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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가 “교수 될 희망 없다”

등록 2003-06-12 15:00 수정 2020-05-02 19:23

서울대 인문대 출강 51명 설문조사… 60% 이상이 가욋일로 생계비 충당

안톤 체호프의 소설 에 등장하는 라틴어 교사 ‘베리코프’. 지난 5월31일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인 백아무개씨는 자신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불안감에 빠진, 이 베리코프에 비유한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시간강사의 처우 문제는 사회적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학교 안은 쉬쉬하는 분위기다. 그 흔한 분향소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 한 노어노문학과 강사는 “우리 학과가 다른 곳에 비해 시간강사의 상황이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다”라며 “인문대를 비롯한 전반적인 강사 처우의 문제로 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방학기간은 ‘보릿고개’

서울대 시간강사들의 현재 생활과 의식상태는 어떨까. 서울대 종합시사월간지 은 백씨 자살사건 이후인 6월3일부터 7일까지 인문대 출강 강사 5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에 따르면 인문대 시간강사가 서울대 출강으로 받는 강사료는 60만원 이하(56.8%)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타 대학을 포함해 한달에 받는 전체 강사료를 조사한 결과 61만~100만원이 41.2%로 가장 높은 데 이어 60만원 이하와 101만~150만원이 각각 25% 선에 이르렀다. 100만원 이상의 강의료를 벌고 있는 시간강사는 전체의 3분의 1 안팎으로 조사됐다. 100만원 이상의 강사료를 받는 강사의 경우 학점당 3만원 안팎의 강의료에 비춰보면 한 학기에 6~7개 과목의 강의를 강행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수입으로 생계유지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모자란다’(49.0%)와 ‘약간 모자란다’(27.5%)고 대답해 전체의 76.5%가 부족함을 호소했다. ‘넉넉하다’(1.9%)거나 ‘그럭저럭 괜찮다’(9.8%)는 대답은 불과 10% 수준으로 나타나 강사료 수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대는 시간강사라도 의료보험 혜택이 있고, 2003년도 현재 시간당 3만9천원의 강사료를 지급하고 있어서 대체로 이보다 강사료가 떨어지는 사립대에 비해 사정이 나은 편이다(각 학교별 강사료는 www.kangno.com/board/kangsapay/ 참조). 그러나 강사료가 강의를 맡고 있는 학기중에만 나오기 때문에 계절 학기 수업을 맡지 못하면 방학 동안의 생계가 막막해져 방학기간을 ‘보릿고개’로 비유하기도 한다.

한편 강사료가 수입의 전부라고 밝힌 강사가 33.3%에 달하고 전공 관련 부업을 하는 강사의 비율이 60%를 넘는 등 시간강사들이 빠듯한 강의료만으로 생활 유지가 어려워 절반 이상이 가욋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문대 강사들이 주로 하는 부업으로는 번역(35.5%), 프로젝트(32.3%), 연구 보조아르바이트(16.1%), 과외(9.7%)의 순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이마저도 학과별로 부업의 기회가 큰 차이를 보였는데 중문과, 영문과 등은 상대적으로 기회가 많은 반면 서반아어, 노어노문학과 등의 경우 부업의 기회조차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같은 박봉에도 인문대 박사 수료자 또는 학위자들이 시간강사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사들은 ‘전공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이 강사 외에 없기 때문’(54.9%)이라고 대답한다. 인문학의 경우 학업을 계속하려 해도 교수 외에는 진출할 길이 막막하다는 것이다. 또 ‘교수가 되기 위해 시간강사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29.4%)이라는 대답도 상당히 나왔다. ‘가르치는 일이 좋아서’ 강사일을 한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11.8%에 불과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양질 강의” 평가

교수가 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부분의 시간강사들은 ‘적은 편’(49%)이라거나 ‘거의 없다’(21.7%)는 반응을 보였다. ‘그저 그렇다’(21.6%)거나 ‘그런 대로 많다’(5.8%)는 응답비율은 무척 낮았다.

시간강사들은 열악한 처우와 관련해 ‘사회 인식 부족’(39.1%)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대학재단의 부실’(21.8%)과 ‘불안전한 계약구조’(18.7%)도 주요한 원인으로 꼽혔다.

한 인문대 강사는 “기본적으로 학교가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고 있고 더욱이 시간강사는 그런 차원에서 가장 만만한 대상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특히 겸임교수 2명당 전임교수 1명으로 쳐서 대학 교원을 계산하는 방법이 전임을 뽑지 않고 강사들을 계속 시간강사로 고용하는 데 악용되고 있다는 게 강사들의 지적이다. 불합리한 계약구조는 특히 강사들의 고용안정에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강사들은 토로한다. “강의를 주고 안 주고는 학교 마음이다. 시간강사는 말도 하지 못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뭐라고 말해도 나만 손해니까 말도 못한다.” 또 다른 인문대 강사는 불합리한 계약구조는 시간강사들에게 심리적 불안감으로 작용한다고 털어놨다. 당장 이번 학기는 연구비다 뭐다 해서 150만원 정도 벌 수 있을지 몰라도 다음 학기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같은 불안감 때문에 30%에 가까운 시간강사가 가장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문제로 고용안정을 꼽는다. 구체적으로 정규직 전환, 연간 계약, 교원 인정 등이 그 내용이다.

강사료 현실화 역시 시급한 문제다. 서울대의 경우 강의료가 시간당 3만5천원이지만, 1시간 강의를 충실하게 하려면 보통 하루를 꼬박 준비해야 한다는 게 강사들의 전언이다. 그러나 전체 수입총액을 맞추려면 무리하게 강의시간을 늘려야 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수업의 질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매학기 주제를 바꿔 새로운 강의를 하기보다 한번 만든 강의안을 조금씩 바꿔가며 진행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강사도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한 강사의 고백은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그러나 시간강사들은 전임교수와 비교해볼 때 악조건 속에서도 양질의 강의를 제공한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한나라당 박창달 의원(비례대표)이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서 “2002학년도 1학기 강의평가에서 강사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는 50점 만점에 평균 40.21점으로 전임교원들의 평균인 38.95점보다 높았다”고 발표한 바 있다.

교수에 대한 원망 폭발

백씨 자살사건 이후 많은 강사들은 성적제출 거부 등의 실력 행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수에 대한 원망도 폭발하고 있다. “교수들도 강사 시절을 겪었으면서 정작 교수가 된 뒤에는 강사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체행동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아직 적어 보인다.

백씨 사건 이후 비로소 교수노조, 민교협 등 교수 단체와 강사 노조가 공동 대응을 모색하기로 했다. 시간강사 문제를 단순히 강의료 몇푼 올려주고 끌낼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연구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마련해 궁극적으로 학문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육의 한 주체인 학생들도 시간강사 문제에 관심을 가져 좀더 나은 수업을 받을 권리를 극대화하려는 행동이 필요하다.

〈서울대저널〉취재팀 www.snuj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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