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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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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은 길을 떠난다 연결된 세상으로

비건이 된 뒤 유기농·로컬리즘·제로웨이스트·자급자족으로 ‘진화’하며 생명과 관계 맺는 사람들
등록 2022-08-10 07:40 수정 2022-12-09 07:24
2022년 7월19일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경남 진주시 자기 집에서 두부·버섯 등으로 만든 토르티야를 먹는 영상을 찍고 있다. 류우종 기자

2022년 7월19일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경남 진주시 자기 집에서 두부·버섯 등으로 만든 토르티야를 먹는 영상을 찍고 있다. 류우종 기자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박지혜)는 2021년 8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경남 진주로 이주했다. 근무도 원격으로 하는 세상에 직업 유튜버가 서울을 떠난 일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도권 과밀은 비건 영역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을 벗어나면 딴 세상이다. 비건 식당·커뮤니티도 찾기 어렵다. 차별적인 말과 시선이 넘쳐나는 이 땅에서 소수자로 살아남기란, 그마저도 동료 없이 혼자라면 더더욱 녹록지 않은 일이다. 하루하루 ‘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금방 지쳐버린다고 비건들은 말한다. 하지만 초식마녀를 포함해 비거니즘을 추구하는 많은 청년이 서울을 떠나 힘든 길을 자처하고 있다. 이들은 왜 서울을 떠났을까.

비거니즘은 빨간약,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2022년 7월19일 초식마녀를 진주에서 만났다. 서울에서 KTX로 4시간 거리, 진주역엔 배롱나무 붉은 꽃이 절정이었다. 막 배롱나무 개화가 시작된 서울과의 물리적 거리감이 와닿았다. “비건이 되고 난 뒤 3년 새, 비건 제품이 적어도 10배 이상 많아진 듯한데, 비거니즘은 서울 위주로만 확산되는 것 같아요. 제 유튜브를 보고 ‘서울 외 비건’들이 고민을 상담하더라고요. ‘너무 외롭고 힘들다’고. ‘나도 서울을 벗어나 비건 생활을 함께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직장을 그만둔 김에 진주로 이사 오게 됐지요.”

한참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일탈’이 이해됐다. “비거니즘은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똑같아요. 먹고 나면 먹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거든요. 한 번 (동물 착취가) 어떤 식으로 (내 소비와) 연결됐는지 보면 그걸 외면하기가 힘들어요. 내가 쉽고 편리하게 살려고 그동안 파괴적인 소비를 했던 것을.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점점 더 노력하게 되거든요. 유튜브를 하게 된 것도, 온실(서울)을 벗어나서 진주로 이사 온 것도 게이머가 레벨을 낮춰서 게임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달까요.” 그는 진주로 온 뒤 독서모임 3곳에 참여하고,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지역 모임에 초청돼 비거니즘을 강의하고 있다.

초식마녀는 가장 영향력 있는 비건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비건 유튜버 가운데 구독자(2만여 명)가 가장 많다. 2019년 3월 비건이 되고 한 달 지났을 때 곧바로 유튜브를 시작했다. 두부·토마토·애호박·버섯류 같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비건 레시피’가 핵심 콘텐츠다. 비건이나 ‘비건 지향’ 등 특정 구매 성향을 가진 구독자가 대다수라는 점에서 비건 제품을 출시한 기업들로부터 협업 제안, 광고 문의 등 러브콜이 이어진다. “대기업이 대량생산된 제품을 광고한다고 생각하면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와요. 그래도 ‘잘 만든 비건 제품을 소개하는 것도 비거니즘 전파법이 아닐까’ 하고 광고를 받아요.”

이날 초식마녀는 20분가량 버섯과 두부를 넣고 치폴레마요(식물성 마요네즈)를 곁들인 토르티야 요리 영상을 찍었다. 직업 유튜버라지만, 수수한 조리법처럼 촬영 도구도 삼각대와 목걸이 홀더가 전부였다. “사실 채소로만 음식을 만들면 특유의 이상한 냄새가 날 일이 없어요. 동물성 재료보다 손질도 간편해서 간만 잘 맞추면 요리를 망치는 게 더 어렵더라고요.” 초식마녀가 만든 요리를 함께 나눠 먹었다. 마법이 통했기 때문일까. 초간단 요리였지만 맛있었다.

비거니즘은 단순히 동물성 음식에 대한 소비를 거부하는 것을 넘어선다. 집약적인 공장식 축산을 지탱하는 우리 사회 시스템에 대해 반성하고,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려는 실천철학이다. 많은 비건이 서울을 벗어나 살아가려 하고, 제로웨이스트(쓰레기 없애기)나 로컬리즘(지역주의), 유기농·자급자족을 실천하는 이유다.

2022년 7월19일 오후 경남 밀양의 제로웨이스트 카페 ‘가치쓰제이’에서 밀양에서 농사짓는 박기완씨를 만났다. 류우종 기자

2022년 7월19일 오후 경남 밀양의 제로웨이스트 카페 ‘가치쓰제이’에서 밀양에서 농사짓는 박기완씨를 만났다. 류우종 기자

생명을 자본으로, 제품으로 생각하는 착각

2018년 동물권 단체 ‘케어’의 박아무개 대표가 수년간 구조한 개 100마리가량을 몰래 안락사시킨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케어’에서 영상 PD로 일한 박기완씨 등 케어 활동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박씨는 2020년 2월 경남 밀양 단장면 감물리에서 농사짓고 ‘자급’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 2022년 7월19일 오후 밀양의 유일한 제로웨이스트 가게인 ‘가치쓰제이’에서 박씨를 만났다.

