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끝없는 오르막길의 원더랜드

드라마에 비친 경쟁사회의 자화상… 신세경은 영원히 불행하며 성공의 사다리에 출구는 없다
등록 2010-05-13 13:35 수정 2020-05-02 19:26
‘개천에서 용 나는’ 신화를 21세기판으로 재현한 드라마 〈공부의 신〉. 한겨레 자료

‘개천에서 용 나는’ 신화를 21세기판으로 재현한 드라마 〈공부의 신〉. 한겨레 자료

“아저씨 말대로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 사다리를 죽기 살기로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세경(신세경)과 지훈(최다니엘)의 죽음으로 끝난 문화방송 은 논란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그 장면이 없었더라도 은 많은 시청자에게 언짢았을지도 모른다. 작품 내내 월급 60만원을 받는 가사도우미 세경에게 더 가진 자들이 관용과 배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경은 주인집 아들인 지훈의 배려로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지훈의 가족은 세경의 동생 신애(서신애)를 위해 생일파티를 열었다.

경쟁만능주의

그러나, 은 엔딩에서 그건 꿈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이 시트콤이 깬 판타지는 단지 캐릭터를 죽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위안받으며 애써 외면한 문제를 가장 충격적인 방법으로 들이밀었다는 데 있다. ‘신분의 사다리’로 상징되는 경쟁사회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세경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의 괴로운 자각은 경쟁이 체화된 한국 드라마의 현재를 보여준다.

올해 방영한 한국방송 , 문화방송 등 많은 작품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경쟁사회의 단면을 그린다. 저소득층이나 결손가정 아이들이 ‘천하대 특별반’을 통해 명문대에 들어가고(), 한 개인이 신분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 경쟁시대의 신화들이다. 특히 에서 보여주는 이병훈 감독의 변화는 눈여겨볼 만하다. 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듯, 그의 작품은 치열한 직업정신을 가진 인물이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며 성공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는 직업윤리보다 성공과 경쟁이 두드러진다. 천민인 동이(한효주)는 미래에 숙종(지진희)의 후궁이 될 것이고, 그가 신분 상승을 하려면 살인과 음모가 횡행하는 권력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한국 드라마에서 경쟁은 이미 극적인 쾌감을 일으키는 수단이 됐다. 그래서 지금 한국 드라마가 경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에서 오성그룹 이신미(이보영)가 인수·합병에 반대하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3개월 이내로 열심히 한 성과가 보이면 자르지 않겠다”며 협박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와 처럼 특출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경쟁을 뚫고 최고가 되는 이야기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경쟁의 미덕’으로 불리는 성공 신화를 그대로 재현한다. 심지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의 가문인 경주 최씨를 소재로 한 한국방송 에서는 경쟁에서 이긴 부자의 ‘DNA’는 대대손손 ‘명가’를 이룬다.

이 드라마들은 경쟁의 미덕은 찬양하되, 경쟁이 승리자는 만들지라도 그 나머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점은 숨긴다. 와 은 가장 극단적인 경쟁의 판타지고, 그만큼 시청자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동의를 얻는 쪽은 좀더 미시적으로 경쟁의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다. 과 는 공부와 요리라는 전혀 다른 소재를 다뤘지만, 전개 과정은 상당히 유사하다. 두 작품의 무대가 되는 학교와 레스토랑은 복지부동하는 교사와 요리사로 문제를 겪고 있고,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강석호(김수로)와 최현욱(이선균)은 이를 외부와의 경쟁을 통해 해결한다. 강석호는 ‘천하대 특별반’을 만들어 뛰어난 교사들을 데려오고, 최현욱은 유학파 요리사들을 데려와 국내파와 경쟁시킨다.

외국인 셰프 후임으로 최현욱이 들어오고 유학파가 주방의 실권인 ‘파스타’ 메뉴를 장악하는 모습은 마치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이후 신자유주의 경쟁시대에 접어든 과정을 축약한 듯하다. 외국 경영자가 경쟁 논리의 토대를 마련하고, 다시 그들의 나라에서 배운 유학파 경영자들이 그것을 완전히 한국에 체화한다. 또한 자신을 ‘입시 트레이너’로 소개했던 의 강석호는 아이들과 공부를 하며 ‘선생님’으로 대접받는다. 경쟁이 조직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인간관계마저 개선한다. 이는 경쟁이 완전히 삶의 철학이 된 시대의 새로운 판타지다.

패배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방식

그러나 과 는 어느 순간부터 정반대 모습을 보여준다. 에서 명문대에 진학하는 건 천하대 특별반 아이들이다. 특별반 아이들과 대립하던 그 외의 문제아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천하대 특별반의 수업 내용이 다른 아이들에게 전달되거나, 특별반 교사들의 노하우가 일반 교사에게 퍼지지는 않는다. 에서 경쟁은 결코 뒤처진 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성적이 나쁜 아이들 중 ‘시범 케이스’를 골라 성적을 올려 학교의 명예를 높인다는 강석호의 논리는 소수의 ‘개천에서 난 용’을 부각시키는 경쟁시대의 논리와 완벽하게 똑같다.

반면 는 경쟁 논리를 받아들이되 경쟁의 단점을 보완한다. 최현욱은 공정한 경쟁을 시키는 동시에, 요리사들에게 최대한의 기회를 배려해준다. 최현욱이 서유경(공효진)에게 준 레시피 노트가 실패한 요리만 모아놓은 것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경쟁사회는 실패할 기회를 보장할 때 훨씬 더 건전해진다. 국내파 요리사들은 수많은 실패를 겪으며 한층 성장한다. 또한 해외파는 국내파에게 요리 노하우를 전수하며 조직의 전체적인 수준을 올린다. 무엇보다 “내 주방에 여자는 없어!”라고 외치던 최현욱은 말단 주방보조이던 여자 서유경과 사랑에 빠지며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경쟁은 선하지도 옳지도 않다. 그것은 끊임없이 패배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정된다.

출구없는 세상, 가 찾은 출구

도 경쟁사회의 딜레마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최현욱처럼 완벽에 가까운 실력과 리더십을 갖추고 자기반성까지 할 수 있는 리더가 아니라면, 이런 이상적인 경쟁 공동체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최현욱 역시 자신이 해고했던 여자 요리사들의 자리를 만들어낼 능력은 없다. 국내파가 요리 콘테스트에서 우승해 유학을 떠나지 않았다면, 여자 요리사들은 계속 고용 불안의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은 이 현실을 경쟁의 밑바닥에 있는 여성의 입을 통해 폭로했다. 살기 위해서는 경쟁해야 하지만, 경쟁의 사다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서 탈출구를 찾아야 할까. 정말 시간이라도 멈춰야 하나. 노비 업복(공형진)이 “노비가 양반이 되는 게 아니라 양반도 노비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게 더 좋지 않으냐”고 하던 한국방송 는 최근의 어떤 드라마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건 단지 장혁과 오지호의 ‘식스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