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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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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추’는 스트레스 받는다

등록 2002-11-07 15:00 수정 2020-05-02 19:23

99%가 불필요한 포경수술로 고통… ‘우멍거지 이야기’가 말하는 그 오해와 진실

“고참이 군대서 해두면 편하고 공짜라며 권했다. 군의관 앞에서 바지를 벗고 보여주었더니 수술하자고 했다. 하지만 막상 수술대에 눕자 더럭 겁이 났다. 슥슥슥~ 생살을 자르는 가위소리가 귓전을 울리자 공포가 솟아올랐다.(회사원 김아무개씨·34)”

포경수술 세계 1위국의 오명

우리나라 남성들 가운데 60%는 일생에 한번씩 김씨와 같은 이유로 수술대에 오른다. 연령층이 낮을수록 이 비율은 더 늘어 10대의 경우 90%를 훌쩍 넘긴다. 포경수술 1위국. 왜 우리나라는 유독 포경수술을 많이 하는 것일까 한국 남성들의 성기는 꼭 칼을 대야 할 만큼 우생학적인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슈투데이 펴냄)의 공동 저자 방명걸(39·의학박사)씨와 김대식(37·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씨는 이 같은 현상은 포경수술을 부추기는 한국사회의 특이한 문화 때문이라고 본다. 이들은 6년째 포경수술에 대한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자 논문작업과 함께 인터넷(www.pop119.com)을 통한 홍보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이들은 최근 포경수술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알기 쉽게 설명한 를 발간해 화제를 뿌리고 있다.

“‘우멍거지’는 포경을 의미하는 순우리말로 ‘우멍거지는 자손 복이 적다’란 옛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바로 이 ‘우멍거지가 무엇인가’, 곧 포경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혼란이 빚어지고 있지요.”

방 박사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포경(phimosis)이란 의학적 개념은 성기가 발기했을 때 포피가 젖혀지지 않는 병리적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남성의 성기는 갓난아기 때는 ‘고추’라는 표현 그대로 포피와 귀두가 붙어 있다가, 자라면서 서서히 분리가 시작돼 20대에 이르면 발달이 완전히 끝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의사들은 단지 포피가 귀두를 덮고 있으면 수술이 필요한 ‘포경’으로 진단한다. 실제로 통계적으론 포경환자는 1% 미만에 불과한데도, 정상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이 ‘한국적 기준’에 따라 90%가량이 수술대로 내몰린다.

이들이 한국의 포경수술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지니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 미국에서 유학을 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방 박사가 공부한 의과대 연구실에는 프랑스·중국·일본·러시아·미국인 모두 5명의 동료가 있었었는데 유독 미국인만 포경수술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됐다. 나머지 나라에서 온 친구들은 ‘포경’이라는 용어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알고 보니 전 세계적으로 시술 비율은 20%에 불과했고, 그 중 종교적 이유에서 ‘할례’를 받는 유대교나 이슬람을 빼면 5%밖에 안 됐다. ‘시대적 대세’라고 생각하고, 92년 태어난 맏아들을 태어나자마자 수술시켰던 방 박사에겐 충격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한 친구로 지내온 물리학자 김 교수도 마침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포경수술이 유독 미국과 우리나라, 필리핀에서만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귀국 뒤 97년부터 함께 조사작업에 착수했다.

0~92살 한국 남성 5400명과 267명에 이르는 개업의들을 직접 인터뷰한 결과를 토대로 써낸 두편의 논문 ‘포경수술: 남한의 관점, 1999년’과 ‘비정상적으로 높은 남한의 포경수술 비율: 그 역사와 근본적 원인분석, 2002년’은 “남한이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에 현재와 같은 기형적인 포경수술 행태를 지니게 됐는지”를 심층적으로 파헤친 글이다. 두 사람은 이 작업을 위해 주말마다 설문지 뭉치를 들고 탑골공원을 찾아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해방 이후 잘못된 미국문화의 유입

그 결과 알게 된 사실은 △우리나라 포경수술은 최근 50년새 미국으로부터 들어왔으며 △응답자 대부분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수술이 보편화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수술은 주로 사춘기 때 이뤄져 일종의 통과의례적 성격을 띠고 있고 △수술을 결심하는 가장 큰 동기로는 ‘남들이 하니까’와 같은 사회적 압력이라는 점 등이었다. 포경수술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시술자인 개업의들도 마찬가지여서 △포경에 대한 정의와 수술의 세계적 추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의사는 267명 중 5명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에 포경수술이 성행하게 된 이유는 해방 이후 미국을 통해 서양문물을 접했기 때문이다. 청교도주의가 강했던 미국에선 1860년대 이후 청소년의 자위행위를 막을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포경수술이 성행했다. 2차대전 당시엔 남태평양의 열대 기후에 적응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멀쩡한 군인에게까지 수술을 시켰다. 이렇게 수술이 성행한 시기에 미국을 접한 우리나라는 이 관행을 그대로 따르게 됐다. 인터뷰 중 만난 한 할아버지는 미군부대 식당에서 일했는데, 수술을 안 하면 해고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관행이 날이 갈수록 더 굳어졌다는 점이다. 1980~90년대 이후엔 포경수술 시술빈도가 남아 출생 수를 앞지르고 있다. 겨울방학철이 되면 포경수술은 치아교정, 점, 여드름 등과 한데 묶여 ‘치료 적기’라는 식의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아예 의사들은 포경수술은 12살 전후에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하지만 한때 미국을 따라 수술이 유행한 영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는 의학적 이득이 없는 수술로 인정하는 추세다. 5%대로 수술비율이 크게 낮아진 영국만 봐도, 찰스 황태자는 수술을 받았지만 사회적 인식이 변함에 따라 아들 윌리엄 왕자는 수술을 받지 않았다. 스웨덴에서는 18살 전에 포경수술을 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미국에서조차 요즘엔 NOCIRC(National Organization of Circumcision Information Resource Centers) 등 무절제한 포경수술에 반대하는 민간기구의 활약에 힘입어 시술비율도 낮아지는 추세다.

“우리는 무조건 포경수술을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필요없는 수술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길 바란다는 것이죠. 부모들을 비롯해 사회가 정확한 지식을 갖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달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바람일 뿐입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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