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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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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꼬챙이에 흥분하지 맙시다

등록 2005-05-11 15:00 수정 2020-05-02 19:24

다산 묘 훼손사건에 엉뚱한 “일제 쇠말뚝” 보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상징조작에 휘둘리는 주술사회인가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일본놈들이 또 이런 짓을!”
지난 4월30일치 주요 일간신문 사회면을 펼쳐든 사람들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지난 4월28일부터 시작된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7호) 단장 과정에서 일꾼 김아무개(72)씨 등 4명이 묘에 꽂혀 있는 쇠꼬챙이 10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쇠꼬챙이의 길이는 35cm, 지름은 2.5~3mm로 다산의 묘 봉분 정수리에 1개, 머리쪽에 5개, 다리쪽에 4개가 박혀 있었다.

언론들은 김씨와 남양주시 관계자의 입을 빌려 “일제가 옛 성현들의 묘에 쇠말뚝을 박아 우리 민족의 혈을 끊으려 했다”며 이 사건을 보도했다. 등 일부 언론은 용접봉처럼 생긴 쇠꼬챙이를 ‘쇠파이프’라고 ‘오버’하기도 했고, <문화일보>는 나주 정씨 종친회 관계자를 등장시켜 “일본인이 다산 정약용 선생 묘역에 쇠파이프를 박은 적이 있다고 조부가 말한 적이 있다”며 이번 일이 일제의 소행이 분명한 듯 못박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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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종친회는 오히려 차분한데…

우선, 가장 흥분하고 있어야 할 나주 정씨 월헌공파 종친회는 차분한 입장이다. 정해민 종친회 부회장은 “일제가 저지른 일이 아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쇠꼬챙이가 요즘도 흔히 사용되는 용접봉과 똑같이 생긴데다, 흔히 일제 쇠말뚝이라고 알려진 북한산 백운대 쇠말뚝 22개(두께 4~5cm, 길이 1m)와 크기와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겨레21>이 지난 5월2일 현장을 답사해본 결과 쇠꼬챙이가 꽂혀 있었던 구멍은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1시간 넘게 무덤 주위를 둘러봤지만 꼬챙이가 있었다는 구멍 10개를 다 찾는 데 실패했다. 정 부회장은 “다산의 묘 단장은 40년 전쯤에도 이뤄졌는데, 그때는 이런 물건이 없었다”며 “다산의 정기를 탐낸 무속인들이 저지른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어찌 됐든 할아버지 묘에 나쁜 물건이 사라졌으니까 다행이죠. 특별히 조사할 만한 가치를 못 느끼고 있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바라본 두물머리 파란 물빛이 봄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고 있었다.
양종승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다산 같은 성인의 묘에는 맑은 기가 흐른다고 믿는 무당들이 기를 자기에게 오도록 저지른 일 같다”고 말했다. 무속에서는 조상의 불안정한 혼을 안정시키고 조상의 유골이 묻혀 있는 묘소의 터신을 누르기 위해 묘에 칼을 꽂는 풍수 관행을 ‘뱅이한다’ ‘산치성’ 또는 ‘산바라기’라고 부른다. 무속 전문가들은 “무속인들이 잘 모르는 사람의 무덤에 이런 일을 저지르는 일은 별로 없다”며 “아무래도 다산의 후손과 관계 있는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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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인들이 유명한 인물의 무덤에 쇠꼬챙이나 칼 등을 꽂아 복을 비는 묘지 훼손 사건은 2~3년마다 한두번씩 터지는 무속계에서는 흔한 사건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99년 4월 충무공 이순신의 묘를 훼손한 ‘양순자 사건’이다. 충무공 탄신일인 4월28일을 앞두고 묘를 둘러보던 종중 관계자는 충무공과 일가의 무덤에 휘발유가 묻은 식칼과 쇠막대기가 꽂혀 있는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곧 경찰 수사가 시작됐고 무속인 양순자(사건 당시 48)씨가 용의자로 경찰에 잡혔다. 그는 경찰에서 “충무공이 꿈에 나타난 뒤 머리가 아파 그 자손들의 기를 끊기 위해 일을 저질렀다”며 “이렇게 하면 떨어져 살고 있는 자녀와 다시 결합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복을 비는 마음이 간절했는지 충무공과 가족의 묘에 휘발유가 묻은 식칼 56개와 쇠막대기 66개를 꽂는 데 그치지 않고, 가야 김수로왕릉, 조선 태조·세종·효종·숙종·정조·대원군 등 조선왕릉, 이퇴계·이율곡 등 민족 성인의 묘에도 똑같은 일을 저질러 수사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이 밖에 △1999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선친 묘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 등 유명한 사람들의 묘에 꼬챙이 같은 쇠붙이를 박아 훼손하는 일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이순신 묘 훼손 사건이 있었던 1999년에는 “배경에 일제가 있었을 것”이란 추측 보도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과의 싸움에서 23전 23승을 거둔 당대 제일의 명장으로, 일제가 우리 국토의 명당과 성현의 묘에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를 없애려 한다는 이른바 ‘일제 단맥설’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정다산에 견줘 훨씬 높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독도와 교과서 파문 등으로 한-일 관계가 크게 경색된 게 확실한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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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단맥설, 충분한 문헌자료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일제 단맥설’과 같이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힘든 (그래서 더 호소력이 강한) 상징 조작이다.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1999년 펴낸 <역사풍속기행>에서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산수의 기를 꺾어 인물 배출을 막으려고 산마루 등 요지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말이 있지만, (중략) 이는 그들이 지도 작성 과정에서 산마루에 쇠말뚝을 박아 표지를 삼았던 것”이라고 썼다. 이씨의 글이 발표된 뒤 풍수학자 등이 수많은 반론을 제시하며 격론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일제 단맥설’을 확증할 만한 충분한 문헌자료가 없다는 데에는 역사학자나 풍수학자 모두 동의하고 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학 교수는 노자키 미쓰히코 오사카시립대학 교수가 1994년 펴낸 <한국의 풍수사들>에서 “총독부가 대규모 단맥을 계획했다면, 명목은 접어두고라도 반드시 예산을 세운 뒤에 계획적으로 실행했을 텐데 그런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일제 단맥설’은 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위한 상징 조작에 쉽게 동원되기도 한다. 10년 전인 1995년, 우리 사회는 ‘광복 50주년’ 8·15를 맞아 경복궁 앞에 있던 옛 총독부 건물 철거를 시작하는 것으로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에 뛰어들었다. 이 사업의 하이라이트는 국토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가장 거대한 쇠말뚝인 조선총독부를 제거하는 총독부 해체 작업이었다. 공보처가 김영삼 정부 국정 5년을 기념해 펴낸 자료집 <변화와 개혁> 1권은 “전국 시·군·구에서 모두 118개의 쇠말뚝을 뽑았다”고 자랑스레 적고 있다. 당시 언론은 “건물 지하에 총독부가 땅을 다지려고 박아둔 말뚝 9399개는 어떻게 할 것인가”(<중앙일보> 5월7일치)를 두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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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시선은 싸늘한 편이다. 김성례 서강대(종교학) 교수는 “통치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총독부 건물을 허문 김영삼 정권과 ‘기복’을 위해 이순신의 묘에 칼을 꽂은 양순자씨의 행동이 주술적 관점에서 보면 똑같은 논리 구조를 가진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0년 <한국종교연구>에 발표한 논문 ‘풍수와 식민주의 기억의 에로틱 주술’에서 “외면적으로 탈근대 사회를 살고 있는 한국 사회는 아직도 일제 식민주의의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원시적 모방 주술의 영향력에 휘둘리고 있다”고 말했다.
모두 합리적인 상식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대한민국 모두가 양순자는 아닐까? 이름 모를 무속인은 다산의 묘에 와서 ‘기복’을 위해 쇠꼬챙이를 꽂고, 이를 발견한 일꾼들과 공무원은 “일제가 민족정기를 죽이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언론이 확인하지 않고 이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우리 안의 양순자는 점점 확대재생산되며 더 큰 힘을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던 집단 기억인 ‘일제 36년’이다.

