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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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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구, 동북아 평화운동의 대부

등록 2003-02-20 15:00 수정 2020-05-02 19:23

고인의 열정 기리는 ‘동북아개발은행과 동북아판 마셜플랜’심포지엄

“동북아평화센터는 고 제정구 의원 등이 만든 연구활동 기구입니다. 제정구 의원의 빈민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에 대한 원대한 비전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김영호 동북아평화센터 이사장(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고 제정구 의원 4주기를 기념한 ‘동북아개발은행과 동북아판 마셜플랜’ 국제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밝혔다. 북한 핵개발 문제란 먹장구름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먹장구름이 천둥과 번개를 치며 비를 쏟기 전에 희망의 새 길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2월14일 심포지엄이 열린 서울 여의도 한국수출입은행 대강당에 모였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동북아중심국과 북한판 마셜플랜을 밝힌 탓인지 참석자들의 관심도 높았다.

마셜플랜보다는 안중근플랜?

이날 제 전 의원의 부인 신명자씨는 “고인의 철학은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였으며 그 철학의 기초는 세계 평화와 인류의 공존이었다. 생전에 고인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하며, 그 중심은 동북아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의사로부터 ‘앞으로 2달밖에 못 산다’는 폐암 선고를 받고도 동북아 평화가 중요하다며 관련 심포지엄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 속이 꽉 차 있었다”고 회상했다. 동북아평화센터는 그이 뜻을 기려 이사진에 제정구 전 의원의 이름을 넣어두고 있다. 불확실성과 국가주의, 전쟁 가능성이라는 고통스런 현실에 갇혀 있는 동북아에 상생과 공영을 제시하는 새로운 열정은 현실을 뛰어넘는 비전이어야 한다.

심포지엄에서 김영호 이사장은 기조 강연을 통해 “동북아개발은행 설립·운영은 이 지역의 평화공존과 경제 안전보장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나라 간 협력모델이다. 물론 동북아 평화를 위해 북한 개발이 중요하지만 가능한 한 동북아 전체의 틀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북아판 마셜플랜을 위해서는 시베리아 등의 석유나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으로 연결하는 에너지플랜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파이프라인을 깔 때는 당연히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함께 부설하여 정보통신 네트워크를 만들고, 동북아의 철도·해운·항공망을 연결하는 물류 네트워크, 환경문제에 대한 공동사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에너지-정보기술(IT) 인프라-물류 인프라-환경에 걸친 4대 마셜플랜이 시급하는 것이다.

안충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은 일본의 첨단기술과 자본, 한국의 생산기술과 개발경험, 중국의 풍부한 노동력과 잠재시장, 북한의 노동력, 러시아의 천연자원과 과학기술, 몽골의 천연자원 등의 상보성과 상호의존성에 주목했다. 안 원장은 동북아개발은행을 통한 북한의 사회간접자본 개발과 금융지원이 북한에게는 시장경제를 배우는 기회란 점도 지적했다. 참석자들은 동북아판 마셜플랜이 현실화되려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해결과 일본의 적극적 참여, 북한의 지속적 개방노력 등이 열쇠라고 지적했다.

김영호 이사장은 “동북아개발은행과 동북아판 마셜플랜은 20세기 초 안중근 의사가 주장한 동양평화론까지 소급될 수 있다. 안중근 의사도 동양평화론에서 개발은행 설립을 구상한 바 있다. 북한이 제2차 대전 뒤 피폐한 서유럽 부흥 계획을 짠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마셜이란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마셜플랜보다는 안중근플랜이라 부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구상이 한국의 민족주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공동 프로젝트란 성격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겉치레를 멀리했던 젊은 시절 회상

4년 전 숨진 고 제정구 전 의원의 이름 앞에는 항상 ‘빈민운동의 대부’, ‘빈민의 벗’이란 말이 붙곤 한다.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인 그는 20여년 동안 서울 청계천 판자촌 야학과 넝마주이, 엿장수와 단무지 행상 등으로 도시빈민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빈민운동을 하다 낙심할 때마다 주민들과 소주 한잔 걸치면서 꽹과리 장단에 새벽까지 춤을 추며 다시 뛸 힘을 얻었던 젊은 시절의 제정구. 그는 국회의원 시절 중고 프린스 승용차를 타고 국회를 다녔다. 국회 사무처 사람들은 “지금까지 국회 안에서 본 차 가운데 가장 낡은 차였다”고 회상할 정도로 그는 겉치레를 멀리했다. 92년 14대 총선 때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96년 15대 총선에서 재선됐다. 그는 55살이던 99년 2월9일 폐암으로 숨졌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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