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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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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빵이여, 안녕

등록 2022-04-18 17:04 수정 2022-04-19 02:11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서울 지하철 양재역 5번 출구로 나와 3분 정도 걸으니 깃발 하나가 펄럭이고 있었다. 파리바게뜨·배스킨라빈스·던킨도너츠 등 다수의 계열사를 보유한 종합식품기업 SPC그룹 본사 앞,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파리바게뜨 임종린 지회장이 단식농성 중인 천막이었다. 천막은 연대 슬로건으로 뒤덮여 있었다. “빵보다 사람이다!” “SPC는 노동자를 그만 괴롭히고 존중해라!” “피카츄가 노조탄압 책임져라!” 요즘 없어서 못 판다는 SPC삼립의 ‘포켓몬 빵’을 가리키는 듯했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는 엔딩이 없다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민주노조)는 2017년 만들어졌다. 20대 초반, 친구에게 끌려간 다단계 업체에서 진 빚을 갚느라 파리바게뜨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얼결에 제빵기사가 된 임종린은 10년 동안 열심히, 그리고 ‘순종적으로’ 일했다. 하지만 열악한 노동환경과 부당한 대우 때문에 퇴사를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하소연이라도 해보자 싶어 찾아간 정의당 노동상담창구에서 새로운 길을 만났다. 동료들을 모으고 노조를 만들어 불법파견 문제를 공론화하고 고용노동부로부터 직접고용 명령까지 끌어낸 것이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종필 감독은 이 ‘평범한 영웅’의 이야기를 토대 삼아 이자영(고아성)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와 달리 현실에는 엔딩이 없다. 민주노조가 설립된 뒤 한국노총 소속 노조를 비롯해 몇 개의 노조가 더 생겨났고, 이들이 연합해 한국노총 노조가 과반 노조가 되면서 민주노조는 교섭권을 갖지 못했다. 사 쪽은 민주노조 파괴 작업에 들어갔다. 2021년 2월, 750여 명이던 조합원은 1년 사이 200여 명으로 줄었다. “민주노총에 있으면 진급이 안 된다. 한국노총에 있어야 유리하다”고 회유하던 관리자들은 기사 한 명을 노조에서 탈퇴시킬 때마다 포상금을 받았다. A지역에서 B지역으로 이사한 기사에게 점포 이동을 시켜주지 않으면서 “민주노총 탈퇴하고 한국노총 가입한 다음에 다시 얘기해보라”고 압력을 넣었다. 육아휴직자의 경우 “민주노총에 남으면 복직 못할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한 달에 100장씩 노조탈퇴서가 들어왔다. 2022년 3월28일, 임 지회장은 SPC그룹에 부당노동행위를 중단·사과하라고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제빵기사들의 점심시간 1시간 보장, 모성보호, 휴식권 보장 등 지극히 당연한 권리를 주장했을 뿐인데도 지난 5년간 그가 선 자리는 점점 척박해졌다. 막막한 현실을 버티게 하는 동력을 묻자 그는 남아 있는 조합원들, 그리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이 투쟁을 도와주는 전국의 다른 노동조합원들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분들이 있는데 제가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연대라는 게, 참 고맙고도 무서운 것 같아요.”

식품회사 노동자의 단식 17일차

싸우는 사람에게 연대는 고맙고도 무서운 것이다. 그가 싸우는 상대가 무서워하는 것도 연대일 것이다. 임 지회장은 “노동환경이나 위생 문제 같은 건 내부에서 계속 지적해야 회사에서도 그나마 눈치를 보거든요. 건강한 노동조합이 있어야 소비자도 건강한 제품을 먹을 수 있는 거죠”라고 말했다. 나는 SPC그룹의 부당노동행위가 중단될 때까지 불매로 연대하기로 했다. 원래는 아침 식사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는 성격이라 오래 굶어본 적이 없다는 그에게, 혹시 단식농성을 마친다면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달걀 푼 라면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올해로 파리바게뜨 근속 15년을 맞은 노동자 임종린은 이 글을 쓰는 2022년 4월13일 현재, 단식 17일차다.

최지은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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