 한 번만 노출돼도 신경계·소화관·호흡기에 이상이 일어날 수 있으며, 구토와 설사 증세가 나타난다. 세정·식각 공정에서 쓰이는 염화메틸은 현기증·불면·착란·구토를 일으키고 신장에 독성을 유발한다. 불화수소(HF)는 한 번만 노출돼도 기도나 폐가 손상될 수 있다. 폐부종, 기관지염, 췌장의 출혈·괴사, 갑상선 기능 이상이 보고되기도 했다.
피부를 자극하는 위험 물질도 있었다. ‘화학기상증착(CVD)’ 공정에 쓰이는 디클로로살렌에 노출되면 피부와 눈에 자극을 줘 통증을 느끼게 된다. 발암성은 아직 연구되지 않았다. 소듐바이설파이트(NaHSO₃)는 알레르기 반응과 호흡 곤란을 일으킨다.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던 중 중증재생불량성빈혈이 발병한 유명화씨는 “고온 테스트를 마친 뒤 기계 뚜껑이 열릴 때면 증기 속에 반도체 칩의 역겨운 냄새가 났고 칩을 만지고 얼굴을 만지면 피부 발진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허재현 기자 한겨레 보도영상팀 catalunia@hani.co.kr
김도성 피디 kds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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