“한참 고민하는 시기를 가졌어요.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대표 한 사람의 문제라기보다 이건 결국 생명을 돈·물건으로 바라보는 자본주의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대안적인 삶을 고민했고, 그러다 자급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현재 그가 일구는 밭은 100평 남짓. 작물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목표가 아니니 조금씩 70여 종의 작물을 키운다. 비료와 농약은 물론 기계도 쓰지 않고 팔뚝으로만 농사를 짓는다. 자신의 똥과 오줌을 모으는 생태 화장실을 만들었다. 똥에 왕겨를 덮어주고 오줌을 숙성하면 좋은 거름이 되고, 이걸 다시 밭에 주고, 그 밭에서 난 작물을 먹는다.

박씨는 “농부는 우리나라 인구의 5%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95%는 누군가 지어줄 거라 생각하고, 생명을 자본으로, 생산되는 제품으로 착각하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환경에 최소한 영향을 덜 끼치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그가 정의하는 비거니즘이다. 그런 점에서 “농사는 가장 중요하고 꼭 해야 할 일”이다.

도축 전 동물을 찾아 ‘비질’ 행동 중인 혜린씨. 혜린 제공

도축 전 동물을 찾아 ‘비질’ 행동 중인 혜린씨. 혜린 제공

소비자를 벗어나 생산자, 창작자, 활동가로

김서지씨도 비슷하다. 비건이 된 뒤 자연스럽게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게 됐다. “농부의 인권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어떻게 포장됐는지, 플라스틱을 적게 쓰는 방식으로 판매됐는지 생산 공정 전체를 봐야 해요.” 김씨는 2020년 3월부터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으로 이주해, 친한 언니와 둘이서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통·번역을 전공해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고향 전남 장성에 있는 아버지 유기농 농장(창대농원)에서 생산한 농작물을 활용한 제로웨이스트 브랜드 ‘MU’를 2018년 기획·론칭했다.

유기농 제품으로 구성된 ‘MU’는 제품 생산·제조 과정에서 농약은 물론 쓰레기 발생을 줄인 브랜드다. 론칭 초기에 김씨가 전국 제로웨이스트 가게들을 찾아가 홍보해야 했지만 4년이 지난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처음엔 ‘비건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지구 전체의 안전성을 고민하고 진정으로 농부를 위한 일이 뭔지, 전체(생명)를 위한 길이 뭔지 고민하고 더 잘해보고 싶어졌어요.”

끊임없이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비건에게 ‘진화’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서울애니멀세이브 등 여러 동물권 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혜린씨가 말한다. “단지 식물성, 유기농 제품을 소비하는 것으로는 노동자 착취나 단일작물 재배로 인한 땅 황폐화 등 다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우리의 소비로 구하는 것이 동물인지, 아니면 비건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인지 고민해봐야 해요. 우리 위치가 소비자로만 고정된 것을 거부하고 작물을 생산하는 생산자, 창작자 그리고 (동물권 단체의) 활동가로 자기 삶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 좀더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 (비건들이) 그렇게 변화해가는 것 같아요.”

혜린씨는 비거니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질’(Vigil) 등의 활동을 통한 생명과의 ‘관계맺기’라고 강조했다. ‘철야 예배’라는 뜻의 비질은 도축장·수산시장 등을 찾아가 동물을 직접 보고,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동물권 단체의 직접행동을 말한다. “2021년 6월23일 도살장 앞에서 닭을 구조해 ‘잎싹’이라고 부르며 4개월가량 함께 살았어요. 어떤 닭은 계속 죽어가는데, 다른 닭은 사람들이 예뻐해주고… 모든 동물을 구조할 순 없지만 이런 괴리를 목격하고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뭘 할지 고민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한겨레21>과 통화한 2022년 7월6일, 혜린씨는 전남 구례 지리산에서 엿새째 텐트 생활을 하며 쉬고 있었다. 그는 “저도 도시(서울)의 삶에 한계를 느끼고 있고, 언젠가 귀농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2020년 3월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으로 이주한 ‘비건’ 김서지씨가 농사일하다 잠시 쉬고 있다. 김서지 제공

2020년 3월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으로 이주한 ‘비건’ 김서지씨가 농사일하다 잠시 쉬고 있다. 김서지 제공

삶을 적극적으로 바꿔가는 자아 찾기

비거니즘은 자기 삶을 근본적으로 회의하면서 적극적으로 바꿔나간다는 점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서지씨는 이렇게 말했다. “도시라는 구조에서는 내가 소비하는 것이 어디서 왔는지 불투명하잖아요. ‘관계맺기’는 그 과정을 투명하게 만들고 뿌리를 알아보자는 거예요. 자아를 찾는 것과 비슷해요. 소비하면서 동물을 착취하고 나를 착취하고, 그러면서 희생됐던 나를 찾아가는 것. 이게 바로 비거니즘이고 관계맺기라고 생각해요.

진주·밀양(경남)=글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저는 샐러드 잘 안 먹는 비건입니다" |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 인터뷰
https://youtu.be/cUNWxQzLnW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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