원시적 모방 주술에 휘둘리는 한국사회

상처받은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수단까지 동원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만행에 치를 떨었던 민중들은 자연스럽게 “이여송이 우리나라 풍수의 맥을 찾아 끊었다”고 믿고 이를 기록에 남겼다(물론 그가 실제로 쇠말뚝을 박았을 수도 있다). 다산의 묘에서 쇠꼬챙이를 찾아낸 일꾼들이 맨 처음 생각해낸 물건이 왜 ‘일제 쇠말뚝’이었을까? 해방 이후 60년 동안 아등바등 산업화를 이루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믿기 힘든 괴력을 발휘하며 월드컵 4강에도 올랐지만, 우리 자의식 속에 일본은 여전히 ‘무섭고 먼 나라’인가 보다.



북한산을 삼각산으로!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 가운데 ‘쇠말뚝 뽑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유지명 찾기 사업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다. 일제는 1914년 전국의 면을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곳곳의 지명을 제멋대로 바꾼 이른바 ‘창지개명’을 저질렀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2월부터 석달 동안 “우리 고장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주민 제보 129건을 심사해 70건을 제 이름으로 돌려놨다. 대표적인 것으로 서울의 서쪽을 지키는 인왕산의 ‘왕’의 한자 표기를 일왕을 뜻하는 ‘旺’에서 王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이는 <아사히신문> 1995년 3월1일치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은 곳에서 제 이름을 살려 쓰지 못하고 있다. 녹색연합이 지난 12월부터 올 2월까지 백두대간이 지나는 32개 시·군의 자연지명과 행정지명을 조사한 결과 22곳의 지명이 잘못 쓰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은 왜곡은 인왕산의 경우처럼 왕(王)자를 일본 왕을 뜻하는 황(皇)이나 왕(旺)으로 바꾼 경우다. 속리산 천황봉(天皇峰)과 강원도 정선의 가리왕산(加里旺山), 설악산 토왕성(土旺城), 경북 문경 왕릉리(旺陵里) 등이 대표적인 예다. 거북이 모양 바위가 있어 마을 이름에 거북이 구(龜)자가 들어간 강원도 양구군 구암리(龜岩里)와 경남 함양군 구평(龜坪) 마을도 쓰기 쉽게 구암리(九岩里)와 구평(九坪) 마을로 바뀌었다. 동두천(東豆川)의 두도 애초 콩두(豆)가 아닌 머리두(頭)였다고 한다.
우리 일상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백운봉·인수봉·노적봉 등 세 봉우리를 아우르는 북한산이다. 북한산의 옛 이름은 삼각산이었지만, 일제 때 한강 남쪽에 남한산이 있다는 이유로 북한산으로 고쳐졌다. 서울 강북구는 ‘북한산’이 일제시대 ‘창지개명’된 명칭인 만큼 옛 이름인 ‘삼각산’으로 불러야 한다며 5월 ‘삼각산 명칭변경 시민서명운동’ 등을 통해 연내에 재심의를 요청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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