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다른 입장

등록 2022-06-27 12:27 수정 2022-06-28 01:01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대학 졸업 뒤 줄곧 사회운동단체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하다가 서른 살에 처음으로 출판사에 취직했다. 진보적인 회사로 알려진 곳인데 막상 안에서 보니 여러 문제가 있었다. 당장 나보다 앞서 입사한 동료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계약해지를 당했다. 해고당하지 않고 꾸준히 돈 벌고 싶은 마음에 동료들과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사 쪽과 단체협약 협상을 하면서 한번은 장이 꼬였다. 워낙 스트레스를 안 받는 성격인데 사 쪽의 억지를 겪고 나니 스트레스가 크게 온 탓이다.

체계가 먼저냐 구호가 먼저냐

노사 입장 차이 때문이 아니라 사 쪽의 태도 때문이었다.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입장이 다르니 협상하는 게 아닌가. 노동조합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인정할 수 없다는 완강한 태도에 그만 질려버렸다. 노동법에 명시된 대로 노동시간을 월 209시간으로 단협에 넣자는 노동조합의 당연한 주장에 대표이사는 법이 잘못됐다며 실제로 노동시간을 세봤는데 209시간이 안 된다고 억지를 부렸다. 주휴수당 개념을 설명해줘도 막무가내였다.

사 쪽의 무지막지한 태도를 겪으면서 나는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을 했던 나는 회사 대표이사처럼 권력을 가진 자는 아니었지만 나와 입장이 다른 상대방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는 비슷했다. 신영복 선생님이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중요하며 그것이 “관계의 최고 형태”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그 말씀을 떠올렸다. 나와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의 말은 경청했고,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의 말은 무시했다.

노동절 집회를 준비하려고 여러 학생운동 그룹이 모인 회의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았다. 밤새워 지속된 그 회의의 주요 안건은 연대체 조직 체계를 먼저 세우고 핵심 구호를 정할지, 반대로 구호를 먼저 정하고 체계를 세울지였다. 실제로는 어느 그룹이 주도권을 잡을지 기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구호 먼저 정하자는 쪽에서 마르크스가 이랬다고 말하면 체계 먼저 잡자는 쪽에서 레닌이 저랬다고 응수했으니, 마르크스나 레닌이 이 모습을 봤다면 기막혀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나는 입장의 동일함보다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병역거부운동을 하면서, 출판사에서 노조활동을 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입장이 동일한 사람들만 만나며 사는 방법은 없다. 노동조합의 경우도 사 쪽과 노 쪽의 입장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조합원 사이에서도 입장이 달랐다. 세상 사람 모두가 같은 입장일 수 없고, 우리는 입장이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세상살이는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바라는 바를 어떻게 조율해나갈지가 문제였다. 무슨 일이든 진행하려면 입장이 다른 사람을 만나 양보하고 타협하고 때로는 설득하고 설득당해야만 했다.

입장보다 태도

이때 대립하는 양쪽 모두의 태도가 중요하지만 중요한 정도와 이유는 다르다.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을 가진 이들의 태도다. 권력자가 입장이 다른 이를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는 순간 그것은 사회적 폭력이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 된다는 회장님의 태도가 노동자들이 마주하는 폭력을 불러오는 것처럼 말이다. 권력에 맞서는 이들의 태도를 문제 삼아 주장하는 바를 깎아내리려는 시도에는 단호하게 반대하지만, 약자들의 태도도 중요하다. 권력을 가진 이들도 감정이 있는지라 자신에게 인신공격을 해대는 상대방의 말은 더 안 듣게 된다. 약자들이 투쟁할 때 자신의 태도를 살펴야 하는 까닭은 그래야 투쟁을 통해 원하는 걸 이룰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용석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