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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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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모양

등록 2022-05-05 06:06 수정 2022-05-06 02:0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4월에는 만난 적 없는 이웃들의 죽음을 추모했다.

4월4일에는 서울 관악구에 살던 30대 기초생활수급자가, 21일에는 종로에 살던 80대 어머니와 50대 아들이 숨진 지 한 달 만에 발견됐다. 11일에는 영등포에 있는 고시원에 불이 나 두 명이 숨졌다.

살고 있는 집 때문에 도움받지 못한 모자

관악구에서 숨진 30대 기초생활수급자는 간질환 등 여러 질병으로 병사했다. 한 달이나 늦게 발견된 이유는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드물어서다. 아프면 가난해지고, 가난하면 외로워지는 사회의 면면은 30대 젊은이도 피해가지 않았다. 나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친구, ‘오렌지가 좋아’를 떠올렸다. 일주일에 세 번 투석치료를 받아야 했던 청년 기초생활수급자인 그를 우리는 오렌지라고 불렀다. 오렌지는 수급자로 사는 것은 친구 관계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신장병 환우회 친구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면서도 1만~2만원의 식사나 커피 비용이 부담스러워 포기할 때마다 오렌지의 삶에도 외로움이 쌓였을 것이다.

종로에서 숨진 모자의 경우 정부 쪽에서 보면 빈곤층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던 집의 공시지가는 1억7천만원, 1930년에 지은 낡은 집이지만 서울 집값과 함께 오른 가격이 그들의 목숨을 죄었다. 사는 집마저 자산으로 보고, 소득으로 환산하는 정부 기준에서 이들은 복지에 접근할 수 없는 자산가였다. 2022년 초에도 복지 신청을 위해 동주민센터에 들렀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들이 왜 집을 팔지 않았을까 의아해하지만 집을 파는 것이 더 어려운 선택이었을 수 있다. 40년 산 집을 떠날 수 없었다든지, 최소한의 주거안정을 잃고 2년마다 이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든지, 마지막 남은 생의 발판을 팔았다고 후회할까봐 불안했다든지, 오랜 빈곤으로 인한 심리사회적 외상이 이 모든 절차를 불가능하게 했다든지. 어떤 가난의 모양은 그렇다.

이들 모자를 처음 찾은 수도검침원이 본 것은 어머니의 주검과 이불로 둘둘 말린 아들의 주검이었다. 부검 결과 아들이 부정맥으로 갑작스럽게 숨지고, 이어 어머니가 심근경색으로 숨졌다고 한다. 아들의 도움 없이 밖에 나갈 수 없던 80대 어머니는 먼저 떠난 아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얼마간의 밤과 낮을 보낸 뒤 홀로 죽음을 맞았다. 뒤늦게 찾은 그들의 집 앞에는 전기요금 미납 고지서가 붙어 있었다. 1억7천만원의 작은 집에는 한낮에도 빛이 들지 않았다.

영등포의 고시원에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었지만, 물은 화재를 진압할 만큼 뿌려지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해 빠져나올 수 없던 두 사람이 숨졌다. 화재 현장 앞에 있던 소방서의 현황판에는 호별로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인적사항과 함께 생존자의 탈출 경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생존한 이들의 경로는 ‘자력대피’ 단 한 가지였다.

자력대피, 생존자들의 탈출 경로

사람들은 흔히 가난에 빠진 이들에게 일정한 경로나 특징이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늘 반대로 생각한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가난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누군가는 가난해져야 하기에 현재 가난한 이들은 우리 사회의 결과를 떠안은 몸일 뿐이다. 하지만 뼛속 깊이 각인된 각자도생의 명령은 성공한 소수가 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삶에서 본색을 드러낸다. 공동의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대신 고통을 경쟁하는 것으로, 타인의 실패에 가혹해지는 것으로, 2022년 4월에 떠난 이웃의 죽음을 추모할 겨를이 없는 것으로.

4월에 떠난 이웃들을 기억한다. 그저 기억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므로 분한 마음을 곁들여 기억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죽음이라는 계보를 멈출 때까지.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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