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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도구화하는 언론

이태원 참사 뿐 아니라 성폭력·스토킹 피해자들도 ‘검증’ 핑계로 파헤치고 보호 대상으로 여기지 않아
등록 2022-12-02 06:14 수정 2022-12-07 06:37
2018년 3월 수많은 기자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검 앞에 모여 있다. 한겨레 자료

2018년 3월 수많은 기자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검 앞에 모여 있다. 한겨레 자료

‘유가족협의체가 구성되지 않아 이름만 공개하는 것이라도 유족들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깊이 양해를 구한다.’ <시민언론 민들레>와 <더탐사>가 이태원 참사 유족의 사전 동의 없이 희생자 명단 공개를 강행하면서 올린 글이다. ‘진정한 애도’를 내세웠으나 참사 이후 애도를 앞세워 망각을 시도하는 정부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언론이 피해자를 도구화하는 현실이 또 한 번 드러난 것이다.

공공재로 취급되는 피해자들

피해자를 무시하는 것은 한국 언론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다. 살인, 성폭력, 가정폭력, 교제폭력, 스토킹 등 여성 대상 강력범죄 피해자와 연대하는 입장에서 그 피해자를 연결해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을 받곤 한다. “왜 직접 찾지 않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기자들은 ‘피해자와 접촉하기 어렵다’며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오히려 상당수 피해자는 언론 접촉을 원한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피해자는 보호받을 수 없다는 불안과 취재 과정에서 겪는 추가 피해의 고통이 크다는 점 때문에 망설인다.

피해자는 왜 기자와의 접촉을 피할까? 그간 한국 언론이 여성 대상 강력범죄 피해자를 어떻게 다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안희정, 박원순, 조재범, 조덕제 등 성폭력 사건은 고소·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외부에 알려졌다. 피해자가 언론에 직접 알린 경우도 있고, 대리인(단)을 통해 알리기도 했으며, 가해자 쪽과 언론에 의해 강제로 알려진 사례도 있다. 안희정·조재범 성폭력 사건처럼 피해자가 사건 초기부터 직접 나서면 언론은 이후 피해자를 공공재로 취급한다. 사건에 대한 명명부터 피해자 이름을 앞세우거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사진을 같이 배치하고, 사건과 관계없는 피해자 자료(사진 등 각종 문서)를 여과 없이 노출했다. 스스로 밝혔으니 ‘공인’이며, 공인의 사생활은 그가 피해자여도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밝혀도 무방하다는 논리다.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사건은 피해자를 보호해왔을까? 조덕제 성폭력 사건은 2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뒤 조덕제와 연예매체 <디스패치>에 의해 사건 관련 영상과 함께 피해자 실명이 공개됐다. 박원순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해자 쪽 인사들이 연이어 피해자 실명을 비롯한 개인정보와 사진 등을 유출했고, 언론은 기사로 써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이어 서울행정법원에서도 박원순의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판단이 나왔음에도 판결 선고 전 사임한 원고 쪽 대리인이 뿌린, 재판 과정에서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또다시 피해자 검증에 앞장선 것이 언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자발적·적극적으로 언론에 접촉하기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엔(n)번방 같은 큰 건이 아닌데도?

숨진 피해자의 경우, 유족 등은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기를 원할 수도 있고 당사자를 보호하기 위해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마무리하기를 바랄 수도 있다. 공군 제20전투비행단 내 성폭력 사건에선 유족이 적극적으로 나서 피해자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했다. 유족은 피해자의 죽음이 시스템 변화를 이끄는 힘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유족은 군 내 성폭력 은폐를 폭로했고, 그 과정을 거쳐 피해자 이름으로 특별법이 제정돼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서 관련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 사건은 언론 등 외부의 관심과 연대를 강력히 요구하는 피해자 유족의 의사가 적극 반영됐고, 이후 군사법원법 개정 등 시스템의 일부 변화로도 이어졌다.

그러나 아직 다수의 유족은 더 안전하고 조용하게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기를 바란다. 인하대에서 발생한 김아무개의 교내 성폭력 살인사건이나 서울 신당역에서 일어난 전주환 스토킹 살인사건의 경우, 유족이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로 숨진 피해자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됨으로써 유족 등 피해자의 안전과 안정도 보장할 수 없다며 비공개재판을 요구했다. 살아 있는 피해자는 검증 등을 핑계로 파헤치고, 숨진 피해자는 숨졌기에 ‘보호 대상’에서 제외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언론을 누가 신뢰하겠는가.

디지털 성착취·성폭력 사건은 피해자의 사진·영상 유포(재유포 포함) 등 문제가 있기에 사건의 특정 과정에서 정말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많은 피해자가 누가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할까봐 예민함이 극에 달했는데, ‘확인’을 위한 여러 자료를 피해자 쪽에 요구하는 기자들도 만났다. 어떤 기자는 ‘엔(n)번방 같은 큰 건이 아닌데도’ 왜 이렇게 협조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피해자를 탓하기도 했다. 아동·청소년 피해자를 만날 때도 대리인 동석 등을 아예 고민하지 않고 직접 접촉하려는 기자들도 있었다. 수년간의 연대활동에서 취재와 관련해 기획 의도, 사전 질문지, 기사 관련 법적 분쟁이 발생할 때의 해결책, 보도 뒤 수정·삭제에 대한 협의 등을 ‘먼저’ 제시하고 피해자에게 접근하려는 기자를 찾기 어려웠다.

말하라 강요하거나 기록 책임 외면하거나

이런 과정을 거쳐 언론에 불신이 쌓인 피해자는 기사로 고통받고, 그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며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는다. 본인에게 확인조차 하지 않은 허위사실이 유포되고 사전 동의 없는 사진과 수사·재판 자료가 떠도는 걸 보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자료 삭제를 시도하다 포기하고 절망하기도 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형사법 체계에 있는 한국에서 기사에 등장한 피해자는 피의자나 피고인 신분으로 수사기관과 법원에 끌려나가기도 한다. 언론사에 수정·삭제 등을 요청해도 무시하고,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거나 민형사소송을 해도 피해 회복은 요원하다.

이번 ‘10·29 참사’와 관련해 영국 방송 <비비시>(BBC) 등 외신은 유족과 직접 접촉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참사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검토하는 기사를 연달아 내면서 호평받았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2차 가해’ 운운하며 유족에게 접촉하는 시도 자체를 안 하거나, 그들의 의사 확인(동의) 없이 희생자 명단을 무단으로 공개하는 방식으로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겼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급한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거나, 말하라 강요하거나, 기록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언론은 멸칭 그대로 ‘기레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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